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괘각(羚羊掛角) 영양이 훌쩍 뛰어 나뭇가지에 뿔을 걸다

2011. 12. 3. 15:27삶(각종 수업 자료)/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강의자료)

아름다운 나날 되세요.

시원치 않은 강의를 열심히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호윤 배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5).ppt

 

 

 

8: 선립근기(先立根基) 독서는 먼저 바탕을 세워야 한다

효제논어<학이>편에서 그 이유를 귀띔 받는다. <학이>편에 그 사람됨이 효제하면서도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근본이 서면 도()가 생겨난다. 효와 제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라고 한다.

결국 효제라 함은 단순하게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 우애 정도로 끝나는 말이 아니다. 효제는 군자의 근본이요, 도요, 인으로 나아가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은 유교 최고의 덕목이다. 즉 효제만 있으면 법과 도덕에 어긋나거나 사회적으로도 화평을 깨뜨리고 인륜을 저버리는 몰염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버이와 형제간의 우애는, 나아가 남의 어버이와 형제에게 까지 미치고, 나아간다면 온 천하 사람에게 미치므로 인()이라 한 것이다.

행동이라는 실천의 독서를, 다산은 만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만물을 번성하게 자라게 해야겠다는 생각(澤萬民育萬物底意思)”이라고 말한다. 행동과 실천이 독서의 부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후라야만 독서군자(讀書君子)라고 대못 두어 개 쿡 찔러 놓았다. 책을 한낱 지식 놀음이나 글을 쓰는 방편으로서만 접하는 오늘날 독서군자들에게 주의를 촉구하는 경구이다. 콘센트에 플러그만 꽂으면 충전되는 핸드폰식 메커니즘 독서로는 인정머리 없는 기계음만 두뇌에 주입할 뿐이다.

실용지학은 이 시대의 화두이며 독서의 장력(張力)이다. “여러분은 이제껏 속아 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1995, 미국의 언론인 얼 쇼리스는 이 말을 외치며 노숙자, 빈민, 마약중독자, 죄수 등을 대상으로 철학과 시, 미술사, 논리학, 역사 등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열었다. 책과 절망인 삶의 만남이요, 바로 실용지학이다. 절망을 독서로 맞선 이들은 결국 대성공을 거둔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 책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읽은 책들은 하나같이 고전 인문서적들이다.

다산은 실용지학에 마음을 두었고 경세제민에 관한 고인의 글을 즐겨 읽었으며, 만민에게 혜택을 주고 만물을 기르고자하는 생각을 마음속에 곧추세운 뒤라야만 바야흐로 글을 읽는 군자노릇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독서의 장에서 실용지학이나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찾는 것이 다소 거리가 있을지 모르나, ‘마음속에 확립된 뜻만 잘 갈무리해 둔다면 그 거리를 얼마든 줄인다.

정조임금은 내로라하는 독서광이었다. 그는 뜻은 배움으로 인하여 서고, 이치는 배움으로 인하여 밝아진다. 독서의 공에 힘입지 않고도 뜻이 확립되고 이치에 밝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일득록(日得錄)> 5)라고 독서를 한껏 추켜세웠다. 정조의 말처럼 독서를 통해 배움을 갖고 이 배움에 따라 뜻이 서고 이치에 밝아진다. 독서를 통해 뜻이 서고 이치에 밝아진다는 말에서, 독서가 행동실천으로 이어진다는 유추 또한 어렵지 않다.

초서지법은 다산이 학문(독서)의 요령으로 든 방법이다. 그는 항상 한 권의 책을 읽을 때에는 오직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게 있으면 뽑아 모아라. 그렇지 못하다면 눈을 두지 마라. 이렇게 하면 비록 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의 공부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실상 다산의 수많은 저서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모두 이 초서지법에 연유한다. 조선말 사전인 아언각비부터 음악서인 악서고존, 정치서인 목민심서경세유표, 의학서인 촌병혹치마과회통, 법률서인 흠흠신서, 기타 모시강의,매씨서평,상서고훈,상서지원록,상례사전,사례가식,주역심전,역학제언,춘추고징,논어고금주,맹자요의≫…여기에 2000여 편이 넘는 시와 여러 편지글 등이 바로 그 방증인 셈이다.

