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부귀도 그 마음을 빼앗지 못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재주 있는 사내가 만났네.

2015. 6. 29. 09:04간 선생의 야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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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7화
간호윤  |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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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8  20: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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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부귀도 그 마음을 빼앗지 못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재주 있는 사내가 만났네.

일지매(一枝梅)는 평양(平壤)의 명기이다.
문장에 능하며 가무를 잘하고 겸하여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평양 일경에 제일로 이름을 드날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감사(監司) 너 댓 명을 거치면서도 수청 들기를 응하지 않고 항상 몸을 깨끗하게 스스로를 지켜 그 뜻을 뺏는 자가 없었다.
그 뒤 신(新)감사가 내려갈 때 조전(祖餞:노제(路祭)를 지내고 전송하는 것)하는 객이 천연정(天然亭)에 모였다. 우연히 말끝에 일지매라는 이름이 나왔다. 어떤 이는 가무음률을 말하고 어떤 이는 문장용모를 칭찬하는 소리가 온 좌석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마침 백호(白湖) 임백호(林悌,1549∼1587)가 곁에 있다가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말하였다.
“저 일지매는 당세의 이름 난 기생으로 감사의 수청을 응하지 않는다 하니 그 몸을 자처함이 심히 높은지라. 그러나 내가 가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니 이때에는 여러 공들이 장차 어떻게 하시려오,”
여러 재신들이 모두 말하였다.
“공이 만일 일지매를 데려오면 우리들이 공과 일지매가 함께 살림 차릴 비용을 일체 부담하리라.”
이후에 신감사가 도임한 후에 수청을 분부하나 과연 일지매는 아주 거절하며 목숨을 걸고 응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임 백호가 평양에 내려갔다. 때는 칠월 중순이었다. 평양에 들어가 몸에 입은 화려한 의복을 벗고 해진 도포와 찢어진 갓을 쓰고 여러 날을 실컷 노닐다가 하루는 석양 무렵을 타서 약간의 해물을 짊어지고 집집문전을 오가며 사라고 외쳤다.
어둠이 들 무렵 임 백호가 일지매의 문간에 이르니 한 계집종이 나와서 어물의 값이 얼마임을 물었다. 설왕설래 말을 주고받으니 이 때 하늘빛은 이미 저물었는지라 백호가 하루 머물러 갈 것을 청하였으나 집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애걸하여 겨우 문간 한 귀퉁이를 빌려 해진 자리를 깔고 한 구석 돌을 베고 거짓으로 잠든체하였다.
이때에 달빛은 뜰에 가득하고 시원한 바람은 발을 통해 들어왔다. 일지매가 적적하고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한 자 남짓한 거문고를 안고 달 아래에 단정히 앉아 한 곡을 연주하였다. 또 맑은 노래를 부르거늘 백호가 허리에 차고 있던 옥퉁소를 꺼내어 그 노래에 화답하였다. 퉁소의 운과 노랫소리가 세상에 없는 지음(知音:본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지간에 쓴다. 여기서는 백호의 퉁소소리와 일지매의 노래가 서로 조화로움을 이른다.)이었다.
일지매가 한편으론 놀랍고도 기뻐하며 뜰 가를 오가면서 소리가 나는 곳을 알려고 하는데, 홀연 퉁소소리가 끊어졌다. 퉁소소리의 여음은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밝은 달은 대낮과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적막할 뿐이었다.
이에 탄식을 하며 문득 계단에 서서 한 구의 시를 읊조렸다.

“창가에 복희씨 시절의 달이 밝기도 하네(窓白羲皇月)”

홀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마루에는 태곳적 바람이 맑기도 하네(軒淸太古風)”

일지매가 놀라 근처에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사방을 둘러보아 종적을 찾으려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만 문가에서 잠든 어물상의 코 고는 소리만 들렸다. 바야흐로 흑첨향(黑甛鄕:흑첨(黑甛)은 잠자는 것을 말하는데 잠의 세계가 캄캄하고도 맛이 달다는 뜻이다)에 들었거늘 일지매가 몹시 서운함을 금치 못하여 다시 읊조렸다.

“비단이불을 뉘와 함께 덮을꼬?(錦衾誰與共)”

그러자 어물상이 또 이어 읊었다.

“나그네의 베갯머리 한편이 비어 있네(客枕一隅空)”

