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산책 (3)

2008. 9. 24. 08:52연암 산책/연암에 관한 글

새벽달은 누이의 눈썹과 같구나

연암이 죽은 큰 누이가 그리워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연암은 중세인 답지 않게 따뜻한 시선으로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연암은 아내 이씨 와 형수, 누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주었는데 아마도 그를 키운 것이 형수이고 아내는 모진 가난을 이고 살아서 그러하였던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가 스무 수나 되는데 현재 한 수도 남아 있지를 않다. 다만 연암이 쓴 형수에 대한 제문이나 누이를 그리워하여 쓴 글이 있어, 그의 여인들에 대한 마음자리와 부인 이씨에 대한 낫낫한 정을 대강이나마 엿볼 수 있다.

아마 연암이 일생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은 그의 부인이 아니었던가한다.

연암은 처음 벼슬길에 나간 이듬해 부인을 잃고, 마디에 옹이라고 곧바로 큰며느리 상마저 당해 끼니조차 챙겨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으나, 끝내 혼자 살았으니 말이다. 비록 가난할지언정 명문가의 후예인 연암 같은 이가 처녀장가를 든다손 쳐도, 배필 자리를 너도나도 내놓을 법 하련만 연암은 소실을 둔 적도 그렇다고 관기를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종채의 기록에 보면 주위에서 보다 못해 여러 번 채근도 해보았으나 연암은 이를 모두 마다하였다. 지방수령으로 있을 때 시중드는 기생들조차 집안 식구와 진배없이 지낼지언정 한 번도 마음을 준적도 없었다.

종채의 기록으로 어림잡아보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큰며느리 이씨의 상을 당하여 음식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소실을 얻을 것을 권하였지만 아버지는 얼버무릴 뿐이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시중드는 첩을 두지 않으셨다. 늘 어머니의 덕행을 말하면 불현듯이 처연하게 오래도록 계셨다.


아들로서 부모에 대한 기록임을 감안하더라도 종채의 기록을 보면 연암의 아내는 꽤 현숙한 여인이었던 듯하다. 연암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1737~1787)는 당대 명문가였던 이보천의 딸로 1787년 51세로 이승을 달리하였다. 연암과 부인은 동갑내기였다.

연암은 장인 이보천(李輔天)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 이양천(李亮天)에게 <사기>를 배웠다. 기록에 의하면 두 형제분 모두 꼬장한 선비였으니, 부인 이씨의 가정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인 이씨는 처음 시집와서 집이 좁아 친정에 가 있을 정도였고 살림 난 뒤에도 가난은 면치 못했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한 잦은 이사와 궁벽한 살림살이에도 이를 입에 담은 적이 없었으며, 집안 살림을 주도한 큰동서를 공경하여 우애가 좋았다 한다. 이씨는 큰동서가 후사 없이 죽자, 당시 십여 세 밖에 안 되는 맏아들 종의를 상주로 세우기까지 하였다.

한 번은 연암이 옷을 해 입으라고 이씨에게 돈을 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이씨는 ‘형님 댁은 끼니를 거른다’며 ‘집에 돈을 들일 수 없다’고 하여 연암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연암은 평소 이러한 부인 이씨의 부덕을 존경했다. 부인과 사별한 이후 종신토록 독신으로 지낸 것도 아마 이씨의 저러한 현숙함 때문이 아닌가 한다. 더욱이 가난한 연암의 집안에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다하다, 연암이 벼슬길에 나간 지 겨우 1년 만에, 궁핍을 면할만하니 이승을 달리한 것이다. 연암의 마음이 여북했겠는가.

연암이 부인의 상을 당하여 애도하여 지은 절구 20수가 단 한 편도 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저러한 연암의 심결은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 큰누이 정부인 박씨에게 드리는 묘지명」이나 <열녀함양박씨전 병서> 같은 글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큰 누이를 잃고 지은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의 한 구절을 보자.

큰누이의 운구를 실은 배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지은 글인데 연암의 누이에 대한 정이 진솔하게 배어 있다.


아아!

누이가 처음 시집가는 날 새벽에 화장을 하던 일이 어제와 같다. 그때 내 나이 막 여덟 살이었지. 어리광을 피면서 떠나는 말 앞에 누워 뒹굴면서 신랑의 말을 흉내 내어 점잖이 떠듬적거리니, 큰누이는 부끄러워 얼레빗을 내 이마에 떨어뜨려 맞추었다. 나는 골이 나 울면서 먹을 분가루에 개어놓고 거울 가득히 침을 뱉어 놓으니, 누이는 옥으로 만든 오리와 금으로 만든 벌을 꺼내서는 나에게 넌지시 건네어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지금 벌써 스무 여덟 해가 되었다.

말을 강가에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명정銘旌이 펄럭펄럭 날리고 돛대 그림자는 강물에 구불구불하더니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서자 가려서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강 위의 먼 산이 검푸른 게 마치 누이의 큰머리채와 같고 강물 빛은 누이의 거울과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이의 눈썹과 같았다. …


연암과는 여덟 살 터울의 큰누이, 그 누이에 대한 가슴 저미는 사랑이다.

연암의 누이는 열여섯에 이현모에게 시집을 가서 1남 1녀를 두고 마흔세 해를 살다 간 여인이다. 큰누이의 시집가는 날, 누이를 뺏기는 것에 샘이 난 소년의 짓궂은 장난질과 부끄러워하는 누이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때 연암의 나이 35세였다. 그런데도 내면의 동심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놓은 것을 보면 그가 품고 있는 누이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말을 꺼낸 김에 연암이 그의 형을 그린 시를 한 편 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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