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질녘 궁벽한 목숨을 구하려는 나그네, 천한 집안 여자를 택하여 몸을 의탁하다(상)

2015. 5. 11. 11:26간 선생의 야담 카페

문학과책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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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4화(상)
간호윤  |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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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1  10: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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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질녘 궁벽한 목숨을 구하려는 나그네, 천한 집안 여자를 택하여 몸을 의탁하다(상)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가 크게 일어났다. 일시에 청류(淸流:절의를 지키는 깨끗한 사람)들이 살육되어 거의 태반이 죽었다. 한 이 씨 성을 자진 자가 있었는데 교리(校理: 종5품(從五品) 벼슬)로 지내다 목숨을 건지려고 달아났다. 보성(寶城:전라남도 보성군의 군청 소재지)을 지나다가 한 곳에 이르러 목이 몹시 말랐다. 마침 시냇가에 한 처녀가 물을 긷기에 이 교리가 황급한 걸음으로 달려가서 마실 물을 구하였다. 그러자 그 처녀가 바가지에다 물을 뜬 후에 냇가의 버드나무 잎을 훑어서 물에 띄워 주었다.
그래 이 교리가 속으로 괴이하고 의아스러워 물었다.
“지나는 길손이 갈증이 심하여 물을 구하거늘 무슨 까닭으로 물에 버드나무 잎을 띄어서 주는 게요.”
그 처녀가 대답하였다.
“나그네께서 몹시 갈증나하시는 것을 보니, 만일 찬물을 급히 마시면 반드시 뜻밖의 병이 나실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래, 나뭇잎을 물에 띄워 천천히 마시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이 교리가 이 말을 듣고 자못 놀라며 그 명민한 지혜에 끌렸다. 이에 뉘 집의 여식이냐고 물으니 개울 건너 유기장(柳器匠:고리장이. 고리버들로 고리짝이나 키 따위를 만들어 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의 딸이라고 대답하였다.
교리가 마침내 그 여인을 따라 유기장의 집에 갔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유기장에게 데릴사위로 삼아달라 하였다. 유기장이 보니 옷매무새는 허름하나 양반이 분명하고 또 훤칠한 키에 다부진 체격하며 얼굴까지도 끼끗하고 미추룸하였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장부로서 마음도 너볏한 것이 인금도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마침 딸도 혼기가 찼고 또 눈치를 보니 좋아하는 것같아 유기 만드는 일을 하려느냐 다짐을 받고는 허락하였다.
그 날부터 이 교리는 이 유기장의 집에 일신을 의탁하게 되었다. 교리는 본래 서울 재상가의 아들이었다. 귀하게 자라며 오직 학업을 일삼았을 뿐이니, 유기 만드는 일을 잘할 리가 없었다. 날마다 일은 하지 않고 소대성이처럼 낮잠으로 날마다 일과를 삼으니 유기장이 참다참다 못하여 성내어 꾸짖었다.
“내가 데릴사위를 얻은 본래의 뜻은 유기 만드는 일 도와주기를 바라서였는데, 이런 제길헐. 소위 데릴사위로 갓 들어온 작자가. 응, 그래, 다만 조석으로 밥만 축내고 오직 낮잠으로 소일을 하니. 이건 사위가 아니라, 일 개 반낭(飯囊:밥주머니라는 뜻으로, 무능하고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사람을 조롱하는 말)이로군.”
그러고는 딸에게 다짐장을 놓았다.
“너, 네 서방인지 남방인지에게 오늘부터는 아침저녁 밥을 반만 주어라. 알았니.”
“예.”
딸은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대답은 했으나 이를 심히 민망히여겼다. 늘 부모의 눈을 피하여 몰래 음식을 이 교리에게 주었다.
그러며 딸은 이 교리에게 늘 말했다.
“당신의 상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은 한 때에 액을 만나 곤궁한 처지로 방황을 하나 훗날에는 반드시 복록이 무궁할 거에요. 힘드시더라도 어려운 괴로움을 견디시고 후일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세요.”
이러하니 부부 사이에 정이 아주 돈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낸 지 몇년 후에 중종(中宗)으로 임금이 바뀌었다. 이에 연산군 조정에서 죄를 얻어 폐한 선비들 모두를 사면하고 맡았던 관직을 되돌려주라는 큰 조서를 천하에 반포하였다. 조정에서는 교리의 본가와 오랜 벗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교리의 소재를 탐문하였다. 이 교리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마을과 마을 사이로 퍼져 마침내 이 교리도 자기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교리는 심히 기뻐하여 장차 출각(出脚:벼슬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할 방도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장 서울에 입고 갈 옷도 노자도 없었다.
마침 초하루라 장인이 장차 유기를 관부에 납품하려 채비를 차렸다. 교리가 이에 그 유기장에게 말하였다.
“여보, 장인. 이번에는 내가 관부에 납품하러 가겠네.”
그러자 유기장이 꾸짖어 말하였다.
