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겉으론 어리석으나 안으론 지혜로움을 누가 알리오,

2015. 5. 26. 17:16간 선생의 야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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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5화(상) - 경인예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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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5화(상)
간호윤  |  문학박사

승인 2015.05.24  22:33:40

5화. 겉으론 어리석으나 안으론 지혜로움을 누가 알리오, 
            본 듯이 앞일을 잘 헤아리는 유성룡의 치숙(痴叔)(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일찍이 안동(安東)에 살 때였다. 집에 한 아저씨가 있었는데 사람됨이 꾸물꾸물하니 어리석었다. 이른바 콩인지 보리인지 분별치 못하는 숙맥불변(菽麥不辨)이었다. 그래, 집안에서 부르기를 치숙(痴叔:어리석은 아저씨)이라 하였다.
서애가 서울에 있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집에 돌아와 여러 날을 한가하게 보내는 어느 날이었다. 치숙이 서애를 위하여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자네의 집이 늘 시끌시끌하여 말할 기회가 없군. 만일 손님이 없어 조용하니 일이 부산치 않을 때가 있거든 나를 청하게나. 내가 몹시 중요하고 간절한 이야기가 있다네.”
하루는 마침 손님이 없기에 서애가 곧 사람을 시켜 치숙을 청하였다. 치숙이 다 부서진 갓과 해진 옷을 입고 기쁜 낯으로 오니 서애가 몸을 굽히며 말하였다.
“아저씨께서는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 하는지요.”
치숙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자네와 한 판 내기바둑을 두고자 하는데 ….”
서애가 말하였다.
“아저씨께서 평소에 바둑 두신 일이 없거늘, 오늘 갑자기 대국을 청하시니 소질(小姪:조카가 자기를 낮추어 일컫는 칭호)의 적수가 안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며 주저주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개 서애의 기법(碁法:바둑을 두는 수법)은 당세에 국수(局手)라고 칭할 만치 수법이 높았던 터였다.
치숙이 말했다.
“조카와 아저씨가 바둑을 대국함에 어찌 높고 낮음을 따지겠는가. 승부야 어떻든지 한 번 대국함이 좋을 듯하니 자네는 사양치 마시게.”
서애는 하도 치숙이 강권하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대국을 하였다. 서애는 치숙보고 먼저 두라고 하였다.
치숙이 두말없이 바둑 첫 바둑알을 놓았다. 아,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단 한 수를 놓았을 뿐인데 풍운의 조화와 수많은 군사와 말이 치닫는 기세였다. 반 국을 두지 못하여 서애의 판국 형세는 형편없이 흐트러져 앞뒤를 서로 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서애는 동패서상(東敗西喪:동쪽에서 패하고 서쪽에서 죽는다는 뜻으로 가는 곳마다 실패하거나 하는 일마다 망하는 것을 말함)하여 감히 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애는 크게 놀랐다. 그동안 치숙은 그 뛰어난 재주를 지닌 보통 사람이 아니면서도 일부러 자기의 재간을 도회(韜晦:자기의 재간을 감추어 남들의 이목을 속이는 것을 말한다. '도'의 원뜻은 활을 넣어 두는 주머니로 들어간다이고 '회'는 암흑 또는 은밀히 감추다의 뜻)한 것을 그제야 알았다. 서애는 치숙 앞에 두려워 엎드려서는 말하였다.
“아저씨! 어찌 이토록 저희를 속이셨는지요. 유부유자(猶父猶子:아버지 같고 자식 같다는 뜻으로, 삼촌과 조카 사이를 일컫는 말)의 친함이 있거늘. 반생을 함께 살면서 이와 같이 속이셨으니 제 마음이 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소질이 원컨대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모든 일의 잘잘못을 깨닫게 지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치숙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말하였다.
“내가 어찌 자네를 속일 까닭이 있겠는가. 내기 바둑은 곧 우연한 일이라. 자네는 일찍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로 세상에 나가 임금을 섬김에 지위가 높고 총애가 두텁잖나. 나와 같은 우매하고 무지한 자가 어찌 가르칠 일이 있겠는가.”
서애는 더욱 황공무지(惶恐無地:당황스럽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름)하였다. 그동안 치숙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마음도 편치 않고 바둑의 기세에 기운을 잃어 감히 바라보지를 못하였다. 치숙이 서애에게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 말하였다.
“내가 비록 용렬하고 어리석어 선견지명은 없으나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네. 며칠 후에 반드시 한 중이 찾아 와 절한 후에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할 것일세. 이를 결코 허락하지 말게나. 비록 천만번 애걸하더라도 끝내 이를 거절하고 마을 뒤에 부처님을 뫼시는 암자가 있으니 그곳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 이 말을 꼭 기억하여 어기지 말게나.”
서애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하고 정말 그러한지 치숙의 말을 증험하려하였다. 과연 며칠 후에 한 중이 와 통자(通刺:명함을 내밀고 면회를 청함)하고는 서애 뵙기를 청하였다. 서애가 사람을 시켜 들어오게 하였다. 그 중은 키가 크고 몸이 장대하였는데 나이는 서른 일고여덟 가량 되어보였다.
서애가, “그래. 어디 사시는 뉘시오.”라고 물으니 중이 대답하였다.
“저는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에 아무갭니다. 영남(嶺南) 산천을 유람하기 위하여 명산고찰을 두루 답사하고는 이제 장차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듣기에 대감의 맑으신 덕과 훌륭하신 인망은 당세의 으뜸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식형(識荊:평소 흠모하던 사람을 처음 만나 보는 것. 당나라 시인 이백이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서 “살아생전에 높은 벼슬을 하는 것보다 한형주 같은 문장가와 사귀고 싶다.”라고 한 데서 온 말. ‘식한(識韓)’이라고도 한다)의 원을 이루고자 감히 당돌함을 무릅쓰고 뵈오니 내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날이 이미 늦었으니 원컨대 귀댁 한 귀퉁이라도 자리를 빌려 묵고 가기를 원합니다.”
서애는 속으로 놀라워하며 ‘과연 치숙의 말이 헛말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kbs <징비록>에서 유성룡으로 분(扮)한 김상중
요즈음 T.V에서 <징비록>이 뜬다. <징비록>은 이 유성룡이 임진왜란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유성룡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임란 기간에 영의정으로 온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였다. 세계해전사의 걸출한 영웅 이순신은 이 유성룡이 발굴한 인재다.
유성룡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경상북도 의성 출생. 임란 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김성일(金誠一)과 이황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임란 전, 김성일은 동인으로 일본에 부사로 다녀와 토요토미를 평가 절하하여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했고, 반면 서인인 정사 황윤길은 침략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유성룡은 동인의 분파인 남인이었다.
임란으로부터 423년 뒤, 이 땅에서 영의정(국무총리) 문제로 시끄럽다. 백성의 한사람으로 모쪼록 유성룡 정도의 영의정(국무총리)감을 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허나, 이 땅의 정치이족수(政治二足獸)들로서는 난망(難望)한 일인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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