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면 군자가 아니요,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

2015. 8. 6. 11:04간 선생의 야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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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11화

간호윤  |  문학박사

승인 2015.08.06  01:05:20

11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면 군자가 아니요,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1607∼1667)는 판서(判書) 김좌명(金佐明,1616~1671)과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사위였다.
좌명은 갑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과 인망이 매우 떨쳤고 명하는 나이 마흔의 궁색한 선비로 가세가 매우 가난하여 동양위 집안에 혹처럼 붙어서 살았다. 그 장모 이하로 집안사람들이 모두 천대하고 처남 신면(申冕,1607 ~ 1652)이 또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명하를 대하기를 더욱 업신여겨 늘 노예처럼 보았다.
하루는 명하의 밥상에 꿩고기 반찬이 있었다. 신면이 이를 보고 꿩고기를 집어 개에게 던지며 말하였다.
“천인의 밥에 꿩고기가 어찌 가당하겠는가.”
명하는 다만 웃음을 머금고 털끝만큼도 노여운 빛을 띠지 않았다. 동양위는 사람을 알아보는 견식이 있었다. 홀로 그 사람의 비범함을 알았으며 또한 만년에 크게 현달할 것을 알고는 늘 아들 면을 책망하고 마음을 명하에게 더하여 특히 은혜와 예의로써 대하였다.
그 동서 김좌명이 처음에 문형(文衡:저울로 물건을 다는 것과 같이 글을 평가하는 자리라는 뜻에서, ‘대제학’을 달리 이르던 말)이 되었을 때였다. 기천이 표문(表文:마음에 품은 생각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여러 편 지어 좌명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것으로 과거에 급제할 만한가?”
좌명이 보지도 않고 땅에 던지며 말하였다.
“자네의 소위 표(表)라는 것이 표범의 표(豹)이냐? 범가죽 무늬의 표(彪)이냐?”
그러며 꾸짖고 욕하니 기천이 웃으며 말하였다.
“표(表)나 표(豹)나 그 음은 같으니 하등 불가한 것이 없도다.”
그러고 천천히 거두어서는 소매 속에 넣었다.
하루는 동양위가 밖에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귀가하였다. 작은 사랑에서 생황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사람에게 물으니 ‘댁 영감(신면)이 김참판 영감(김좌명)과 기타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방금 노래판을 벌리고 논다’고 하였다. 동양위가 홍생(洪生:홍명하)이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를 물으니 비자(婢子)가 대답하였다.
“홍생은 홀로 아랫방에서 잠을 잡니다.”
동양위가 말을 듣고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이들의 일이 실로 어지럽구나.”
그러고는 즉시 기천 홍명하를 청하여 물었다.
“자네는 무슨 연유로 아이들의 놀음에 참여치 않는겐가?”
명하가 대답하였다.
“재상의 연회에 유생(儒生)이 참여할 수 없으며, 하물며 저 이들이 청하지 않은 이상에 어찌 불청객이 스스로 가겠습니까?”
동양위가 말하였다.
“그러면 자네는 나와 함께 노는 것이 좋겠다.”
그러고 이에 음악을 펼쳐 기쁨을 다하고는 마쳤다. 그 뒤에 동양위가 병을 얻어 장차 죽으려할 때 기천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 잔을 들어 먹으라 권하며 말하였다.
“내가 한 마디 자네에게 부탁할 말이 있네. 이 잔을 마시고 나의 임종의 말을 듣게나.”
기천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떠한 하교를 하실지 알지 못하오나 원컨대 가르침을 먼저 받들고 뒤에 이 잔을 마시겠습니다.”
동양위가 연하여 권하였다.
“이 잔을 마신 뒤에야 내가 말하겠네.”
기천이 끝내 마시지 않고 가르침 받들기만 원하였다. 동양위가 이에 잔을 땅에 던지며 눈물을 머금으며 말했다.
“우리 집안이 망하리로다.”
그러고 곧 운명하니 필시 아들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었다.
그 뒤에 기천이 과거에 급제하여 십년 사이에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신면과 김좌명은 가위 우러러보아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훗날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 신면의 옥사가 이루어져 장차 형벌에 처해질 때였다. 숙종께서 기천에게 신면의 평소 행동과 그 사람됨이 여하한 지를 물으니 기천이 대답하였다.
“신이 서로 안지 수십 년에 아직도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옵니다.”
이로 인하여 신면이 이에 법복(伏法: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당함)하니 이는 다 기천이 면에게 원망하는 뜻을 품은 지 오래되었기에 말 한마디를 내어 이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천이 배명(拜相:정승으로 임명을 받음)한 후로 김좌명이 늘 문형의 자리를 맡았다. 연경(燕京)에 올리는 글을 문형이 지어 가져왔다. 사육(四六;사륙문(四六文)으로 4자와 6자의 구(句)로 이루어진 문체)을 지어 먼저 대신에게 감정코자하였다. 기천이 부채로 치며 말하였다.
“표범의 표(豹)이냐? 범가죽 무늬의 표(彪)이냐?”
이도 또한 평일에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 이를 보복한 것이더라.

