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미래를 3강

2011. 11. 19. 11:24삶(각종 수업 자료)/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강의자료)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3).ppt

안경 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 초상

독서시인간제일건청사(讀書, 是人間第一件淸事)”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 선생이 글공부를 정의한 문장이다. 풀이하자면, “독서야말로 인간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맑은 일이다정도의 의미이지마는 쉬이 넘어갈 글줄은 아니다. 공부를 하여 출세를 하려는 독서와는 영판 다르기 때문이다.

제일건청사’, ‘가장 맑은 일이라는 뜻이다. ‘가장 맑은 일이란, 바로 맑은 삶을 살라는, 마음공부에 다짐장을 두라는 의미의 독서를 말한다. 다산 선생의 저서를 관류하는 예리한 현실관찰과 부조리한 사회상을 바로 잡으려는 매서운 결기, 바로 독서를 가장 맑은 일이라 규정하는 데서 이미 보인다. 맹물에 조약돌 삶듯, 머리로만 책을 보아서는 안 될 말이다. 다산의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한 삶도 이 독서에서 비롯하였다.

다산 선생은 조선중화(朝鮮中華)’라고 한다. 조선이 문화의 중심이기에 조선이 곧 세상의 중심인 중국(中國)이란 뜻이다. ‘조선사람이기에 조선시를 쓴다는 다산의 선언은 여기서 나왔다. 그의 18년 간 귀양 생활 이전과 이후, 70세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유지된다. 2400여 수나 되는 다산 선생의 시는 모두 이 조선시 정신이다.

나는 누구인가. 조선사람이다. 我是朝鮮人(아시조선인)

달갑게 조선의 시를 짓겠노라. 甘作朝鮮詩(감작조선시)

 

다산 선생은 이 책 여러 곳에서, 특히 1심도,2관도,3독도,4.사도에서 독자들과 자주 대면하며, 글읽기와 생각하기에 가르침을 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선생 초상

어글어글한 눈, 눈초리가 올라간 것하며 오뚝한 콧날과 턱수염이 매서운 인상을 준다. 넉넉한 풍채에서 풍기는 기운은 대인처럼 우람하다. 과정록에 보이는 아들 종채의 기록과는 얼굴 모양이 사뭇 다르다.

개를 키우지 마라는 연암의 성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결절이다. 연암은 개를 기르지 마라不許畜狗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또 개를 기른다면 죽여야만 하고 죽인다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느니만 못하다

말눈치로 보아 정을 떼기 어려우니 아예 기르지 마라는 소리이다. 어전語典애완견이라는 명사가 오르지 않을 때다. 계층이 지배하는 조선후기, 양반이 아니면 사람이기조차 죄스럽던 때이다. 누가 저 견공犬公들에게 곁을 주었겠는가.

언젠가부터 내 관심의 그물을 묵직하니 잡는 연암의 메타포이다. 연암의 삶 자체가 문학사요, 사상사가 된 지금, 뜬금없는 소리인지 모르나, 나는 그의 삶의 동선이라고 생각한다. 억압과 모순의 시대에 학문이라는 허울에 기식한 수많은 지식상知識商 , 정녕 몇 사람이 저 개와 정을 농하였는가? 연암의 개결한 성정의 출발은 바로 여기이다.

연암 선생은 이 책 1심도에서 5.서도까지 독자들과 자주 대면하며 글쓰기에 가르침을 준다.

너를 묶는 그물을 찢어라!(決破羅網)

 

2. 觀道: 보는 길 

3: 오동누습(吾東陋習)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을 버려라

요즈음 시류를 타고 한자 학습 또한 갖은 차림새로 학생들에게 짐을 지운다. 그 중, 천자문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인터넷 ○○문고에 들어가 천자문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무려 600여권이 넘게 뜬다. 학생들이 있는 집에는 어김없이 천자문한 권쯤은 예사로이 찾는다. 가히 천자문의 화려한 부활이다.

마을의 꼬마 녀석이 천자문을 배우는데 읽기를 싫어하여 꾸짖었답니다. 그랬더니 녀석이 말하기를, “하늘을 보니 파랗기 만한데 하늘 천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이 때문에 읽기 싫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주려 죽일만합니다(里中孺子 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我聰明 餒煞蒼頡).(<답창애지삼>)

 

연암 선생의 글이다. 전문이 겨우 서른 넉자에 불과한 글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차고 넘친다. <답창애지삼>은 유한준에게 준 편지이기에 의미하는 바가 깊다. 유한준은 문필진한이니, ‘시필성당이니 외워 대던 사대주의의 전형적 사고를 지닌 이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선생의 대화를 통해 연암은 자신의 언어인식을 재미있게 드러냈지만 저기에 천자문의 허가 숭숭 뚫려있다. ‘아이의 총명함이 한자를 만든 창힐을 주려 죽일 만하다, 맺음 말결에 천자문학습의 잘못됨을 경고하는 연암의 의도가 선연하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본 하늘은 그저 파랄 뿐이다. 그런데 하늘 천()’자에는 전혀 그런 내색조차 없다. 천자문의 첫 자부터 이러하니 999자를 어떻게 감당해 내겠는가. 그러니 읽기 싫어요!’ 외치는 어린 아이의 내심을 똥기는 말이다.

