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악한 귀신을 쫓아버린 송상서, 충성을 잡고 절개를 세운 사람(下)

2015. 6. 22. 11:09간 선생의 야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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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6화(하)
간호윤  |  문학박사

승인 2015.06.21  23:33:56

(6화). 사악한 귀신을 쫓아버린 송상서, 충성을 잡고 절개를 세운 사람(下)

그 뒤에 공이 서울에 돌아가 과거에 응시할 때였다.
그날 밤에 한 꿈을 꾸었다. 자신이 벼[禾]를 베어 말[斗]로 헤아리는 것이 보였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공이 스스로 꿈을 해몽해 보니 ‘벼 화(禾)’ 변에 ‘말 두(斗)’는 즉 ‘과거 과(科)’ 자였다. 공은 ‘내가 과거에 합격할 것은 의심할 바 없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과연 이날 과거에 급제하여 즉시 한림학사(翰林學士;고려 시대에, 학사원ㆍ한림원에 속한 정사품 벼슬. 임금의 조서를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를 제수하였다.
이때는 공민왕(恭愍王:고려 31대 임금.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로 30대 충정왕(忠定王)의 폐위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혼인하였다)의 만년이었다. 왕이 친히 어전으로 불러서 어주(御酒)를 내리시며 말하였다.
“경의 선조 진천백(鎭川伯:진천 송씨의 시조 송인(宋仁)으로 고려 때 평장사로 상산(尙山:鎭川)伯(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진천을 본관으로 하였다)은 우리 인종(仁宗,1109~1146:고려 제17대 왕(재위 1122~1146).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겪었다)을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지. 경은 모름지기 짐을 도와 이 위축되어 기세를 펼치지 못하는 나라의 기운을 만회하라.”
이리하시고 총애가 날로 더하였다. 오래지않아 예부상서(禮部尙書:예부(禮部)의 으뜸 벼슬)를 발탁하여 제수하고 나라의 여러 일을 물었다. 공도 왕이 재주를 알아주고 대접해주는 은혜에 감동하여 충성을 다하여 보좌하였다. 공의 성품이 또한 강직하여 옳고 그름을 말하니 알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며 알고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왕이 항상 경탄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고려 말의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더불어 삼은(三隱)의 한 사람)도 늘 공의 재주를 칭찬하여 “왕을 보좌하는 재주가 있다”하며 또한 가까이 공경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에 조선 태조(太祖)의 위세와 권력이 날로 성함을 보고 하루는 왕에게 은밀히 아뢰었다.
“이(李) 시중(侍中: 시중은 문하시중 (門下侍中)으로 고려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품계는 종1품이다. 여기서 이시중은 태조 이성계이다)이 장차 국가에 이롭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그 권세를 깎아 후일 뜻밖의 변을 막으소서.”
이렇게 여러 번 이를 힘써 말하였다. 그러나 왕은 입으로는 “그래, 그래”하였으나 끝내 그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일찍이 공이 한 이 말이 많은 관리들 사이에 알려지자 정도전(鄭道傳,1337~1398: 호는 삼봉(三峯)으로 조선의 건국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 후일 이방원에 의해 죽임 당하였다)이 이를 핵주(劾奏:관리의 죄를 탄핵하여 임금이나 상관에게 아룀)하여 국가의 원훈(元勳:나라에 큰 공이 있어 임금이 사랑하고 믿어 가까이 하는 신하)을 망령되이 무고하였다고 왕께 청하여 중전(重典:엄격한 제도나 법률)에 처하고자 하였다. 왕이 그 사람됨을 본디 알기에 특별히 용서하여 공의벼슬을 낮추어 안성군수(安城郡守)라는 외직으로 나가게 하였다.
공이 명을 듣고 즉시 길을 떠나 이 고을에 부임한 후로 늘 나랏일이 날로 나빠짐을 통탄하며 잠깐이라도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목민(牧民)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가 또 중하고 컸다. 공은 백성 다스리기를 너그럽게 하며 사람 사랑하기를 덕(德)으로써 하고 예의를 숭상케 하며 농사일과 누에치는 일을 권장하였다.
이와 같이 한 지 몇 해에 고을이 크게 다스려져 곳곳에 아후래모(我侯來暮)의 노래를 부르며 소부두모(召父杜母)의 덕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때는 공양왕 말년이었다. 그 사이에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고 왕의 지위도 이미 끊어졌다. 공양왕이 왕의 자리를 양위하고 태조께서 이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등극하셨다. 공이 고을에서 이 소식을 듣고 송경(松京:고려 시대의 도읍지인 개성)을 바라보고 사흘을 통곡하였다. 그러고는 관리의 인(印)을 풀어놓고 관(冠)을 걸어 놓아 벼슬을 사퇴한 후에 진천(鎭川) 선영의 아래에 집을 얽어놓고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거문고와 글로 스스로를 즐기며 오직 남들이 알까를 염려하였다. 태조는 원래 공의 재덕을 흠모하여 평일에도 항상 높이 받들어 우러렀기에 공이 한번 안성에 낙향한 후로 늘 유념해 두었으나 다시 천거하여 발탁하기에는 겨를이 없었다.
마침내 왕 위에 오르신 후에 사방으로 물색하여 공이 진천에 은거함을 들으시고 현훈사마(玄纁駟馬)로 초빙하여 벼슬길에 나오기를 촉구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그 후에 또 삼징칠벽(三徵七辟)을 하였으나 끝내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고 사자(使者)에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에 욕망이 없고 산수에 즐거움이 있으니 이로써 일생을 마칠 따름이오. 돌아가 주상께 아뢰시오. 만일 나를 억지로 명령을 따르게 한다면 차라리 이 몸을 황해(黃海)에 던져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결코 몸을 굽혀 종남(終南)의 길을 밟지는 않을 것이라고.”
사자가 돌아가 이 말을 복명(復命:명령 받은 일을 집행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하는 일)하니 임금이 억지로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탄식하기를 그치지 못하였다.
공이 만년에 이르러 가세가 자연 가난해져 계옥(桂玉)의 탄식을 면치 못하였다. 하루는 공이 여러 비복(婢僕) 등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들이 상전 때문에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내 마음이 실로 슬프구나. 내가 이제 너희들을 속량(贖良:종을 풀어 주어서 양민(良民)이 되게 함)하니 행여 상전을 마음 쓰지 말고 각기 근면히 일을 하여 생활을 안전케 하여라.”
노복들이 머리를 두드리고 슬피 울며 대답하였다.
“신하가 그 임금을 위하는 것과 종이 그 주인을 위하는 것은 그 뜻은 하나입니다. 대감은 옛 임금을 위하여 그 절개를 훼손치 않으셨거든 소인 등이 어찌 상전이 가난하다고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종신토록 이 집에 머무르며 감히 다른 뜻을 두지 못할 것입니다.”
오호라! 공의 밝고 밝은 큰 뜻은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이제(夷齊:충신의 상징인 백이와 숙제)에게 부끄럽지 않으니 그 굳은 뜻과 당당한 절개는 실로 해와 달과 함께 그 밝음을 다투고 산의 묏부리와 그 높이를 다툴 것이로다. 그 노비에 있어서도 또한 각기 의를 지켜 옛 주인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 어찌 공의 평소의 큰 의리와 매운 절개가 사람을 감화시켜 천한 아랫사람에게까지 이른 것이 아니리오.
간 선생 曰: 송인의 이야기는 ‘충성’과 ‘절개’라는 두 글자로 끝났다. 이 글을 번역하며 <악의 연대기>, <차이나타운>, <간신>이라는 국산영화를 보았다. ‘충성’과 ‘절개’와는 상대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어느 누가 미치지 않고서 이 난세를 살 수 있겠습니까?”
경회루에서 함께 처용무를 추던 중 연산군(김강우)은 임숭재(주지훈)에게 “너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간신 임숭재는 이렇게 답하였다.
‘난세(亂世)!’ 그렇다. 내가 본 <악의 연대기>, <차이나타운>, <간신>은 분명 이 시대가 난세임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그들은 하나같이 악머구리처럼 살아간다. 행복, 희망, 도덕, 정의를 저당 잡힌 이들의 삶이다. 하기야 한때 언어성립조차 안 되는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책이 낙양지가를 높이고 공전의 히트를 친 적도 있는 이 대한민국이다 보니.---.
따지고 보면 난세 아닌 세상은 없다. ‘충성’과 ‘절개’라는 날선 말도 난세이기에 나왔다. 세상은 늘 ‘가진 자’가 가진다. 범인(凡人)인 일반 백성으로서 ‘가진 자’가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미칠 수도 없고. ---. 이 난세! 여러분은 어떻게들 살아내시는 지오?