심지어 둘째 형에게 보낸 글을 보니 개고기 요리법까지 초서해 놓았으니 이렇다.

 

형님! 들깨 한 말을 이 사람 편에 부쳐드리니 볶아서 가루로 만드세요.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또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기름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납니다. 바로 초정 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입니다.”

 

12살이나 위인 초정 박제가와 친분이 있던 정약용 선생이 언젠가 초정 선생이 개고기 삶는 것을 보고는 초록해 두었던 듯하다.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이 쏟아지는 지금엔 더욱 그렇다. 모두 다 읽고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 읽을 책을 선정하고, 읽은 책에서 요긴한 대목을 뽑아 두어야 한다. 초서하는 방법은 각기 편한 대로가 좋다. 나 같은 경우는 논문’, ‘저서’, ‘단서장사따위 여러 꾸러미를 만들고, ‘논문에는 생각 중인 논문 주제를, ‘저서에는 지금까지 저서와 논문을, ‘단서장사에는 짤막한 글들을, ‘원고에는 지금 진행 중인 원고를, ‘글항아리에는 항시 책을 읽고 초서한 글들을 기록한다.

정조임금<일득록(日得錄)>45에서 나는 평소 책을 볼 때에 반드시 초록하여 모으는데, 이는 사실의 긴요한 대목을 파악하고 문사(文詞)의 정수를 모으기 위해서다.” “책을 볼 때는 반드시 초록하여야 하니, 그렇게 해야 오래도록 받아들게 된다.”고 하였다.

초록을 하였으면 독서 노트도 만들어야 한다. 정조임금은 일득록2에 이렇게 그 방법을 소개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독서를 좋아해서 바쁘고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도 하루도 정해 놓은 분량을 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읽은 경()()()()을 대략만 계산해 보아도 그 수가 푸지다. 그래 독서기(讀書記)를 만들고자 하여, 사부(四部)로 분류한 다음 각각의 책 밑에 편찬한 사람과 의례(義例)를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며, 끝에는 어느 해에 송독했다는 것과 나의 평론을 덧붙여서 하나의 책을 만들었다. 읽은 책들을 품평해 놓으면 사람들이 두루 볼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여가 시간에 한가히 뒤적이면 평생의 공부가 낱낱이 눈에 들어온다. 반드시 경계하고 반성함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독서장을 만든다.

먼저 책을 분야별로 분류한다.

편찬자와 책의 체제를 상세히 기록한다.

읽은 날짜와 작품평을 기록한다.

이제는 독서과정을 본다. 정조는 역시 <일득록(日得錄)> 5에서 독서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공부할 과정을 세워 놓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비록 하루 동안 읽은 양이 많지 않더라도, 공부가 쌓여져서 의미가 푹 배어들면 일시적으로 여러 권의 책을 읽고는 곧 중단한 채 잊어버리는 사람과는 그 효과가 천지 차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일과를 정할 때에는 자기의 수준과 상황을 고려하여 책을 선별하고 주 단위, 혹은 월 단위, 또는 연간 계획도 좋다.

정조임금은 위와 같은 책에서 지나간 몇 해 삼여(三餘:겨울, , 비 올 때)의 공부는 직접 편찬한 책을 읽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을묘년에는 주서백선을 읽고, 병진년에는 오경백편을 읽고, 정사년에는 사기영선을 읽고, 무오년에는 팔자백선을 읽었다. 올겨울에는 또 다행히도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춘추를 읽었으니, 뜻이 있으면 끝내 이루게 되지 않을까라고 한다. 정조임금은 이렇듯 일 년을 단위로 독서 과정을 면밀히 세웠다.

연암4년간이나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을 보았으나 잊어버리자 초록 한 책을 만들고야만다. 연암의 독서법은 정조임금과 각론은 살짝 다르지만, 체계적이라는 결론은 동일하다. 연암은 <원사(原士)>에서 글 읽는 법은 일과를 정함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라라고 경계한다. ‘일과를 정하라는 말은 읽을 분량을 체계적으로 정함이요,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는 집중력을 잃을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연암은 또 미리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날마다 읽어라한다. 다독을 한들 모두 제 것이 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연암은 뜻이 정밀해지고 의미를 밝게(旨精義明)’하는 곳이 바로 여기라고 이어지는 글에 써 놓았다.

