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詩心), 그리고 기생(妓生) (1.2)

2022. 4. 15. 16:53간 선생의 야담 카페

 

1.

기생(妓生)을 기생(寄生)으로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글은 양반만이 사람이던 시절 기생의 시심(詩心)을 발맘발맘 좇은 글입니다.

2.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기생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생은 본디 양수척(楊水尺)에서 나온 것인데, 양수척이란 곧 유기장(柳器匠)이다. 이들은 고려 태조가 백제를 공격할 적에도 다스리기 어려웠던 유종(遺種)들로서, 본디 관적(貫籍)도 부역도 없이 떠도는 신세라서 항상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사냥이나 일삼고 버들가지를 엮어서 그릇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뒤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지영(至榮)이 기첩(妓妾) 자운선(紫雲仙)을 선두로 관적시켜 놓고 여러 기생들에게 끝없이 부세를 징수했다. 지영이 죽은 후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자운선을 첩으로 삼고 기생들의 수효를 따져서 부세를 받아들여 부세가 불어났으므로, 양수척들이 거란 군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이들을 읍적(邑籍)에 예속시켜 남자는 노(奴), 여자는 비(婢)로 만들었는데, 비는 흔히 수재(守宰)들에게 사랑을 받아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춤을 익히므로 기생(妓生)으로 지목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악(妓樂)이 점점 번성해지자, 위아래를 막론하고 음탕해진 풍속을 금하지 못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신우(辛禑)가 기생 연쌍비(燕雙飛)에게, 허리에 활을 차고 젓대를 불게 하고는 용을 수놓은 옷을 입혀 가지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다니면서 둘도 없이 총애하였다” 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도 이런 풍속이 온새미로 존속되어, 국초(國初)에 청루(靑樓)를 설치, 열군(列郡)에까지 추한 풍속이 있었으므로 이를 혁파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그러나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저지하기를 “봉사(奉使)하는 신하들이 반드시 양가녀(良家女)를 겁탈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해독이 더욱 심할 것이다.” 하여, 드디어 그대로 두었다고 하였다.

 

청백리였던 허조(許稠,1369∼1439)의 말이 눈에 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