   
 
<간신>의 한 장면
감독: 민규동
출연: 주지훈 (임숭재 역), 김강우 (이융 역), 천호진 (임사홍 역), 임지연 (단희 역)

 

1)‘우리 원님이여! 해질녘 태평가를 부릅니다’라는 선정(善政)을 찬미하는 노래.

2)중국 전한(前漢) 때 남양태수(南陽太守)를 지낸 소신신(召信臣)과 후한(後漢) 때 남양태수를 지낸 두시(杜詩)가 각각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며 ‘소부(召父)’와 ‘두모(杜母)’라고 칭송하였다.

3)‘현훈’은 검붉은 색, 또는 검붉은 비단으로 장사지낼 때 산신(山神)에게 바치거나 산신제를 마치고는 이 비단을 거두어다가 광중(壙中)에 묻는다. 또 사람을 초빙할 때 예물로도 쓰인다. ‘사마’는 한 채의 수레를 메고 끄는 네 필의 말로 결국예의를 갖추어 인재를 초빙한다는 말이다.

4)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선비를 임금이 부르던 말이다. 진(晉)나라 왕부(王裒)는 자기 부친이 비명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애통하게 여겨 은거한 채 학생을 가르치면서 조정에서 세 차례 소명을 내렸고[三徵] 주군(州郡)에서 일곱 차례 불렀으나[七辟]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진서(晉書』 권88 ‘왕부열전(王裒列傳)’에 보인다.

5)종남산(終南山)은 장안(長安)의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서울의 남산의 별칭이다. 장안(長安)의 북쪽에 있는 강 이름이 위수(渭水)이기에 우리나라에서 서울의 한강의 별칭으로 흔히 써 왔다. 여기서는 결코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6)식량 구하기가 계수나무(桂樹--) 구하듯이 어렵고, 땔감을 구하기가 옥을 구하기만큼이나 어렵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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