남현희 편역, 일득록, 문자향.

정약용 지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이지선, 리딩으로 리드하라, 문학동네.

9: 이여관지(以余觀之) 내 뜻으로 읽어내라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독서에 금언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그의 독서관은 한 한 마디로 내 뜻으로 읽어라이다.

 

독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타인이 밟았던 생각의 과정을 더듬는데 지나지 않는다. 글씨 쓰기 연습을 하는 학생이, 선생이 연필로 그려준 선을 붓으로 따라가는 행동과 비슷하다. 독서의 첫 번째 특징은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과 같다는 점이다. , 발자국은 보이지만, 그 발자국의 주인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발자국을 따라가는 행동이 아니라 주변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확인하는 길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이기에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을 따르듯 하지 말라고 한다.

혹 우리나라의 독서율이 이러한 발자국 따라가기 아닌가 하여 몇 자 덧놓는다. 중고등학생은 그렇다 해도 초등학생, 특히 유아기의 독서 열풍은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유아기의 과잉독서는 책의 의미를 몰라 기계적으로 문자만 암기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하이퍼렉시아(hyperlexia:초독서증)라 하는데, 끝내는 유사자폐로 이어진다는 것이 의학계의 진단이다.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는 그는 지나치게 책 읽는 일에만 빠져들어 무수한 밤을 책을 읽느라 지새웠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책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잠자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책을 읽는 시간은 많아져서 머릿속은 텅 비고 마침내 이성을 읽어버렸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아무런 의심 없이 책이 챙겨주는 정답을 외우는 돈키호테의 독서행위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게 읽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피에르바야르는 프랑스 제 8대학 교수로 독자가 적극 개입주의 독서를 주창한다. 예를 들어 <셜록 홈즈>에서 홈즈가 지목한 범인은 틀렸다거나 <햄릿>에서 삼촌 클로디어스가 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따위이다. 독자는 얼마든 다른 범인을 새로운 추리소설을 쓰듯이 풀어내야한다는 뜻이다. 독자의 창조적 상상력을 독서의 우듬지에 두는 견해이다. ‘개입주의 독서법이든, ‘추리비평이든, ‘창조적 오독이든 간에 저 이의역지 독서법의 동어반복이다. 책을 그릇 해석하는 오독(誤讀)이 좀 있은 들 어떠하랴? ‘창의적 오독이라는 말은 모순이지만, 구래의 독법을 답습하기보다는 낫다.

창의적이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만 지면을 할애한다. 실수와 오류를 범하지 않은 창의성은 없다. 글은 서론, 본론, 결론, 혹은 기승전결로 기계적 메카니즘의 작동으로 오인하면 안 된다. 한 편의 글은, 글자라는 실핏줄로 연결된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글에서 쿵쾅거리는 울림을 듣기도 한다.

울림은 <구운몽>인생무상이란 주제도, <춘향전>열녀라는 주제도 바꾼다. 저 젊은 청춘들의 교과서에 인생무상열녀라고 적바림함은 좀 가혹하지 않은가.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과 <춘향전>을 최초로 구상한 어떤 이와 삼자대면할 일도 아니다. 두 소설의 주제를 성진도 후회했으니 힘껏 삽시다!’신분상승을 위한 춘향의 지혜따위로 바꾸면 어디가 덧나나? 글을 읽으려는 자라면 시를 아는 어려움이 시를 짓는 어려움보다 심하다.(知詩之難 甚於爲詩之難)”라는 소화시평서문을 곰곰 되새김질해야 마땅하다.

이심회지 독서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핀다. 제대로 된 독서를 하려면 아래 글은 꼼꼼히 읽어야 한다. 연암의 선생의 <답경지삼(答京之三)>의 일부분이다.

 

그대가 태사공(사마천)사기를 읽었다고는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는가 보오. 어째서 그러냐하면, <항우본기>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고, 자객열전을 읽고서 고점리가 축()을 치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말이오. 이런 것들은 늙은 선생들이나 늘 해대는 진부한 이야기이니, 또한 살강 밑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아이들이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심정을 깨닫는다오. 앞다리는 반쯤 구부리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추켜든 채 손가락을 벌리고 다가서서 막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날아가 버리지요. 사방을 돌아보매 아무도 없어 겸연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글 지을 때라오.

