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지조 있고 비범한 동정월, 미천한 출신의 이기축(하)

2015. 7. 22. 10:48간 선생의 야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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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9화(하)
간호윤  |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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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21: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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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지조 있고 비범한 동정월, 미천한 출신의 이기축(하)

동정월은 묵동으로 옮긴 후에 김 정언의 무리와 날마다 어울렸다. 하지만 서로 간에 가깝게 교제하였을 뿐, 김 정언의 무리는 동정월의 지조를 알았기에 감히 예가 아닌 말로 희롱하지 못하였다. 오직 정의만 돈독할 뿐이었다.
하루는 동정월이 김 정언을 보고 말하였다.
“진사님과 이 좌랑은 머지않아 반드시 국가의 원훈(元勳:나라를 위한 으뜸 공신)으로 크게 현달(顯達)하실 것입니다. 첩이 비록 일개 자잘한 여자로 배움이 얕고 아는 것이 없지만 장차 익찬(翼贊:잘 도움을 줌)할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또 첩의 지아비가 예의를 모르고 아는 것이 없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릅니다. 언문도 해독치 못하여 무턱대고 주채(酒債:술빚)기록만 허구한 날 해댑니다. 다행히도 진사님께서는 몽학(蒙學:어린아이들의 공부)으로 가르쳐 주시면 마땅히 선생으로 대하여 하루에 한 병의 술을 올리겠습니다.
김 정언이 좋아하니, 동정월은 다음날 아침 지아비에게 책 한 권을 주어 보냈다. 그 전에 동정월은 그 지아비를 시켜 『통감(通鑑)』 제사권을 사오게 하여 그 중간에 표지를 넣고는 말하였다.
“이 책을 끼고 김 정언 댁에 가서 가르침 받기를 청하세요. 선생이 반드시 첫 장부터 가르치려할 것이니 이 말을 따르지 말고 반드시 이 표지를 붙인 곳부터 가르침을 청하세요.”
그 지아비가 그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 지아비의 성명은 이기축(李己丑,1589~1645)이니 기축년(己丑年)에 태어나 이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다.
다음날 아침에 기축이 책을 끼고 가니 김 정언이 말하였다.
“『천자문』인가? 『유합(類合):기본 한자를 수량 방위 등 종류에 따라 구별하여 새김과 독음을 붙여 만든 조선시대의 한자(漢字) 입문서로 보통 『천자문』을 배운 다음에 읽는다.』인가?”
기축이 대답하였다.
“『통감(通鑑)』 제사권이옵니다.”
김 정언이 말하였다.
“뭐? 『통감』! 그것도 제사권을, 허~, 그놈 참. 까막눈인 네가 이 책을 어찌 배우겠나. 너에게 적당치 않으니 모름지기 어서 가 『천자문』이나 가져오너라.”
기축이 말하였다.
“이미 이 책을 가져왔으니 이 책으로 배우기를 청합니다.”
김 정언이 말하였다.
“허! 그래. 하기야 이 책도 또한 글은 글이니 이로써 배운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고 첫 장을 가르치려하니 기축이 표시해둔 곳을 열며 말하였다.
“이곳부터 배우기를 원합니다.”
김 정언이 말하였다.
“이놈! 『통감』부터 배운다는 것도 그런데, 뭐? 이번엔 아예 표를 해준 곳부터 배우겠다고? 이놈아! 무릇 글을 배우는 자는 처음부터 끝에 이르는 것이요, 근본으로부터 말에 도달하는 것이다. 어찌 처음과 근본을 버리고 끝과 말로부터 시작하려 하느냐?”
기축이 아내가 그렇게 하라 하였다 하여 마침내 듣지 않고 표시한 장을 고집하거늘, 김 정언이 끝내 화를 이기지 못하여 책을 땅에 던지며 말하였다.
“천하의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다만 제 아내의 말만 듣는구나.”
기축이 말하였다.
“대저 사람을 가르침에, 배우는 자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한 일이 있는지요?”
김 정언이 아직도 노기를 띠다가 우연히 그 표지를 한 곳을 보게 되었다. 기 표시를 해 둔 장은 한(漢)나라의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하던 일이었다. 김 정언이 이를 보고 마음속으로 깨달은 것이 있어 한참동안을 가만히 있었다.
기축은 도리가 없어 책을 거두어 가니, 김 정언도 더 이상 잡지 않았다.
기축이 돌아와 동정월에게 말하였다.
“이후로는 김 정언에게 술을 내주지 말게. 아!~ 동냥은 주지도 않고 바가지만 박살내버렸어.”
동정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인물이 특출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은 치욕을 받았겠소. 이후에 첩이 마땅히 가르치겠소.”
다음날 김 정언이 와서 동정월을 보고 잘못을 사과한 후에 서로 웃었다. 술을 청하여 다시 몇 잔을 하다가 동정월이 김 정언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어제 제 지아비로 하여금 『통감(通鑑)』 제사권의 곽광이 창읍왕을 폐한 곳에 표를 붙인 뜻을 아시겠는지요.”김 정언이 얼굴색을 변하며 마음속으로 은밀히 ‘동정월은 신인이로다. 내 뜻을 능히 아는구나.’하며 이에 말하였다.
“그대가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데야 어찌 속이겠는가. 과연 지금의 임금이 어리석어 만민의 주인이 되지 못하겠기에 장차 시기를 기다려 폐위를 꾀하려하고 있네.”
동정월이 귓속말을 하였다.
“지금 때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時不可失]. 속히 뜻이 맞는 선비들을 규합하여 거사를 하세요. 그리고 논공행상하는 때에 주상께 아뢰어 첩의 지아비도 이에 동참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 정언이 응낙하고 돌아갔다. 김 정언은 즉, 승평부원(昇平府院) 김류(金瑬,1571~1648: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로 인조반정의 주모자)요, 이 좌랑은 즉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1557~163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로 인조반정의 주모자)였다. 승평이 동정월의 ‘시불가실(時不可失)’이란 말을 받아들이고 즉시 이귀와 광해(光海) 임금을 폐하고 인조(仁祖)를 추대하는 반정(反正)하였다.
김류와 이귀 두 사람은 중흥공신(中興功臣)으로 국가의 원훈이 되었다. 승평이 천폐(天陛:제왕이 있는 궁전의 섬돌로 임금이 사는 궁궐)에 아뢰어 동정월과 기축의 일을 아뢰었다. 임금이 감탄하시고 그 이름이 심히 촌스럽다하여 동음(同音)을 취하야 기축(起築)으로 명명하시고 삼등훈(三等勳)의 녹훈(錄勳:공훈이 있음을 기록해 둠)을 내려 완계군(完溪君)으로 봉하였다.
그 뒤 병자(丙子)의 난리에 기축이 남한산성을 지켰다. 오랑캐 병사들이 크게 이르니 자원 출전하여 수십여 명의 머리를 베어버리자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그 뒤 오랑캐와 강화가 이루어지자 세자를 따라서 심양(瀋陽)에 갔다가 귀국한 후 오래되지 않아 죽자 나라에서는 양의(襄毅)의 시호를 내렸다.