외사씨 왈: 신면과 김좌명이 부형의 세력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겸양(謙讓)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교만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가벼이 여겼으니 이는 족히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기천의 일로써 보건대 덕망과 명망 있는 재상으로서, 평일에 이미 동양위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니 신면이 죄를 입을 때에 마땅히 말 한마디를 해 구해주어야 했었다. 장인의 인격이나 식견을 인정받아 후대를 받은 은혜를 보답할 것이거늘 구해주지 않았으며 또 좌명에게 ‘표(豹)이냐? 범가죽 무늬의 표(彪)이냐?’를 되돌려 줌과 같았으니 실로 도량이 좁은 행동이라 일컬을 지로다.

간 선생 왈(曰): 외사씨(송순기)는 기천 홍명하의 속 좁음을 나무란다. 그러나 이 글이 사실이라고 평한다면 김좌명, 신면, 홍명하 모두 인품이 넉넉지 못한 자들이다. 더욱이 이러한 품성으로 벼슬길에 올라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나 또한 배움의 길을 가며 저런 이들을 참 많이도 보았다. 학문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러고 보니 내 인품 또한 좁디좁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모쪼록 남의 가슴에 대못 두어 개 질러 놓는 말만은 말아야겠다. 언젠가 내 블로그(http://blog.naver.com/ho771/)에 써 놓은 <말과 글>이다.

<말과 글>
살아가기 위해 말을 한다. 말 한마디로 남에게 희망을 주기도 절망을 주기도 한다.
살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글 한 구절로 남에게 희망을 주기도 절망을 주기도 한다.
양 극을 오가는 말 한 마디와 글 한 구절. 내 입에서 나온 말과 내 손에서 쓰인 글은 어떠한가? 혹 남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준 것은 아닌가?
말은 천금같이 하고 글은 전쟁하는 마음으로 쓴 이들의 삶을 곰곰 생각해 본다. 저 이들의 말과 글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준다. 그것도 자신의 삶과 일치하는 말과 글이다.
어제 내 입의 말과 내 손의 글이 부끄럽다. 오늘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려는가? 아니면 입을 틀어막고 손을 묶어 두어야하는가?

말할만하면 말하고 言而言
말할만하지 않으면 말하지 말고 不言而不言
말할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言而不言不可
말할만하지 않은데 말해서도 안 된다 不言而言亦不可
입아! 입아! 口乎口乎
이렇게만 할 뿐인져. 如是而已

안방준(安邦俊, 1573~1654) 선생의 <구잠(口箴: 말을 경계하는 글)>이란 글로 오늘의 삶을 경계해 본다.

   
 

 

경기 여주군 흥천면 문장리에 있는 홍명하의 묘.

 

 

 

1)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 황해도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홍성민(洪聖民)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홍서익(洪瑞翼)이며, 어머니는 심종민(沈宗敏)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생원이 되고,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규장각대교, 정언·교리·부수찬·헌납 등을 지냈다. 그 뒤 1649년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를 적발함에 있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또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하였고,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 등 명신들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순조 때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기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또는 귀천(歸川). 비(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흥우(興宇)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육(堉)이며, 어머니는 윤급(尹汲)의 딸이다. 1668년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노량의 대열병(大閱兵)을 시행해 흩어진 군율을 바로잡았고, 병기·군량을 충실히 하였다. 한때 호조판서가 되어 크게 국비를 덜어 재정을 윤활하게 하였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용모가 단정하였다.
특히, 호조판서가 되자 서리(胥吏)들의 부정이 줄었고, 병조판서가 되니 무사가 존경으로 따를 정도로 군율이 엄격하고 공정했으며, 모든 업무에 과단성이 있고 공정하였다.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큰아버지인데도 조정에서는 믿고 중용하였다.

3)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로 영의정 신흠(申欽)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4)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시주(時周). 1624년(인조 2) 생원이 되고 163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1642년 이조좌랑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1651년(효종 2) 송준길(宋浚吉)의 탄핵을 받고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복관되었으나 김자점의 옥사에 연루돼 추국을 받다가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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