 

연암 가로되, 사기를 읽었다고는 하나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다고 하며, ‘살강 밑에서 숟가락 줍는 격(廚下拾匙)’이라고 뚝 자른다. 여기서 마음은 글을 짓는 저자 태사공의 마음이다. 연암은 그 이유를 <항우본기>자객열전독서로 든다. ‘<항우본기>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면 그것은 독서를 잘못한 것이라는 말부터 본다. 이 장면은 항우의 군대가 거록에서 진() 나라 군대를 무찌를 때다. 항우의 기세에 눌린 다른 제후의 장수들은 성벽 위에서 그 전투 장면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연암은 이 장면에서 독서자가 읽어야할 것은 그 마음(讀其心)’인데 이를 읽지 못했다고 한다. 독서자가 읽어야할 그 마음은 바로 파부침주(破釜沉舟)’, 즉 죽기를 각오하고 명령을 내린 항우와 그의 병사들의 마음이다. 항우는 진나라와 싸울 때, 타고 왔던 배를 부수어 침몰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는 밥솥을 모조리 깨뜨리고 주위의 집들도 깡그리 불태웠다. 병사들 손에는 단 3일 분의 식량뿐이다. 이제 돌아갈 배도, 밥을 지어 먹을 솥도, 새벽이슬을 막아 줄 거처도 없다. 항우와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승리한다.

<항우본기>에서 읽어내야 할 그 마음이 바로 여기다. 그것은 항우와 병사들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마음,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하면 명확하게 기술할까 애태우는 저자 태사공의 마음이다. 그런데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항우본기>를 읽었어도 읽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 것이다.

자객열전에서 고점리가 축을 치던 장면이나 생각하는 것도 그렇다. 위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는 축을 잘 치는 고점리와 절친한 사이이다. 형가는 술이 취하면 곧잘 고점리가 치는 축에 맞추어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어느 날 형가는 진시황 암살 임무를 띠고 떠나기에 앞서 고점리가 치는 축에 맞추어 비장한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진시황 암살은 실패하고, 형가는 진시황의 칼날에 8번이나 찔려 죽고 만다. 고점리가 축을 이용해 형가의 원수를 갚으려 진시황 앞까지 가는데 성공한다. 그 대가는 혹독하여 고점리는 눈을 뽑혔다. 고점리는 납을 장치한 축으로 진시황을 내리치지만 실패하고 만다. 고점리의 목은 그 자리에서 떼인다.

자객열전의 축()은 이렇듯 형가, 고점리, 진시황과 팽팽히 얽혀 냉엄한 현실의 비극성을 들려준다. 태사공이 자객열전에서 쓰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비극을 담아낸 축소리이다. 8번 칼을 맞고 쓰러진 형가와 눈을 뽑히면서까지 진시황에게 다가가 축으로 내려친 고점리, 그리고 이 둘의 마음을 축 소리에 담아 보려한 태사공의 마음, 이 마음이 바로 독서자가 읽어 내야할 그 마음이다.

여기에 태사공 개인의 신변 정황도 한껏 고려해야한다. 태사공 사마천은 이능을 변론하다 애꿎게 성기를 거세당하는 궁형을 받았다. 25계에서도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런 사마천이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난 경지에서 쓴 글이 바로 사기자객열전이다. 사마천은 하늘의 도리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耶 非耶)’를 저술의 화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위 글에서 연암이 말하는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장수장노(將羞將怒)’의 마음은 바로 사마천의 이러한 정황을 아울러 읽어낸 고심 끝의 넉 자다.

연암은 위 글에서 겸연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이 사마천의 글 지을 때라고 한다. 나비를 잡았으면 글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세상이다. 마음을 도스르고 온 힘을 다하여 이제는 득의의 웃음을 지으려는 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나비를 잡지 못하는 사마천의 장수장노, 부끄러운 듯 성난 듯한 마음(將羞將怒)’이다. 이 말은 시대에 영합하는 글을 통해 출세와 영달은 결코 꾀하지 않겠다는 다짐장이다. 벼슬 못한 선비로서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올곧은 소리를 내는데서 오는 부끄러운 듯 성난 듯한 마음을 글쓰는 이로서 마음에 담겠다는 뜻이다. 글재주를 통한 조선후기의 권력과 환전을 차갑게 거절하는 연암 내면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기,자객열전을 독자들은 한낱 장면 묘사로만 읽어댄다. 연암이 늙은 선생들이 늘 해대는 진부한 이야기라 나무라는 이유도, 또 아무 것도 아닌 일을 무슨 큰일이나 한 듯 떠들 때 쓰는 속담인 살강 밑에서 숟가락 줍듯까지 끌어 온 이유를 알만하다.