사실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天地玄黃(천지현황)’이란 넉 자의 풀이는 쉽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아닌가? 그렇다면 저 꼬마둥이처럼 글자 속으로 좀 들어가자. ‘하늘이 왜 검지요?’

……?’

아마도 답을 내려면 동서고금을 넘나들이 하는 석학 선생이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우주의 진리를 담은 묘구이다. 저 아이만 나무랄게 아니다. 선생이 제대로 설명치 못하니 아이들은 외울 뿐, 다음부터 공부란 그러려니 하고 그저 중 염불 외듯읊어 댈 뿐이다.

중국 양()나라의 주흥사(周興嗣)가 무제(武帝)의 명에 따라 지었다는 천자문은 그 연원이 오래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논어를 전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우리와 친분도 꽤 깊다. 이 기록이 285년이다. 허나 천자문14250, 모두 1,000자로 된 고시(古詩)이기에,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지나치게 많은데도 아무런 비판 없이 우리나라에서 어린아이들의 학습교재로 쓰였다. 당연히 여러 선각자들의 비판이 있을 법한데, 연암 선생과 다산 선생 이외에 눈 밝은 학자들을 찾기 어렵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공인된 관념 틀거지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정약용 선생은 담총외기(談叢外記)에 실린 <천자문불가독설(千字文不可讀說)>에서 천자문의 폐해를 명확히 짚는다. 천자문이 아이들에게 암기 위주의 문자 학습을 강요하여 실제 경험세계와 동떨어지게 한다는 지적이다. , 천자문은 천문 개념에서 색채 개념으로, 또 다시 우주 개념으로 급격히 사고전환하기에, 어린 아이들이 일관성 있게 사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데, 서거정의 유합과 같은 책은 비록이아급취편의 아담하고 바름에는 미치지 못하나 주흥사의 천자문보다는 낫다. 황이라는 글자만 읽고, 백 따위 그 부류를 다 익히지 않으면 어떻게 아이들의 지식을 길러 주겠는가? 초학자가 천자문을 읽는 것이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이다(敎小兒 如徐居正類雖不及爾雅急就篇之爲雅正 猶勝於周興嗣千文矣 讀玄黃字 不能於靑赤黑白等竭其類 何以長兒之知識 初學讀千文 最是吾東之陋習).(다산시문집17<증언(贈言)> ‘반산 정수칠에게 주는 말’)

 

저러한 선각께서 오동누습이라했다.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이라는 뜻이다. 저렇게 극언하였거늘, 오늘날 아이들의 책상마다 천자문이 놓였으니 어찌된 셈인가? 천자문으로 공부깨나 한 분들에게는 경을 칠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비단보에 개똥이라는 우리네 속담을 생각해봄직도 하다. 다산 선생의 선배 실학자인 박제가의 말로 끝을 맺는다. 박제가는 기존의 관습도 과감히 깨고 한 꺼풀 벗기면 새로운 속이 보인다고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만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꺼풀을 가지고 있어 뚫어 보지를 못 한다. 학문에는 학문의 꺼풀이 문장에는 문장의 꺼풀이 단단히 덮였다(今人只是一副膠漆俗膜子透開不得 學問有學問之膜子 文章有文章之膜子)”(정유각문집(貞蕤閣文集)1, <만필(謾筆)>)

 

한자 학습이 무섭다. 고등학생뿐만이 아니라 초등학생들까지 무턱대고 덤벼든다. 공부를 하려는 아이와 이를 말리려는 부모, 머리를 질끈 동여맨 아이의 옆에서 공부 감시를 하다 조는 부모가 등장하는 광고는 그 자체가 현실이다. ‘교육이란 미명하에 벌어지는 모지락스런 어른들의 공부 상품화가 무섭고 아이들이 애처롭다. 대한민국 모든 아이들이 오로지 한 두 대학, 한 두 학과만을 두고 공부만 한다는 사실은 전율스럽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 중, 천자문학습은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산은 어떻게 아이들의 지식을 길러 주겠는가?”라는 강한 반문으로, 천자문을 보아서는 아이들의 지식이 길러지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천자문을 배우느니, 차라리 명심보감이나 추구따위를 학습케 함이 옳다.

