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인작업을 하다가

2013. 12. 28. 09:41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새해에 햇빛을 볼 (한국 고소설도 특강)(새문사, 근간)의 3차 교정을 보며 아울러 색인작업까지 한다. 교정지에 형광펜으로 색깔을 넣어주면 된다. 색인은 교정의 마지막 단계이니 이 책의 교정이 거의 끝나감을 말한다.

색인은 책의 맨 뒤에 수록하여 중요한 낱말이 몇 쪽에 수록되었는지 찾아보기 위한 일종의 책의 일람표이다.
책의 일람표ㅡㅡㅡㅡ

그렇다면 내 삶의 일람표는 어떠할까? 지금까지 내 삶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을 중요한 낱말들을 생각해 본다.

"할머니. 초등학교. 반장. 전학. 양남동. 촌놈. 다시 할머니와 도라지. 친구.....대학. 학생회장....... 전역.....교사임용. 딸과 아들....박사과정 진학..... 책 출간. .....그리고......누구와 금주."

가장 먼저 생각나는 낱말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나의 첫 여인이기도 하셨다. 내 할머니, 서울로 전학 간 손자인 나를 밥해주러 오셔서는 늘 도라지를 까셨다. 6년 여를 한결같이. 한 관의 도라지를 까고 쪼개는데는 온 종일이 걸렸다.

할머니의 손가락은 도라지 껍질처럼 망사로 벗겨졌고 쪼개는 칼날로 베어졌다. 그래도 할머니는 하루 15원을 벌려 매일같이 도라지를 가져왔다. 손자인 나에게 무엇이든 먹이려고. 또 내 아버지인 당신의 아들을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그럴때면 철없는 손자인 나는, 갸냘픈 어깨로 쪼그리고 앉아 도라지를 까는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에게, 자식 하나만 바라보고 사신 가녀린 한 여인에게, 손자를 위해 서울로 밥해 주러오신 슬픈 한송이 백합같은
할머니에게 모진 말을 해댔다. 

"창피하다고. 부끄럽다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도라지 쪼개는 마지막 작업은 내가 도와야 했다. 그래야만 좁은 한 칸 방에서 보기싫고 흉물스런 도라지가, 도라지 냄새가 없어졌다. 하얗게 잘 쪼개진 도라지는 물기를 먹어 무겁기에 내가 메고 가야만 했다. 그러면 할머니 손에는 15원 안팎의 돈이 들려졌다.

그 돈으로 나와 할머니는 양남시장으로 갔다. 콩나물, 덴뿌라, 음.........암만 가만히 생각해보아도 더 생각나지 않는다. 손자의 밥상에 할머니는 도라지 깐돈으로 만든 콩나물과 덴뿌라를 맛나게 올려 놓으셨다.

그로부터 40년도 더 흘렀다. 이제 내 머리에도 서서히 백설이 내려 앉는다. 요즈음 나는 금주를 한다. 술을 안 먹어서인지 아침이면 기분 좋게 눈을 뜬다. 그래 일찍 눈뜬 김에 책의 색인 작업을 하다 더듬어 본 내 삶의 색인표를 몇 자 적어보았다.

내 삶의 일람표ㅡㅡ
내 깜냥으로 이만하면 괜찮지않나 싶다.
 
 
 
내 서재 한 켠에 있는 할머니가 쓰시던 재봉틀 다리. 내 활머니는 가녀린 몸매를 지니시고 옷태가 나는 분이었다. 옥양목 치마춤을 맵시있게 허리에 여미신 모습은 꽤나 단아햐셨다.  그래, 한 송이 백합같이 외로우면서도 화려한 분이셨다. 안타깝게도 나와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지금은 이마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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