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하)밝은 눈으로 천리를 보는 부인의 지혜 일세에 성공한 대장부의 영광(하편)

2015. 3. 22. 11:48간 선생의 야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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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야담카페 제 1화 (하)밝은 눈으로 천리를 보는 부인의 지혜 일세에 성공한 대장부의 영광(하편)
간호윤  |  문학박사

 

승인 2015.03.21  13:59:11


제1화

밝은 눈으로 천리를 보는 부인의 지혜 일세에 성공한 대장부의 영광(하편)

천일이 허락하고 이번에는 신묘한 수를 써서 다시는 내기바둑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천일이 천 석의 조를 얻어 가지고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말하였다.
“이제 천 석의 조를 얻었으니 이것으로 장차 무엇을 하려 하오.”
부인이 말하였다.
“군자께서 평일에 친근하게 지내는 오래된 벗과 친척 가운데에 혼인과 상을 당하여 궁한 자와 또 가깝고 멀고를 묻지 말고 집안이 가난하여 능히 어떤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꾸려 나가지 못하는 자에게 일일이 구휼을 베푸세요. 이와 같이 자선사업에 마음과 몸을 다하시고 또 원근의 귀하고 천한 사람 가운데 만일 기걸한 사람이 있거든 사람됨을 묻지 말고 이 사람과 교류하고 날마다 맞아 오세요. 그러면 술과 밥의 비용은 첩이 힘써 갖추어 모자라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천일이 이 말을 따라 그대로 행하니 원근에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소리는 마치 송덕비를 세울 정도였다.
하루는 부인이 시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제가 장차 농사를 지으려 하오니 울타리 밖에 있는 닷새갈이 밭을 내려주세요.”
시아버지가 이를 허락하였다.
부인은 사람을 시켜 밭을 갈았으나 곡식을 뿌리지 않고는 전부 박을 심었다. 가을 추수기에 이르러 박이 익자 이를 거두어 칠을 하여서 저장해두었다. 매년 이와 같이 하니 몇 년 후에는 다섯 칸 창고에 그득하였다. 또 별도로 공장이를 고용하여 큰 쇠로 이 박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개의 쇠박을 만들어 이를 보관하였다.
집안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혹 묻는 자가 있으면 부인은 웃으면서 훗날에 알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할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부인이 천일에게 말하였다.
“첩이 평소에 군자께 궁한 자를 구휼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기걸한 인사와 교류를 맺으라함은 이때를 당하여 그 힘을 쏟고자 함이었지요. 이제 군자께서는 힘차게 의병을 일으키어 왕실에 관련된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쓰세요. 이것은 위로는 국가에 충성함이요, 중으로는 부모를 드러냄이요, 아래로는 향기로운 이름을 당세와 후세에 드리울 것입니다. 군자의 입신양명이 이 한 번 거사에 있습니다. 시부모님께서 피난할 곳은 이미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 마세요. 첩이 이미 무주 지방 아무 산 속에다 논밭을 간 지 오래되었으니 거기에 집도 있고 곡식도 있습니다. 털끝만큼이라도 군자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을 것이니 염려 마세요. 첩은 이곳에 있으면서 군량을 힘써 마련함에 힘을 다하여 끊어지는 근심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니 군자께서는 짧은 시간이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거사를 일으키세요.”
이러하니 천일이 흔연히 부인의 말을 따라 드디어 의병을 일으켰다. 원근 각처의 사람들로 평소에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두 찾아오니, 며칠이 안 되어 정예로운 병사 사오천인을 얻었다.
이에 군졸로 하여금 각각 그 칠한 박을 차고 싸움을 하게하고는, 진지로 돌아올 때에 고의로 쇠박을 길에 버려두었다. 적군이 이를 주어 들어보니 그 무게가 수십 근이라 크게 놀라 말하였다.
“이 군졸들이 이 쇠박을 찼건마는 그 행동이 나는 것 같으니 그 용력이 절륜함을 알 수 있잖은가.”
그러고 왜군들에게 단단히 경계였다.
“쇠박 찬 군대를 만나거든 적을 가볍게 보지 말라. 미리 그 칼날을 피하라.”
이런 까닭으로 천일의 병사들이 향하는 곳마다 왜군들이 모두 그 명성을 듣고 우러러보고는 분주히 달아나며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천일이 왜적과 수십 회를 교전하여 수많은 기이한 공을 세웠다. 이것은 모두 그 부인의 선견지명과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술법과 계략에 의거함이다.


   
나주 정렬사(旌烈祠)에 있는 김천일의 동상

  간 선생 왈(曰): 이 야담의 주인공은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김천일의 부인이다. 천일은 임진왜란 때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ㆍ경상ㆍ전라ㆍ충청 4도에서 활약한 임진 삼장사(壬辰三壯士) 중 한 사람으로 1593년 5월, 진주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였다.(나머지 임진 삼장사는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최경회(崔慶會,1532∼ 1593)와 고종후(高從厚,1554~1593)이다.) 허나, 김천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항복은 그를 기렸고 유성룡은 그를 진주성을 함락케 한 무능한으로 보고 있다.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김천일과 이항복은 서인이었고 유성룡은 동인의 영수였다는 사실이다.
김천일의 부인은 기록에 의하면 위원군수(渭原郡守) 김효량(金孝亮)의 딸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그러나 이 야화에서 부인에게 집안을 흔쾌히 경영하게 한 아버지는 이미 김천일이 태어난 던 해 세상을 떠났다.(김천일의 아버지는 부인이 김천일을 낳은 다음 날 죽자, 그 해 7월에 세상을 떴다.) 따라서 김천일은 외가에서 생활하였고 김천일의 부인은 시아버지를 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니 이러한 글을 읽을 때에는 글줄과 글줄 사이를 주시하며 진실을 찾아야한다.
요즈음 한 TV에서 임진왜란을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 후 우리 조선인의 삶은 총체적으로 변하였다. 심지어 ‘고[鼻]가 코’로, ‘갈[刀]이 칼’로 변하는 거센소리와 된소리 현상까지 일어났다. 언어현상까지 저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전쟁이다.
이 전쟁의 참혹함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비극적이었다. 여성들에게는 적군도 적이지만 아군도 적인 경우가 허다하였다. 임진왜란을 초래한 것은 김천일의 부인과 같은 여성들의 부덕이 모자라 빚어진 것이 아니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남성들, 그것도 권세를 잡고 있던 몇 남성들의 문제였다.
임란 후, 우리의 소설사에서 여성전쟁영웅들(<박씨전>, <홍계월전>.… 등)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전쟁의 비극과 전쟁을 초래한 부조리한 남성중심사회와 남존여비라는 가두리 양식장에서 사육되는 여성들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이 야사도 이와 동일한 보상심리를 담은 이야기다.
각설하자. 오늘도 여당 야당으로 나뉘어 격전을 치르는 저 여의도는, 조선 임진년 저 시절 동인 서인이 패싸움을 하던 저 경복궁의 사정전과 다를 바 없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임란을 초래한 저 몇 사람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장소만 바꾸어 이 나라를 쥐락펴락한다. 모쪼록 진정한 김천일 부인의 후예들이 여의도에 많이 입성했으면 한다. 그래, 밝은 눈으로 천리를 보는 정치를 하여 우리 대한인을 성공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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