마음이 또 나왔다. 이미 1계에서도 살핀 이 마음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모르고 적바림하는 것이 아니니,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오랜만에 TV를 보았다. 춤을 추는 한 여성이 눈을 붙잡는다. 경쾌한 리듬에서 은은한 일렁임이 이는 무도곡까지, 자이브, 룸바, 차차차, 스포츠댄스로 안무를 바꿔가며 음악에 몸을 싣는다. 김보람이라는 여성, 놀랍게도 그니는 청각 장애자로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단다. ‘어떻게 음악에 맞추느냐?’는 사회자의 당연한 물음에 이어지는 그니의 명랑한 대답.

마음으로 들으면 돼요

자기의 주견을 굳건히 다진 뒤에야 내 뜻으로 책을 읽는다. 에디슨이 1,093개의 특허를 따고, 세계 인구 0.2%의 유태인이 노벨상 수상자의 22%를 배출했으며, 시카고대학이 인문고전 100권을 읽게 하여 노벨상 왕국이 되었다는 등, 지식나부랭이나 몇 추스르거나 울레줄레 남들 따라 시험이나 영달을 위해 줄이나 긋고자 책을 잡는 독서로는 결코 사마천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연암의 꾸지람도 피하지 못한다. 글을 읽는 이라면 마땅히 자기의 주견을 굳건히 한 뒤에 내 뜻으로 읽어야 한다.

같은 책도 서로 다른 의미를 얻는 경우는 학자라면 누구나 인정한다. 예를 들어 본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우리네 속담이 있다. 사전을 찾으면, ‘아무도 안 듣는 데서라도 말조심해야한다’, 혹은 아무리 비밀히 한 말이라도 반드시 남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로 정리해 놓았다. 그런데 다산은 이를 주언작청 야언서령(晝言雀聽 夜言鼠聆:낮 말은 참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이라고 번역해 놓고는 계신언야(戒愼言也)”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계신언야말을 삼가고 경계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은 이를 주언작청 야어서청(晝言雀聽 夜語鼠聽: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이라 번역하고는 언암중지사 인필지지(言暗中之事 人必知之)”라고 풀었다. ‘몰래하는 일은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안다는 뜻이다. ‘말을 삼가고 경계하라는 다산의 뜻풀이와 몰래하는 일은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안다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현재 우리는 이 둘을 모두 쓰는 셈이다.

예를 하나만 더 든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다알다시피 개에게 쫓기던 닭이 지붕으로 올라가자 개가 지붕만 쳐다본다는 뜻으로, 애써 하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남보다 뒤떨어져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다산은 이를 간계지견 도앙옥은(赶鷄之犬 徒仰屋檼:닭 쫓던 개 지붕 마릇대만 쳐다보다)’이라 번역하고는 유동학경진 기우선승(喩同學競進 其友先升)”이라 한다. 해석하자면 함께 공부한 벗과 경쟁하다가 벗이 먼저 지위에 오르다이다. 그런데 이덕무는 이를 구축계 옥지제(狗逐鷄 屋只睇:닭 쫓던 개, 다만 지붕만 흘겨보다)’라 하고는 언사패이무료야(言事敗而無聊也)”로 적었다. 해석하자면 일이 낭패를 보아 멀쑥하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덕무의 해석을 따른다. 속담을 한자로 번역한 것은 유사하지만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이렇듯 동일한 속담 하나도 세월에 따라 지역에 따라 학자에 따라 해석이 얼마든 다를 수 있음을 독서자라면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장수는 목이 없고, 여인은 어깨가 없다는 멋진 화론이다. 어찌 목이 없고 어찌 어깨가 없겠는가? 이유는 장수의 우람한 기상은 목이 없는 듯 짧게 그리는데서 드러나고, 미인의 요염한 자태는 어깨 없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곡선을 통해 얻을 수 있기에 이를 강조하여 그리지 않은 것이다. 장수의 특징을 우람한 체격이나 혹은 부릅뜬 눈에서 찾고, 아름다운 여인의 특징을 가녀린 허리와 어깨선으로 그렸다면 그저 그런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내 뜻으로써 장수와 여인의 특징을 읽어낸 얼마나 멋진 이여관지인가.

