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에 박힌 현재, 어쩌면 미래.

2015. 4. 7. 16:37학생들의 글, 리포트/학생들의 글과 리포트

'사물 관찰하기' 과제를 ​수행한 학생의 글입니다. 이러한 글이 언제쯤 없어질까요. 학생의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픕니다.

틀에 박힌 현재, 어쩌면 미래.

 

 

의예과 박00

 

 

 

 

  19살의 수험생은 늦은 밤임에도 수학 문제집을 풀어나간다. 150번 째 문제, 오늘의 마지막 문제이다. 그는 채점을 시작하고, 문제집 위에는 그의 열정이 빨갛게 물든다. 계단을 올라 별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쉬는 그의 손, 굳은살과 그 위의 잉크 얼룩이 눈에 밟힌다. 불현 듯 좋은 시상이 떠올랐는지, 그는 교실에 들어와 펜을 기울인다.

                               

   자살

 

 

어떤 동기가 있기에

나는 어느새

세상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먼 곳에선

붉은 십자가가 아롱이는데,

나는 그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인지

그 자리에 못박혀 섣불리 뛰어내릴 수 없었다.

 

내 눈앞엔 온 세상이 반짝이고 있는데

뒤돌아서면 아무것도 없겠지.

눈감고 살포시 뒤돌아 눈을 떠 보았을 때,

아리게 다가오는 공백의 절망...

 

나는 내 등 뒤의 공백을 선택하지 못하고

끝내, 한번더 절망의 공백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일필로 써내려간 종이를 누군가가 빼앗는다. “딴 짓 하지 말고 공부해.” 그렇다, 고3 담임에게는 시짓기는 비생산적인 활동일 뿐이다. ‘수험생’은 시를 쓰면 안 된다. ‘수험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 수험생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영어 문제집을 풀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10대들에게는 정해진 길이 있다. 초중고 12년을 마친 뒤, 의무교육 아닌 의무교육인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어떤 부모들은 좋은 대학교, 좋은 고등학교, 심지어 좋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열을 올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하는 건 시간 낭비로 여긴다. 정해진 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틀을 벗어나는 것이고, 시의 특징을 외우고 문제집을 푸는 것이 요구된다. 과학 실험을 좋아하는 것은 틀을 벗어나는 것이고, 과학 실험 결과를 외우는 것이 요구된다. 학교에 가지 않고 꿈을 찾는 것은 틀을 벗어나는 것이고,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항상 틀에 갇혀있을까?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원인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다. 이것이 좋게 발현되면 전에 썼던 글처럼 따뜻한 정이 되는 것이고, 나쁘게 발현되면 눈치 보기와 획일화가 된다.

  이렇게 주변 사람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틀에 갇힌 사고로 인해 우리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우리는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해 밥을 같이 먹을 친구를 구하고, 비주류인 자신의 취미를 숨긴다. 또 감당도 못할 외제차를 사고, 나이에 쫓겨 결혼을 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를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려 한다.

  틀에 갇힌 사고 때문에, 아버지가 화가라고 하자, ‘그럼 백수네?’ 라고 한 담임 선생의 이야기나, 거리를 청소하는 분을 보고 자녀에게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된다.’ 라고 하는 일화가 쏟아져 나온다.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틀에 박힌 사고가 없었다면, 담임은 학생에게 시집을 추천했을 것이며, 시집을 추천 받은 학생은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워 저명한 인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가 개인의 꿈을 막게 된 것이다. 눈치를 보는 사회가 눈치를 보는 개인을 만들고, 그런 개인에 의해 사회 전체의 능력도 저하된다.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노벨 문학상, 노벨 과학상이 하나도 없는 것이 더더욱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빛은 억겁의 시간 전의 빛이라고 한다. 한강의 기적 이후 세계의 IT를 이끌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재의 대한민국. 어쩌면 우리는 오래 전 사라진 영광의 잔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