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다가

2022. 2. 22. 14:02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다가

‘너는 너를 아니?’

“대개 천하에는 어질지 못한 사람이 많다(盖天下不賢者多矣)”. 김소행이라는 서얼이 지은 『삼한습유』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김소행은 서얼이었다. 김소행은 소설을 짓는 이유를 저렇게 말했다. 조선 말, 저 시절 넌덜머리 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인의 비명이다. 

 

저 김소행의 비명을 이 시절에 듣는 듯하다. 21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귀가 시끄럽고 눈이 어지럽다. 익명(匿名)으로 써댄 댓글들은 단순하고 무지하다. 아군과 적, 가난과 부자, 악인과 선인, … 딱 ‘좋다’와 ‘싫다’ 둘 밖에 없다. 언필칭 난장판도 모자라 각다귀판에 아귀다툼도 더 얹어야 한다. 불나방 같은 욕설쯤은 가볍다. 난무하는 저주성 언어는 그야말로 훈민정음이 통곡할 판이다.

 

저 이의 말처럼 이 땅에 특히 ‘어질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데서 답을 찾아야 할까? 아니면 어지러운 세상에는 입과 혀로 천하를 다스리려는 풍조가 나타난다는 ‘말세이구설치천하(末世以口舌治天下)’에서 답을 찾아야 할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언론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 이들을 부추긴다. GDP 3만 달러, OECD 경제 10위인 나라의 자칭 보수 언론이 검찰, 가진 자, 권력자와 부패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써대는 기사에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보수(保守)’는 시시각각 변하는 이 세상에서 이 나라를 보존하여 잘 지켜냄이다. ‘언론(言論)’은 ‘이치를 헤아려 사리를 밝히는 말과 글’이다. 그러니 ‘보수 언론’이란 이 나라를 보존하여 잘 지키라는 언론이지, 제 사주와 제 기득권을 지키라는 언론이 아니다. 

 

이런 그릇되고 간사하여 올바르지 않은 말과 글을 ‘사설(邪說)’, 혹은 ‘기레기’라 한다. ‘언론’이 아니기에 물론 ‘언론’이란 말을 붙일 수 없다. 그냥, ‘조‧중‧동과 기타 그들.’

 

묻고 싶다. 대한민국 ‘보수 언론’이란 말을 외람되이 참칭(僭稱)한  ‘사설(邪說)’, 혹은 ‘기레기’들, ‘이 나라를 어질지 못한 사람이 많고 말세이구설치천하’로 만드는 숙주(宿主)가 바로 당신들 아닌가?

 

하나 더 묻고 싶다. ‘너는 너를 아니?’

(이 물음은 내가 나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질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삼한습유』:1814년(순조 14) 김소행(金紹行)이 지은 한문 고소설로 표제는 ‘삼한습유’이나 속제목은 ‘의열녀전(義烈女傳)’·‘향랑전(香娘傳)’이다. 내용은 조선 숙종조에 경상북도 선산지방에서 발생한 향랑이라는 여성의 원사사건(寃死事件)을 소설화한 것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감독: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출연:말론 브란도, 마리아 슈나이더/개봉:1972 이탈리아, 프랑스

 

"난 저 사람을 몰라. 저 사람이 날 쫓아왔어. 날 겁탈하려고 했어. 난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누군지 몰라…"                                              

1972년, 파리에 사는 중년의 미국인 폴을 권총으로 죽인 20살 프랑스 여인 잔. 잔의 마지막 대사다.

 

"누군지 몰라."

 

처음 만나 격렬한 정사를 한 사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사람, ---.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조차 모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게 익명성을 강요한다.

 

내가 너를 얼마나알까?

네가 나를 얼마나 알까?

아니, 내가 나를 알까?

너와 나의 소외(疏外),  나와 나의 소내(疏內).                      

 

‘성에 대한 가장 유명한 영화’ '감독을 법정에까지 세웠던 위험한 영화’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문제작' ----등 수많은 수식어를 단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너를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