간 선생 왈(曰): 동정월이 『통감(通鑑)』 제사권의 ‘곽광이 창읍왕을 폐한 곳에 표를 붙인 뜻’은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연결된다. 동정월이 표해 둔 곳에 등장하는 곽광(霍光, ? ~ 기원전 68년)은 전한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창읍왕 유하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 왕을 폐위시켜 버렸다. 겨우 창읍왕이 황제에 오른 지 27일 만이었다. 『통감(通鑑)』 제사권의 내용은 이러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동정월이 김 정언에게 “지금 때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時不可失]”라고 한 것과 연결시키면 지금 임금(광해군)을 몰아내라는 뜻이다. 결국 동정월의 이 말은 현실화되었고 인조반정은 성공하였다.
‘시불가실[時不可失]’ 때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에도 세 번의 때가 있다한다. 허나, 문제는 지금 ‘이때’가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그때’인지 알 수 없다는데 있다. 시나브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그렇다. 나이 80 자신 이가 20 대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단풍든 잎은 다시 초록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법이다.
‘이때’가 ‘그때’가 될지 모르니, 그저 오늘 제 깜냥을 다해 정성껏 사는 도리 밖에 없다. 내일이니 모레니 미래니 말은 있지만, 그 날은 오늘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죽는 그 날까지 오늘만 산다. 그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바로 오늘에 있다. 그것이 ‘시불가실’이 넌지시 똥겨주는 뜻이 아닐까?


   
 
<국조인물고>에 보이는 이기축에 대한 시상(諡狀:재상이나 학자들에게 시호를 주려고 관계자들이 의논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글)으로 조태억(趙泰億,1675∼1728)이 썼다.

 

이 내용에 따르면 이기축(李己丑)은 훗날 이기축(李起築, 1589∼1645)으로 개명, 초명은 일정(日丁), 자는 희열(希說), 시호는 양의(襄毅). 충청도 수군절도사 증 순충보조공신 병조판서 완원군 경유(慶裕)의 아들이로 무과에 급제, 충좌위(忠佐衛) 부사과(副司果)가 되고, 완풍군 서(曙)와 종형제로 서로 뜻이 맞아 항상 가까이에서 지냈다. 1622년(광해군14) 완풍군이 장단부사로 갈 적에 역시 따라가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개탄하고 반정에 참여하여 능양군(綾陽君: 뒤의 인조)이 있는 곳과 장단 사이를 매일 내왕하면서 거사(擧事)의 연락을 맡았다.다.
『청구야담』권지삼, ‘책훈명양처명감(策勳名良妻明鑑)’에는 박기축(朴起築)으로 동정월은 기녀로만 되어있다.

 1)조선 광해군 15년(1623)에 이귀·김류 등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파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인 인조를 즉위시킨 정변. 흔히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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