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산책(2)

2008. 9. 20. 13:13연암 산책/연암에 관한 글

서두가 꽤 길었다.

어제 오늘일이 아니거니와 200여 년 저 너머도 그러하였다.

진리는 실종되었고 도덕은 인성(人性)의 변방으로 내�긴 지 오래였다. 양심과 정의가 있던 자리는 부패와 물질이 차고앉았고 바른 말을 놓아야할 지식인들은 실어증에 바른 삶에 관한한 기억상실증까지 걸린 이들이 꽤 많던 연암의 시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하여 조선후기를 헤치며 올곧음을 찾아 걸어간 저 이의 뒤를 발맘발맘 좇아가 보자.

연암은 1737년 반남박씨인 부친 사유(師愈, 1703~1767)와 모친 함평 이씨(咸平李氏, 1701~1759)의 2남 2녀 중 막내로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 아현동쯤인 듯)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조부 필균(弼均)은 경기도 관찰사, 지돈녕 부사를 지냈고, 선조 때의 명신인 박소(朴紹)는 그의 선조요, 연암 당대 부마인  박명원은 연암의 삼종형이었다. 연암은 이렇듯 당대 내로라하는 반남박씨 노론 명문가 출생이었다.

더욱이 그의 작품 <허생>․<양반전> 따위 소설 12편을 비롯하여, 『열하일기』로 미루어 본다면 저 이의 문재(文才)를 읽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그러나 연암은 과거를 통한 출세를 마다하고 양심 없는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하거나 다양한 사물의 이해에 대한 글만을 남겼다. 훗날 그의 벼슬살이는 연암의 저러한 삶에서 방귀폭 밖에는 안 된다. 벼슬살이라야 그의 나이 50세에 겨우 종 9품 벼슬인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건축물의 신축과 보수업무를 감독으로 오늘날의 공사감독관 격임)을 시작으로,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거쳐 65세에 양양부사 자리를 내놓은 것이 전부였다. 아래에서 잠시 언급하겠지만 벼슬살이는 청백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평생 가진 것이라곤 붓 밖에 없었다. 

아마 저러한 연암의 삶에서 연유했으리라.

많은 이들은 이미 이 글 앞에서 지적한 바처럼, 연암을 강골한, 풍자, 비꼼, 골계 따위로만 읽고, 더하여 ‘이단적’ 혹은 ‘괴팍’ 등의 치우친 성향의 어휘로 저 이를 평가하는 이들까지 보인다. 잘못도 잘못이려니와 몇 안 되는 우리의 소중한 선인에 대한 경도된 품평이기에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연암은 저러한 냉소적인 단어들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연암은 속정이 많은 본 마음밭이 순후한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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