연암 산책(5)

2008. 9. 28. 11:27연암 산책/연암에 관한 글

개를 키우지 마라

‘개를 키우지 마라’는 연암의 성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연암은 “개를 기르지 마라(不許畜狗).”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또 개를 기른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죽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는 것만 못하다.


말눈치로 보아 ‘정을 떼기 어려우니 아예 기르지 마라’는 소리이다.

어전(語典)에 ‘애완견’이라는 명사가 오르지 않을 때다. 계층이 지배하는 조선후기, 양반이 아니면 ‘사람’이기조차 죄스럽던 때였다. 누가 저 견공(犬公)들에게 곁을 내주었겠는가.

연암의 삶 자체가 우리의 문학사요, 사상사가 된 지금, 뜬금없는 소리인지 모르나 나는 이것이 그의 삶의 동선(動線)이라고 생각한다.

정녕 억압과 모순의 시대에 학문이라는 허울에 기식한 수많은 지식인 중, 정녕 몇 명이 저 개와 정을 주고받았겠는가 말이다?



점심∥김홍도金弘道, 1745∼?

상사람들의 점심 풍경이다. 아마도 점심을 이고 와 내려놓고 젖먹이는 저 아낙을 따라 온 듯한 개가 옆을 지키고 앉아있다. 저 시절, 저 개에게 눈길을 주고 끌어 않은 연암이었기에 연암소설이 나온 것이렷다. 나는 연암소설을 읽을 때면 ‘개를 키우지 마라’라는 저 말을 연암의 속살로 어림잡고 글줄을 발맘발맘 따라가 본다. 연암을 켜켜이 재어놓은 저 연암의 시대로-


아래 글은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소완정의 ‘여름밤 친구를 찾아서’에 답하는 기문」의 일부인데, 위에서 말한 ‘개를 키우지 마라’가 결코 말선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까치 새끼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밥 알갱이를 던져주니, 길이 들어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하여졌다. 마침내 까치와 희롱하니 “맹상군(孟嘗君, 돈. 맹상군은 전국시대의 귀족으로 성은 전, 이름은 문이었다. 우리말로 돈을 전문錢文이라고 하기에 음의 유사를 들어 비유한 것이다)은 전연 없고 다만 평원객(平原客, 손님. 평원군은 조나라 사람으로 손님을 아주 좋아하였기에 비유한 것이다)만 있구나”하고 말하였다.


굶주린 선비 연암과 다리 부러진 까치 새끼-,

까치에게 밥알을 주며 수작을 붙이고 앉아있는 연암의 모습이 보이듯 그려져 있다. 이 글을 쓸 때 연암은 사흘을 굶을 정도로 극도의 가난 속에 있었으니, 아닌 말로 달력에 표해가며 밥 먹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적절한 결핍에 욕심 없이 머무르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하루하루 끼니 때우기조차 힘든 철골의 가난, 그리고 다리 부러진 까지 한 마리. 허나 연암은 절대적 빈곤가를 서성이서도 미물에게조차 애정을 거두지 않는다.

“맹상군은 전연 없고 다만 평원객만 있구나”라는 말은 ‘돈은 한 푼도 없는데 손님은 있구나’라는 말이다. 언뜻 가난에 대한 자조로 들리지만, 그 보다는 다리 부러진 까치를 손님으로 맞아 밥알을 건네주는 정겨운 연암의 모습이 더욱 다가오지 않는가. 이러한 다정다감한 성격의 연암이기에 그의 소설 속에는 각다분한 삶을 사는 상사람들이 점점이 남아 있는 것이다.

천품이 저러한 연암이었다.

연암의 시대, 바른 소리에 관한한 반송장인 사람들이 대세인 시대 아니었던가? 따지자면 연암은 세상에 대해 야멸치게 독을 품고 대들었으니, 벼슬도 재물도 따를 리 없었다.

연암의 삶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너와 함께 애쓴 짐승이거늘 어찌 이와 같이 잔인한 게냐?

 또 한 번은 타던 말이 죽자 하인들에게 묻어 주게 하였으나, 그들이 이를 잡아먹어 버린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연암은 말의 뼈를 잘 수습하고는 하인들의 볼기를 쳐 몇 달을 내 쫓아 혼쭐을 내었다.

그때 연암은 다음과 같이 경을 쳤다.


사람과 짐승은 비록 차이가 있다지만 서도, 너와 함께 애쓴 짐승이거늘 어찌 이와 같이 잔인한 게냐?


한 자 한 자를 짚어 가며 읽을 필요도 없이 미물에게 조차 따뜻한 마음결로 다가가는 연암의 모습이 아닌가. 서릿발 같은 연암의 호령은 저러한 마음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종채의 기록을 살피면 연암은 아버지가 위독하자 “곧 칼끝으로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베어 핏방울을 약에 떨어뜨려 섞어 드리니 잠시 뒤에 소생하셨다(乃刀尖劃裂左手中指 滴血和藥以進之 俄頃面甦).”라는 기록도 보인다. 연암의 반포(反哺: 안갚음, 어버이의 은혜에 대한 자식의 효도)가 어떠했는지는 이러한 행적으로 보암보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정다감한 연암의 모습은 그의 주변 인물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연암에게는 이기득(李驥得, ?~?)이라는 중인 서리 층으로 스무 살 남짓에 죽은 제자가 있었다. 이기득은 연암이 연압협에 들어갈 때에 따라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연암은 그의 영결을 직접 찾아가 마쳤으며 그가 손수 베껴 쓴 ������소학감주������를 늘 책상에 두었다한다.

 후일 연암이 이승을 하직하자 기득의 처가 찾아와 지아비의 평소 뜻이라 하며 여막아래서 곡을 하고 ‘심상(心喪)’을 입었다. 심상이란 상복은 입지 아니하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예법이다. 기득이란 제자에 대한 정을 어림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 연암의 집에서 청지기 노릇하던 김오복(金五福, ?~1805, 10, 21일)이라는 이는 연암의 상이 있은 다음날 사망하였다. 연암이 35세 무렵 여행할 때 어린 종으로 동행했으니 40세 후반쯤에 사망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연암을 지성으로 섬겼기에 그러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니 오복에 대한 연암의 정 또한 짐작할만하다. 이응익의 기록을 보면 연암의 제자 박제가朴齊家(1750~1805) 또한 선생이 운명함을 보고 너무나 슬퍼하여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하였다.

 연암의 삶의 강골함이나 거리낌이 없는 행동은, 저 순후함과 나란한 가슴으로 사는 선비의 의식을 본밑으로 한 것들이다. 그의 다소 바자위진 글 또한, 가난한 삶을 사는 이의 복수가 아닌 저러한 이유로 접해야 할 것이다.

 


박지원朴趾源 초상∥

박지원의 손자인 박주수朴珠壽의 그림

가장 널리 알려진 연암의 초상으로 손자 박주수가 그렸다. 홍길주는 ������수여방필������에서 ‘박주수의 그림 솜씨가 뛰어 나다.’고 하며 “연암 선생과 7분쯤 비슷한 초상화가 나왔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홍길주도 박주수도 연암을 보지 못한 것은 마찬 가지다.

어글어글한 눈, 눈초리가 올라간 것하며 오뚝한 콧날과 턱수염이 매서운 인상을 준다.

그러나 넉넉한 풍채에서 풍기는 기운은 대인처럼 우람하다. ������과정록������에 보이는 아들 종채의 기록과는 얼굴 모양이 사뭇 다르다.



가닥가닥 연암의 성미를 잘 담고 있는 또 한편의 글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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