이러 하거늘 일지매가 듣기를 마치기도 전에 한 걸음으로 문 앞에 이르러 어물상을 발로 차 일으키며 말했다.
“어느 곳에 사는 쾌남아가 이와 같이 미인의 연약한 심장을 뒤흔들어 놓는 게요.”
그리고 곧 임 백호의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 정결하고 화려한 의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러고는 밤이 다하도록 노래를 불러 기쁨을 다하다가 잠자리를 함께 하였다.
달콤한 밤을 즐기느라 일지매는 동방이 이미 밝은 것도 깨닫지 못하고 조회에도 빠져버렸다. 해가 높이 떠 관가의 사령이 성화와 같이 문 밖에 이르러 두 사람을 함께 붙잡아갔다.
감사가 보니 곧 임 백호였다. 이에 창황히 내려가 친히 결박을 풀고 당상에서 나란히 앉은 후에 일지매와 결연한 사실을 듣고 서로 크게 웃었다.
감사가 일지매에게 말했다.
“나의 인물 풍채가 너의 새신랑만 못하지 않거늘 당초에 내 수청은 응하지 않았음은 무슨 까닭이냐?”
일지매가 대답하였다.
“사또는 부귀라는 세력으로 첩에게 수청을 들라하였을 뿐이지요. 또 첩이 사또의 문장과 음률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첩이 부귀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찌 가벼이 사또의 명령에 복종하겠습니까.”
감사가 소리 높여 칭찬하고 드디어 임 백호와 함께 하루를 기쁘게 술자리를 하고는 가마와 말을 준비하여 상경케 하였다. 백호는 마침내 일지매를 부실로 삼고 한평생을 해로하였다.
외사씨는 말한다.
“속어에 ‘천하에 상대함이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백두산의 상대는 한라산이라 하는 것과 같이 재주 있는 사내의 상대는 아름다운 여인이요, 아름다운 여인의 상대는 재주 있는 사내이니, 즉 일지매의 상대는 임 백호가 된다. 대저 명문가의 규수와 슬기로운 여인은 부귀로도 그 마음을 빼앗지 못하며 위세와 무력으로도 그 뜻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 당시에 감사 무리가 일지매가 명을 거절한다고 무리한 죄를 가하여 중형으로 묶었을 지라도 일지매가 결코 그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또 일지매로 말하면 한 도의 당당한 수령에게는 수청을 응하지 않고 임 백호가 진실로 일개 어물상으로 한 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몸을 허락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두 사람의 문장 풍류가 서로 맞은 것이다. 근래 보통의 여자가 다만 사람의 품속이 윤택함을 보고 가볍게 백년의 약속을 맺는 것에 비하니 어찌 하늘과 땅의 거리가 아니겠는가.

간 선생 왈(曰): 외사씨(이 글의 원문인 『기인기사록』 저자 송순기)가 “사람의 윤택”만을 혼인의 조건으로 여기는 탄식을 한 것이 1920년대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 뒤 2015년, 작금의 이 시대는 어떠한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흉악한 세 날불한당’을 찾으라면, 이름하여 ‘돈’과 ‘명예’, ‘권력’이다. 그런데 이제는 호시탐탐 천하통일의 대업을 꿈꾸던 ‘돈’님이 삼두체제를 과감히 접수하고 황제로 등극하더니 내친김에 신격화까지 넘보는 세상이 되었다. 전 세계인들은 내남없이 뜻을 모아 “일체향전간!(一切向錢看), 모두 돈만 보세!”하고 자발적 복종의 맹서를 하거나 경제라는 필살기로 저 이를 모실 방법들 단련에 날이 가고 달이 간다.
루시앵 골드만 식으로 말하면 상동성(相同性, Homology)이다. 즉 ‘작품의 발생이 사회의 집단의식이나 개인의식, 사회경제적 관계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인 이 상동성은 바로 ‘돈’에 대한 쏠림현상 때문이다. 이 비열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 ‘김치녀’나 ‘된장녀’, ‘보슬아치’라는 요괴 같은 말들이 탄생하여 젊은이들의 순수한 정신조차 갉아먹고 있다.
하지만 두어 자락을 접고 본다 쳐도, 이 물신숭배(fetishism)를 정녕코 우리가 갈 길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이니, 저 바다 건너 프로이트(Sigmund Freud)라는 철학자는 물질을 ‘배설물’이라고까지 극단적으로 폄하하였다. 그래, 그는 “부자는 정서발달 부진과 배변 훈련 부족에 기인하여 현금과 재화의 축적에만 몰두하는 항문(肛門)유형의 인간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독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것은 저 이의 이야기일 뿐. 외려 오이 붇듯 달 붇듯, 학문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마저도 사이비 교수들이 넘쳐나고 종교마저도 이판중과 사판중이 물질이란 상투를 잡고 싸우고 목사들조차 세습을 하는 이해 못할 세상이 되어버렸다.
일지매 이야기를 번역하다가, 문득 ‘춘설(春雪) 속에 핀 한 가지 매화 일지매(一枝梅)처럼 일개 어물상을 택할 여인이 몇이나 될까?’하고 주억거려본다

   
 

 

<월매도(月梅圖)>
어몽룡(魚夢龍, 1566~1617)의 그림이다.

 

 

1)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천연동에 있는 동명여자중학교 자리에 있던 정자이다. 무악재를 오가는 관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연회장이었다.

2)자(字)는 자순(子順), 호(號)는 백호)ㆍ겸재(謙齋)ㆍ벽산(碧山). 많은 서정시와 풍자시를 남겼으며, 『추성지(愁城誌)』,『원생몽유록(生夢遊錄)』,『화사(花史)』 등의 소설과 문집으로 『백호집(白湖集)』이 전한다.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성운(成運)에게 배웠으며 문장과 시에 뛰어났다. 당파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 시문을 즐기며 지내다가 37세에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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