홍만종 저, 안대회 역, 소화시평, 국학자료원.

슬라보예 지젝 외, 이운경 옮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한문화.

11: 영양괘각(羚羊掛角) 영양이 훌쩍 뛰어 나뭇가지에 뿔을 걸다

언어의 한계성, 제 아무리 언어를 다듬어야 언어로 다 표현 못한다는 뜻이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名)”이란 말을 보자. 노자첫 구절로 언어의 한계성을 12자로 콕 집어냈다. ‘도가도 비상도도를 도라고 하면 참 도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범상치 않은 말이라 한정된 언어로 설명하기가 난감하고 논의의 밖이니, ‘명가명 비상명만 보자.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참 이름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쉽게 풀자면 말로 형상화된 이름은 실제의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공부!’라고 외쳤다 치자. 독자들께서는 공부라는 말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나? 취직, 학문, 지겨움, 즐거움, 영어, 국어, 학교. 그야말로 만인만색의 공부가 나타난다. 제각각 경험세계가 다르기에 공부!’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엇박자를 빚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각 개인의 머릿속에 저장된 사회 관습 언어인 랑그(langue)와 특정한 개인이 특정한 장소에서 실제로 발음하는 언어인 파롤(parole), 시니피앙(signifiant:귀로 듣는 소리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외적 형식을 이르는 말)과 시니피에(signifié: 말에서 소리로 표시하는 의미를 이르는 말)로 구분해 언어학의 기본으로 다룬다. 이 언어의 한계성이 곧 글쓰기의 한계성이다. 단순히 글자만 뒤 쫒다 저 나뭇가지에 걸린 작가의 뜻을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지상의 <송인(送人)>이라는 시를 보자.

 

비개인 긴 둑에 풀빛이 더욱 푸른데, 雨歇長堤草色多

님 보내는 남포에 슬픈 노래 흐르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되야 마르려나,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돋우네. 別淚年年添綠波

 

이별을 제재로 한 우리나라 송별시 중, 백미로 꼽힌다. 대조법과 도치법·과장법 따위의 표현기교를 써 임과 이별하는 애달픈 정서를 애틋하게 노래한 것도 이유지만, 압권은 결구이다. ‘이별의 한을 대동강 물에 비유해 돋운다는 표현의 극대화는 신운이 감돈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받는다. ‘신운이란 고상하고 신비스러운 기운으로 글을 읽고 그 무엇이 느껴질 때, 그것을 신운(神韻)이 감돈다고 한다. 이 신운은 글자의 밖에서나 얻는 미묘한 기운으로 작가의 정신적 풍모이다.

중국의 오진염(吳陳琰)<잠미속집서문(蠶尾續集序文)>에서 이 신운을, “매실은 신맛에 그치고 소금은 짠맛에 그친다. 음식이라면 시고 짜지 않은 것이 없지만 맛은 시고 짠 바깥에 있다. 시고 짠 바깥에 있다? 맛 밖에 맛이다. 맛 밖에 맛, 이것이 신운이다라고 신은을 멋지게 설명했다.

이렇듯 신운은 말 밖에서 찾아야한다.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뜻은 적다. 작가는 이를 알고 글을 그쳤으니, 작가의 정신적 풍모인 신운은 독자 역량에 따라 몫몫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한시에서 마지막 구는 어떤 시인이든 가장 애쓴다. 착상·감각·표현을 고도로 응집시킨 이 시의 마지막 구 역시 그렇다. 한시를 볼 때는 영양이 훌쩍 뛰어 나뭇가지에 뿔을 건 결구를 잘 읽어야한다.

