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겉으론 어리석으나 안으론 지혜로움을 누가 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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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5화(하)
간호윤  |  문학박사
승인 2015.05.31  20:27:53

5화. 겉으론 어리석으나 안으론 지혜로움을 누가 알리오,
본 듯이 앞일을 잘 헤아리는 유성룡의 치숙(痴叔)(하)

서애는 그 중이 하룻밤 머물러 가기를 간절히 청하였지만 치숙의 가르침대로 하였다. 중을 대하여 조심스럽고 중후한 태도로 말했다.
“대사의 천 리 고생한 발걸음이 이 누추한 집을 찾아 주셨음은 실로 감사할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침 집 안에 뜻 밖에 불행한 일이 있어 잠자리를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결코 처음 뵙는 분이라 거절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사정상 어찌하기 어려워 그러한 것이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마을 뒤에 한 부처님을 모신 암자가 있으니 이곳에 가셔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아침에 내려오시면 내가 마땅히 나가 맞이하겠습니다.”
그러한데도 그 중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간청하였으나 서애는 내내 굳게 거절하였다.
중이 이에 부득이하여 동자를 따라 마을 뒤, 한 조그만 암자로 갔다.
서애가 중을 보낸 뒤에 마음속으로 치숙의 그 지혜로움이 귀신같음에 다시 놀라 감탄하며 “우리 아저씨께서는 이인이 아닌가?”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서애는 이 일이 장차 어떠한 결과는 불러올지 알지 못하여 심히 번뇌함을 감당치 못하였다. 서애는 이날 밤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앉아서 아침을 맞으며 치숙의 동정만 기다릴 뿐이었다.
이때에 중이 암자 문에 이르렀다.
치숙은 미리 계집종을 사당(舍堂:몸을 파는 여인) 모양으로 분단장을 해놓고 자기는 거사(居士: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꾸며, 망건을 쓰고 베잠방이 차림으로 문간에 나가 합장하고 맞아 절하며 말했다.
“어느 곳에서 오시는 존사(尊師)이신데 이와 같이 누추한 곳에 이르셨는지요.”
그러고는 중을 인도하여 마루에 오르니, 중도 또한 합장하고 예를 표한 후에 ‘산천을 유람하든 발걸음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하룻밤을 머물기를 원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치숙이 이를 허락하고 상좌에 이끌어 앉히고 사당을 시켜 저녁밥을 내오기 전에 우선 술상을 잘 차려서 극진히 대접하였다. 중은 그 술맛이 달고 향기로우며 맑고 차서 칭찬하며 연하여 여러 잔을 마셨다. 저녁밥을 내오니 산효야속(山肴野蔌:산에서 나는 나물과 들에서 나는 나물을 조리한 음식)이 매우 정갈하였다.
마침내 중이 매우 취하였고 또 배가 불러 침상에 정신이 아뜩하여 쓰러졌다. 그렇게 중이 얼마나 혼곤히 잠에 빠졌을까. 자정이 되었을 무렵 중은 홀연히 가슴이 답답하여 눈을 떴다. 그랬더니 그 거사(즉, 치숙)가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손에 날카로운 칼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는 크게 꾸짖었다.
“이런 천한 왜국 중놈이!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드느냐. 네가 바다를 건너온 날을 내가 이미 알고 간교한 계획도 내가 또한 간파하였다. 네가 감히 나를 속이려 드느냐 네가 만일 나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으면 혹 용서할 도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 목 줄기는 당장 이 칼 아래 끊어지리라.”
중이 애걸복걸하였다.
“소승이 죽을 때가 이미 박두하였나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감히 터럭만큼이라도 속이겠습니까. 소승은 과연 일본인입니다. 지금 관백(關白:일본에서 왕을 내세워 실질적인 정권을 잡았던 막부의 우두머리)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귀국을 침략하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귀국 조정대신 가운데 유성룡 대감과 상국(國相) 이항복(李恒福,1556~1618) 대감을 꺼려 소승을 시켜 먼저 건너가서 이 두 재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열흘 전에 경성에 왔는데, 마침 이 상국은 호남지방에 여행하여 집에 없고 또 존가(尊家:상대방을 높이어 그의 집을 이르는 말)의 유성룡 대감은 안동 고향집에 내려가셨다 하기에 즉시 길을 떠나 이곳에 온 것입니다. 소승이 상국 댁에서 오늘 하룻밤 묵기를 청한 것은 밤에 장차 상국의 목숨을 끊고자하였는데, 천만 뜻 밖에도 천사(天師:훌륭한 도사)의 귀신같은 눈 아래 정체가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한 가닥 남은 목숨을 보전해주시옵소서.”
치숙이 말하였다.
“우리 조선이 너희 왜국에게 침략 받을 것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하늘의 운수이다. 나는 이일을 십년 전부터 예상하였다. 하지만 운수는 사람 힘으로 어찌하기 어려운 것이라. 그렇다하여도 이 안동 땅만은 내가 있는 이상에 너희 왜국 군사가 단 한 명도 들어오지 못한다. 만일 이 곳에 들어서는 날에는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네까짓 녀석의 누의(螻蟻:땅강아지와 개미라는 뜻으로, 작은 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같은 목숨을 끊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이제 네 목숨을 살려줄 터이니, 너는 귀국하거든 너희나라 집사(執事:그 집 일을 맡아보는 사람. 여기서는 풍신수길)에게 이 말을 꼭 전하여 이 안동 땅은 범치 말도록 전하라.”
중이 백배 사례하고 포두서찬(抱頭鼠竄:머리를 감싸 안고 쥐구멍으로 숨는다는 뜻)하여 돌아갔다.
다음 해 임진(壬辰)의 난리가 일어났다. 왜군이 건너와 우리 조선 땅 각 고을을 침략하였지만, 군중에 조서를 내려 감히 안동 땅만은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안동 지역은 이 치숙의 지혜에 힘입어 임란동안에 병화가 비켜갔다고 하더라.

간 선생 왈(曰):‘지혜 이야기다’. ‘지혜’라는 두 글자만 만나면 서너 호흡은 쉰 다음 말을 겨우 잇는다. ‘서리 맞은 호박잎’같이 맥을 못 춰서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 치숙처럼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면 짜장 주눅이 든다. 더욱이 요즈음엔 한낱 ‘재주’를 ‘지혜’와 동일하다고 우기는 재주가 웃자란 재주아치들이 넘쳐난다. ‘지혜’는 모르겠거니와 저 ‘재주’를 들이댄다면 세상일에 손방이요, 청맹과니요, 글방물림인 나로서는 언감생심이다. 이렁성저렁성 그저 글이나 쓰고 학생들이나 가르치는 안방샌님인 나이기에 방안풍수짓은 말아야겠다. 그래, ‘재주’니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이만 략(略)하니 영민(英敏)한 독자들께서 각자 ‘재주’니 ‘지혜’를 생각해 보시기를…혜량(惠諒)하옵시기를.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로 알려진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河回)마을의 옥연정사(玉淵精舍).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치숙은 야담집 이외에는 문헌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임란 중, 안동지방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그러니 이 글에서처럼 안동지방 전체에 왜군이 침략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동 하회마을 만큼은 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