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열다섯의 신부와 쉰의 신랑, 장수부귀하고 또 사내아이를 많이 낳았네.(상)

2015. 9. 10. 14:00간 선생의 야담 카페

13화. 열다섯의 신부와 쉰의 신랑, 장수부귀하고 또 사내아이를 많이 낳았네.(상)

해풍군(海豊君) 정효준(鄭孝俊,1577~1665)은 나이 마흔 셋에 빈궁하여 입을 옷조차 없었다. 일찍이 세 차례나 아내를 잃고 다만 딸만 셋 있을 뿐이었다. 영양위(寧陽尉)1)의 증손으로 본가의 제사를 받는 외에 또 노릉(魯陵)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3), 노릉왕후(魯陵王后) 송씨(宋氏)4) 등 삼위(三位)의 신주를 받들었지만 향불조차 준비할 방도가 없었다. 늘 근심하고 고뇌하였는데 집안에 있으면 다만 근심스럽고 심란하여, 매일 이웃에 사는 병사(兵使) 이진경(李進慶)5)집에 가 박혁(博奕:장기와 바둑)하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이 병사는 판서 이준민(李俊民,1524~1590)의 손자였다. 하루는 해풍군이 갑자기 이 병사에게 말했다.
“내 속에 들은 간절한 말이 있는데 자네가 내 마음을 가련히 여겨 이를 들어주겠나?”
병사가 말하였다.
“자네와 나 사이야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사귀어 그 정의가 돈독함이 실로 타인에 비할 바가 아니네. 어찌 자네의 간절하고 애틋한 사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숨기지 말고 곧 사실대로 말하게나.”
해풍군은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오므렸다 한참을 하더니 말했다.
“우리 집안은 비단 여러 대를 받들어 제사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지존(至尊:여기서는 단종을 말한다)의 신위도 받들고 있는 처지일세. 그런데 나는 지금 홀아비로 아내가 없으니 기필코 제사가 끊어짐을 면치 못할 것일세. 일신의 고독함은 오히려 말할 필요도 없으나 죽은 뒤에 일을 생각해 보면 실로 딱한 처지가 박절하니 어찌 가련치 아니한가. 만일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감히 입을 열지 못할 걸세. 자네는 모름지기 나의 정세를 가련하게 생각하여 나를 사위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병사가 이에 발칵 성을 내어 얼굴빛을 변하며 말했다.
“자네 말이 진담인가 농담인가? 내 딸아이는 이제 열다섯일세. 어떻게 자네와 같은 나이 쉰에 가까운 자에게 배필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이 망령되이. 이후로는 결코 이러한 말을 입 밖에 내지도 말게.”
해풍군은 온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고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다시는 그 병사의 집에 가 감히 함께 노닐지 못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이 병사가 베개를 베고 잠들었는데, 갑자기 문가 뜰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멀리서 경필(警蹕:임금이 거동할 때 경호하기 위하여 통행을 금한 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관복을 입은 자가 문을 밀치고 들어와 병사를 일으켰다.
“지금 대가(大駕:임금이 타는 수레)가 그대의 집에 행차하셨으니 곧 문을 열고 임금을 맞으라.”
병사가 크게 몰라 황망히 의관을 바로잡고 뜰에 내려가 엎드렸다.
한 소년 왕이 금으로 된 면류관을 쓰고 대청 위로 임하시어 병사에게 명하여 당하에 엎드리게 하고 가르침을 내렸다.
“정 아무개가 그대와 더불어 결친(親結:친분을 맺음, 혹은 사돈 관계를 맺는 일)하고 싶은데, 그대가 이를 거절하였다하니, 너의 뜻은 어떠한 이유때문인가?”
병사가 땅에 엎드려 대답하였다.
“성교(聖敎)의 가르침을 내리심에 어찌 감히 뜻을 거역할 이치가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신의 딸은 나이 겨우 계년(笄年:여자가 비녀를 꽂을 수 있는 나이. 곧 15세 정도의 소녀)이옵니다. 정효준은 나이 쉰에 가까우니 신의 딸보다 서른 살이나 많사옵니다. 나이가 서로 합당치 못하오니 어찌 배필이 되겠사옵니까?”
임금이 가르쳐 말씀하셨다.
“나이가 많고 적음은 족히 비교할 바가 아니니 사흘 이내에 곧 폐백을 드리고 혼인을 하여라. 절대 짐의 명령을 어기지 말아야한다.”
그러고 환궁하시는 게 아닌가.
병사가 홀연히 놀라 깨니, 잠자리의 한 꿈이었다. 속으로 심히 놀랍고 괴이하여 즉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니 그의 아내 또한 불을 밝히고 앉아 있거늘 병사가 꿈속의 일을 고하니 부인이 말하였다.
“첩의 꿈 이야기도 또한 그러하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병사가 말하였다.
“이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오.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니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부인이 말하였다.
“꿈속의 일은 허경(虛境)에 불과하니 어찌 이를 믿고 가벼이 일을 처리하려하십니까?”
그러하여 꿈속 혼인에 대한 의논을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하였다.

   
 
<해풍군 정효준의 묘>
정효준의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효우(孝于), 호는 낙만(樂晩), 시호는 제순(齊順)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는데 특히 변려문(騈儷文)을 잘 썼다. 아버지는 돈령부판관을 지낸 정흠(鄭欽)이다.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613년(광해군 5) 때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하자, 어몽렴(魚夢濂)·정택뢰(鄭澤雷) 등과 함께 이이첨의 처형을 건의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으며, 왕실의 제사용 가축을 기르는 관청인 전생서의 봉사(奉事)가 되고 뒤에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등을 거쳐 1652년(효종 3) 돈령부도정에 임명되었다. 1656년 해풍군(海豊君)에 봉해졌으며 동지돈령부사가 되었다. 그 뒤 아들 다섯이 모두 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되었으므로 1663년 판돈령부사로 승진되었다.

1)정종(鄭悰, ? ~ 1461)으로 1450년(세종 32)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봉하여지고, 단종 초기에 형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55년(단종 3)에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의 사건에 관련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이후, 1461년 승려 성탄(性坦)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능지처참되었다. 그와 함께 유배되어 관비(官婢)가 된 경혜공주가 적소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친히 양육하고 세조가 미수(眉壽)라 이름을 지었다. 영조 때 신원(伸寃)되었고, 단종묘와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이다.

2)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인 단종(端宗)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되었다가 결국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3)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다.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비(1418~1441)이다.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총애를 받았다. 1441년 원손(元孫:뒤의 단종)을 출생하고 3일 뒤에 죽었다. 같은 해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단종의 비로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의 딸이다.

5)본관은 여주이며 이무인(李武仁)의 아들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