연암 역시 박종채의 입은 빈 <과정록>4에서 이 결구를 단속한다. “글을 짓는 법은 결구의 말을 전환하는 곳에서 글자가 정돈되고 무거워진 연후에야 음향이 밝고 문리가 분명해졌다.” 언외(言外)의 정이라는 여운이 여기에서 생길 수밖에 없다. 작자가 말하지 않고 한 말’, 그리지 않고 그린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신위은 이를 그려지지 않은 이것이 그림이요, 그려진 이것은 가짜(非畫是畫 畫是假)”라고 까지 하였다. 그러니 독자는 그려지지 않은 것에서 뜻을 찾아야 한다.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매창(梅窓)의 시에서 영양괘각을 찾는다.

 

그리워 말 못하는 애타는 심정, 相思都在不言裏

하룻밤 괴로움에 머리가 센다오. 一夜心懷髮半絲

얼마나 그리웠나 알고 싶거든, 欲知是妾相思苦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오. 須試金環減舊圍

 

잠조차 오지 않는 불면의 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한밤을 꼬박 임 그리는 여인의 마음이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고 싶다고? 매창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정지상의 결구처럼 여운으로 처리해 놓았다.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오라고. 그 그리움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매창의 그리움을 저 손가락에서 능히 읽는다.

옥봉이란 시인이 내쫓김을 당한 뒤 남편의 마음돌리기를 기다리며 지은 시에 만약에 꿈속의 혼이 다닌 자취가 남는다면 문 앞 돌길은 반이나 모래가 되었을 거여요(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라는 구절도 이와 갔다.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는 말을 줄임으로써 언어의 한계성을 오히려 극복하였으니 잘 음미해 보자.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왜 사냐건 웃지요. ‘왜 사냐?’는 물음을 웃음으로 처리한다. 웃음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한들, 웃음을 당해낼 만한 시어는 없다. 이 시어는 저 유명한 이백의 <산중문답>1,2구인 묻노니, 당신은 왜 푸른 산중에 살지요?(問爾何事棲碧山) 웃으며 대답치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笑而不答心自閑)’의 차용이지만.

<설야방대(雪夜訪戴)>는 눈 온 날이면 생각나는 글로 영양괘각으로 한껏 글의 여운을 뽐낸 글이다. 이 글은 세설신어에 전하는데, 중국의 대문호 왕휘지(王徽之)의 이야기다. 왕휘지는 본디 풍류가 뛰어난 사람으로 산음(山陰)이란 곳에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린다.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어젖뜨리고, 술 한 잔을 먹는다. 사방은 눈빛으로 희디희니 갑자기 마음이란 녀석 갈피를 못 잡고. 여기에 낙양의 종이 값깨나 끌어 올렸다는 <초은시>를 읊으니,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난다. 즉시 조그마한 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친구를 찾아 간다. 밤을 지새워가니 친구의 문 앞이다.

왕휘지는 그만 배를 되돌려버린다.

왜 그 친구를 보지 않고 되돌아 왔을까? 어리석은 누가 그 까닭을 물었나보다. 왕휘지 가로되, “내가 본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왔다네. 어찌 꼭 안도를 보아야만하겠는가라고 한다. 이 무엇인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다. 당나라 사공도(司空圖, 837~908)<이십사시품> 12구인 함축한 글자 짓지 않아도(不著一字) 풍류를 다 얻었나니(盡得風流)’와 잇고 싶은 구절이다. 저 흥의 경지가 영양괘각이다.

도연명(陶淵明)<음주(飮酒)>5이다.

 

동쪽 울 밑에서 국화 꺾어 들고, 採菊東籬下

여유롭게 남산을 바라보네. 悠然見南山

산 기운은 해거름에 아름답고, 山氣日夕佳

날던 새들 짝 지어 돌아오네. 鳥相與還飛

이 가운데 참뜻이 있거늘, 此中有眞意

무슨 말인가 하려다 잊었어라. 欲辯已忘言

 

이 시는 번잡한 세상사를 피하여 숨어 사는 은자의 초연한 심경을 읊은 시이다. 도연명의 생각은 저 마지막 구에 있다. 멀리 남산을 바라보고 새들은 짝을 지어 돌아온다. 도연명의 머릿속을 무엇인가 휙 스치고 지나간다. 이것이 도연명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하는 참뜻이다.

도연명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잊었어라라고 말을 끊어 버렸다. 영양이 뿔을 걸었으니 독자의 차례다.

