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은 계집 종, 남을 대신하여 원수를 죽인 의로운 남아(하)

2015. 4. 13. 09:30간 선생의 야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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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 2화(하) - 경인예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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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 2화(하)
 
 
 

2.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은 계집 종, 남을 대신하여 원수를 죽인 의로운 남아(하)

동계가 어린 계집종의 원통한 마음과 그 절의가 가상함을 칭찬하고 감탄하며 쓸쓸하니 얼굴빛을 바꾸고는 말했다.
“너의 뜻과 절개가 실로 기이하고도 장하구나. 그러나 내가 일개 서생으로 아무런 무기도 없으니 어찌 이 큰 일을 행하겠는가?”
어린 계집종이 말했다.
“제가 평소에 원수를 갚으려고 뜻을 다지고는 좋은 활을 구하여 감춰둔 지 이미 오래지요. 비록 활 쏘는 법이 묘하지 못할지라도 활을 당겨 화살 쏘실 줄은 아실 테니, 만일 화살을 쏘기만 한다면 맞추실 거예요. 제가 비록 흉악하고 사나운 사내일지라도 어찌 죽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지요.”
그러고는 활과 화살을 꺼내와 동계에게 주었다. 동계가 이에 활시위를 매서는 조용히 어린 계집종과 함께 안채로 기회를 타 들어가 창틈으로 엿보았다. 촛불이 밝아 환한 가운데 한 커다란 사내가 옷을 벗고 가슴을 드러내고 음부와 함께 서로 안고는 농지거리를 하는데 못하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 사내가 누워있는 곳은 심히 방문에 가까웠다.
동계가 이에 활을 잡아당겨 창틈으로 힘을 다하여 화살을 쏘니 정확히 그 사내의 배에 맞아 가슴을 관통하였다. 다시 화살을 재어 그 음부를 쏘려하니 어린 계집종이 손을 휘저어 만류하고 급히 밖으로 동계를 끌어내며 말했다.
“저 음부를 비록 죽여도 아깝지 않으나 제가 어릴 때부터 섬겨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답니다. 노비와 주인의 명분이 있으니 어찌 제 손으로 저 음부를 죽이겠는지요. 그러니 저 음부를 내치고 가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고는 동계를 재촉하여 행장을 수습하여 삼경에 문을 나섰다. 동계가 어린 계집종을 말에 태우고 이십 리를 가, 함께 길을 가던 과객들이 묵는 숙소를 찾아갔다.
이때에 하늘빛은 아직 밝지 않았다. 어렵게 주막집을 찾아 들어가니 동행들이 심히 괴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더욱이 동계가 그 여자와 함께 온 것을 보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얼굴빛을 바로잡으며 꾸짖었다.
“우리들은 평일에 그대와 몸을 닦고 삼간 선비로서 학문으로 청백개결한 자네를 추대하였네. 그런데 일개 여자에게 마음이 빠져 이미 우리들과 말머리를 함께하지 않았고, 또 한밤중에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은 실로 군자의 처신이 아닐세. 평소에 우리들이 생각하여 우러러든 것과는 전연 상반된 행동이니 선비 군자로서 행동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동계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도 글을 읽은 사람일세. 어찌 여인을 탐하여 사대부의 행동을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은 일을 만들었겠는가. 거기에는 기이한 곡절이 있다네.”
그러고는 어린 계집종의 내력과 행한 일의 전말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일행이 모두 놀랍고 기이하게 여겨 왁자지껄 그 어린 계집종의 의로운 마음과 충성스런 마음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동계는 다시 일행과 함께 그녀를 데리고 서울로 와 한 지역의 집을 빌려 머물게 하였다. 동계는 즉시 과거에 응시하여 회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오른 이후에 어린 계집종으로 부실(副室)을 삼아 함께 살았다. 그 여인이 또한 그윽하고 한가하며 정조가 바르고 성격이 조용하여 부덕을 모두 갖추어 동계가 사랑함이 늙도록 줄어들지 않으니 고을에서 그 현숙함을 칭찬하여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간 선생 왈(曰): 이 야담의 여주인공은 동계 정온(鄭蘊,1569~1641)의 부실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동계는 나이 42살인 1610년(광해군 2년)에야 겨우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나이 42살에 과거를 보러 가다 간통하는 사내를 활로 쏘아 죽였다는 것이 영 미덥지 않다.
그러나 동계가 정의롭고 강개한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자 동계는 상소를 올려 이의 부당성을 꾸짖었다. 광해군은 노했고 동계를 죽이려하였다. 이때 성균관 유생 이백여 명이 경복궁 안마당에 거적을 깔고 동계를 죽여선 안 된다고 하여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를 가 10년을 지낸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풀려 난 동계는 1636년 병자호란을 맞는다. 이때 동계는 예조참판대사간으로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최명길과 대척에 섰다. 동계는 “자고로 군자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을 시도하였고 겨우 목숨만은 건진다.
이후, 동계는 고향인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로 내려가며 “이제 나는 망국의 신하이니 아무 곳[某里]에 산다고 해라”라고 해서 동네 이름이 ‘모리(某里)’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641년 73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해, 광해군도 유배지 제주에서 죽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는 달리 『기문총화』 544화에는 공처가 정온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이이첨 같은 악독한 간신도 두려워 않는데 오히려 부인이 두려우신지요?”라고 물으니 “이이첨 같은 도적의 무리야 죽이면 죽지만, 이 사람은 온종일 못 살게 구니 참으로 두렵다네.”하더란다. 이런 정온이 저 계집종을 부실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니 그야말로 ‘여드레 삶은 호박에 도래송곳 안 들어갈 말’이니 흥미로울 뿐이다.
각설하고, 남녀 간 애정으로 인한 비극은 저렇듯 죽음까지도 부른다. 가만 생각해 보니, ‘혹 음부가 죽인 남편을 어린 계집종이 연모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야릇한 생각이 든다. 남녀 관계야 본래 드렁칡처럼 얽히는 법, 그러고 보니 죽임을 당한 음란한 부인의 남편이 또한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다. 어린 계집종에게는 자신의 몸을 팔아서까지 원수를 갚을 만한 주인사내였지만, 음부에게는 죽일 남편이었기에 말이다. 나 역시도 누구에겐가 괜찮은 선생일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는 형편없는 선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