“뭐라고. 원 말같은 소릴 해야지. 그래, 자네같이 날마다 잠만 자고 동과 서도 알지 못하는 자가, 뭐 유기를 관부에 납품한다고. 또 내가 납품해도 관가에 들어가면 늘 유기를 보고서는 물리는 일이 많거늘. 자네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이 물건들을 무사하게 납품하겠는가.”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 딸이 말하였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은 참으로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것도 쉽지 않고 다른 사람을 알기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也: 이 말은 『사기(史記)』「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에 나오는 말로 후영(侯嬴)이 신릉군에게 한 말이다)’라고 하였어요. 제 지아비가 비록 불민하다 할지라도 일을 행하는 것을 본 연후에 가타부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찌 미리 그 불가함을 책망하시는지요.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예, 아버지.”
유기장이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하여 허락하였다.
이 교리가 직접 유기를 지고 관가에 도착하였다. 관문을 성큼성큼 들어가 곧장 마당 한가운데 서서는 큰 소리로 본관사또를 불렀다.
“사또! 아무 곳에 사는 유기장수가 유기를 납품하러 왔노라.”
본관사또는 곧 이 교리와 평소 절친한 사람이었다. 사또가 유기장이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혼쭐을 내려다 가만히 얼굴을 살펴보니 아, 이 교리가 아닌가. 크게 놀라 버선발로 뛰어 내려 와 손을 잡고 탄식하였다.
“아, 이 사람아. 그대가 도망한 후 종적을 알 수 없어 애태웠는데. 어느 곳에 감추었다가 오늘에야 어찌 이러한 행색으로 온 것인가? 지금 조정에서 그대를 찾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속히 상경하게.”
그러고는 술과 음식을 내와 잘 대접하고 또 의관을 가져와 옷을 바꿔 입게 하였다. 이 교리가 저간의 사정을 말했다.
“죄를 진 사람이 유기장의 집을 도둑질하였네. 그래, 오늘까지 죽지 않고 모질게 살아 목숨을 이어왔지. 어찌 태양을 다시 볼 줄 알았겠는가.”
본관이 수레와 말을 준비하여 상경하기를 재촉하니 이 교리가 말했다.
“유기장이 삼 년이나 나를 거두어 주었네. 이 정의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고 또 그 딸과 부부로 지냈네. 내가 마땅히 유기장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수일 후에 출발하려 하네. 자네는 내일 내가 사는 곳을 방문해주게.”
그러고는 다시 올 때의 옷으로 갈아입고 유기장의 집으로 돌아와 유기장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유기를 무사히 납품하였소.”
유기장이 멋쩍게 말하였다.
“허, 참. 거 기이한 일이네. 옛글에 말하기를 ‘올빼미도 천 년을 늙으면 능히 꿩을 잡는다(鴟老千年 能搏一雉)’하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로군. 어찌됐거나, 오늘 저녁은 마땅히 큰 사발에 밥을 주거라.”
그 다음날 날이 밝았다.

 

   
 
<이장곤의 필적>이 글에서 이 교리는 이장곤(李長坤,1474∼1519)이다. 이장곤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으로 신지(愼之)의 증손이다.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 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 때 연산군이 무예와 용맹이 있는 그가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해 서울에 잡아 올려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채고 함흥으로 달아나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발을 붙이고 숨어 살았다. 이 이야기는 이 때 일이다. 다만 함흥이 이 이야기에선 보성으로 바뀌었다.
이 장곤은 후일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뒤, 동부승지, 평안도병마절도사,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기묘사화에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그 뒤 경기도 여강(驪江:지금의 여주)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사후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금헌집≫이 있으며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대하여: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이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 보냈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정·엄 두 숙의를 궁중에서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 보냈다가 사사하였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에게도 정·엄 두 숙의와 한 패라 하여 병상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인수대비는 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할 때 찬성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등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홍귀달(洪貴達)·주계군(朱溪君) 등 수십 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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