십분심사일분어는 마음에 품은 뜻은 많으나 말로는 그 십분의 일밖에 표현 못한다는 의미이다. 제아무리 혓바닥이 장구채 놀 듯 현란하여도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하는 법이니 글은 어떠하겠는가. 꼭 길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인 백거이(白居易)대서시일백운기미지(代書詩一百韻寄微之)에서 심사를 한마디 말에서 안다.(心事一言知)”라고 한다.

그러니 저 이의 심사를 한 마디 말에서 알려면 십분의 구는 체독體讀해야만 읽는다. ‘체독이란, 글을 읽을 때 글자에 표현되지 않은 것에서 글쓴이의 참뜻을 찾으라는 의미이다. 문제의식을 갖고 독서를 한다는, 그러한 마음가짐이라야 먹을 갈고 마음을 도슬러 먹고, 붓을 잡은 글쓴이의 뜻을 따라 잡는다. 이래야만 독서의 출력이 글쓰기의 예지로 이어진다.

채근담菜根譚<후집後集>에는 이런 말이 있으니 잘 새겨들어야겠다.

 

사람들은 글자가 있는 책은 읽을 줄 알아도, 글자가 없는 책은 읽을 줄 모르며, 줄이 있는 거문고는 탈줄 알아도 줄이 없는 거문고는 탈줄 모르니 형체에만 집착할 뿐 정신을 활용하지 못한 때문이다. 어찌 거문고와 책의 참 맛을 알겠는가.

연천 홍석주는 독서의 등급을 다섯으로 나누었다. 영양을 찾지 못한 독서는 최하 5위이다.

1: 이치를 밝혀 몸을 바르게 하는 독서

2: 옛 것을 널리 익혀 일에 적용하는 독서

3: 문학을 배워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는 독서

4: 기억력이 뛰어나 남에게 뽐내는 독서

5: 할 일없이 시간만 죽이는 독서

책 밖에, 말 밖에-, 글쓴이의 마음이 있다. 작가들은 제 마음을 글 속에 다 표해 놓지 않는다. 검은 글자 몇을 보고 책을 다 보았다며 덮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소치이다. ‘동물은 대상을 욕망하지만 인간은 욕망을 욕망한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이다. 모자가 거리를 점령한다고 혹한의 계절이라 생각하면 오해이다. 한 여름에도 털모자를 쓴 젊은이들을 캠퍼스에서 얼마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여름 털모자에서 멋들어진 욕망을 감췄다. 문자의 표면만 엉금거리다가는 작가의 욕망이 빚은 글의 육체 즉, 언어의 은유성을 보지 못한다. 문자라는 손칼을 열고 작가가 은밀히 숨겨 논 욕망이란 차꼬를 풀어야만 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스트립쇼(strip show)와 비슷한 의식이다. 스트립걸이 음탕한 조명 밑에서 옷을 벗어 던지며 자신의 감춰진 매력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는 것처럼, 소설가도 역시 작품들을 통해 공공연하게 자신의 은밀한 부분들을 발가벗는다.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스트립쇼에서는 무희가 옷을 입고 등장하여 발가벗는 것으로 끝나지만, 소설의 경우에는 그것의 전위된 행위이다. , 소설가는 옷을 반쯤 벗고 시작해서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옷을 입는다.

 

위는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픽션에 숨겨진 이야기에서 전언한 내용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혹은 소설을 읽다가 우리는 종종 제목을 다시 보거나 앞 장으로 손을 놀리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독자의 저러한 행동은 글을 제대로 읽는 이라면 당연한 귀결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심술궂게도 은밀하게 숨기는 그 무엇이 있어서다.

글은 빙산과도 같아서 밑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따금 글을 뎅글뎅글 읽으며 색독(色讀)만 하는 자들을 본다. 색독은 문장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글자가 표현하는 뜻만을 이해하며 말의 향연으로만 해석하려 드는 독서이다. 글을 읽을 때 문장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눈동자만 바삐 굴려 글자의 뜻만 이해하며 읽는 색독은 저 음탕한 조명 밑에서 옷을 벗어 던지며 야릇한 추파를 던지는 스트립쇼에 지나지 않는다. 책마다 순례를 한다고 잘하는 독서가 아니다. 내용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는 덮어 놓고 열 넉 냥 금이라 말과 다를 바 없으니 영판 책을 잘못 읽는 것이다.

맹자.

장자.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5).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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