<답창애지삼>, 서른 넉자의 편지는 연암과 후일 척을 두고 지낸 의고주의자(擬古主義者) 창애 유한준(兪漢雋)이란 이에게 보낸 것이라는 점을 예각화한다면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유한준은 진한고문(秦漢古文)을 추종하는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총명함이 한자를 만든 창힐을 주려 죽일 만하다연암은 한자를 창조한 창힐을 아이에 빗대어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 연암의 제자인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종북소선자서(鐘北小選自序)>에서 창힐이 글자를 만든 뜻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 한자를 만든 창힐을 왜 폄하하는 것일까?

연암은 글자를 만들 때 내용을 들어보고 형상을 그려내며 또 그 형상과 뜻을 빌려서 쓴 것(造字亦不過 曲情盡形 轉借象義如 是而文矣)”뿐이라고 한다. 창힐이 내용을 들어보고 형상을 그려내 한자를 처음 만들었듯이, 누구든 글자를 만들면 되는데 웬 수선이냐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창힐이 만든 한자는 인지문(人之文)이다. 사람이 만든 인지문은 누구든, 언제든 만든다. 더욱이 천자문은 다산이 촘촘이 그 폐단을 지적했듯이 인지문의 정형이 못된다. 맞지 않으면 고쳐야 하는 것은 언어라고 다를 바 없다. 변하지 않는 사물이 없듯이 언어 또한 고정하지 않고 변한다. <용비어천가>, 내히따위는 저 당시엔 일상이나 지금은 보기조차 어렵다.

그런데도 당대의 문장가들, 이 편지를 받는 유한준 같은 이들은 문필진한이니, ‘시필성당이니 외워 대며, 천자문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였다. ‘문필진한(文必秦漢)’은 문장을 하려면 선진양한을 본받아야 하고, ‘시필성당(詩必盛唐)’은 시를 지으려면 성당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대주의의 전형적 사고이다. ‘아이의 총명함이 한자를 만든 창힐을 주려 죽일 만하다, 맺음 말결에 천자문학습의 잘못됨을 경고하는 연암의 의도가 또렷이 드러난다.

관념의 틀거지를 거세해야 한다. 종종 인생판의 행마법(行馬法)을 터득한 이들은 묘수를 잘 둔다. 그것은 시대와 적당한 타협을 벌이는 짓이니, 바로 관념의 틀거지에 끼인 인생이다. 관념 틀거지에 끼인 눈으로 천자문을 바라보니 이보다 더 좋은 글은 없었다. 혹 있다손 치더라도, 천자문을 대처할 만한 새로운 글을 만들 자신도 없고 굳이 그러한 생각을 타인들에게 엿보일 이유도 없다.

 

 

5: 사이비사(似而非似) 산수와 그림을 제대로 보아라

서울 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 격으로, 지금도 그저그런 산수만 보고 그림일세라고 아는 체 떠들어 대는 이들은 귀 기울여야 할 계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 그니는 두 눈을 가린 채 한 손엔 저울을 다른 한 손엔 칼을 들었다. 장님이다. 눈이 하는 거짓말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눈은 세계를 보기도 하지만 때론 제 앞도 못 본다. ‘눈 뜨고 봉사질 한다눈이 아무리 밝아도 제 코는 안 보인다는 이러한 눈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속담이다.

눈의 한계성을 벗어나려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이 필요하다. 그 눈을 심안(心眼)이라 한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눈은 때론 고통이 따른다. 루이스 부뉴엘의 1929년작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영화가 있다. 남성이 여성의 눈을 면도날로 도려낸다. 이 섬뜩한 장면은 일상의 눈을 버리라는 뜻이다. 일상을 눈을 버릴 때 그곳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

5계는 바로 이 심안의 중요성을 살핀다. 연암 선생은 그림과 글을 상호보완의 관계로 보았다. 연암 선생의 서간을 보면 하루에 십 여 차례씩 그림첩을 펼치면 글을 짓는데 크게 도움을 주는 첩경(盖日十數舒卷 大有益於作文蹊逕耳)”이라 한다. 이 그림에 관한 일화이다.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강산이 그림 같은 걸이라고 하자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들이 산수도 모르고 또 그림도 모르는 말일세. 강산이 그림에서 나왔겠는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겠는가?” 이러므로 무엇이든지 비슷하다, 같다, 유사하다, 근사하다, 닮았다고 말함은 다들 무엇으로써 무엇을 비유해서 같다는 말이지. 그러나 무엇에 비슷한 것으로써 무엇을 비슷하다고 말함은 어디까지나 그것과 비슷해 보일 뿐이지 같음은 아니라네(君不知江山 亦不知畵圖 江山出於畵圖乎 畵圖出於江山乎 故凡言似如類肖若者 諭同之辭也 然而以似論者似 似而非似也).(<난하범주기>)

 

산수도 모르고 그림도 모른다고 질타하며 비슷해 보일 뿐이지 같음은 아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연암이 말하는 비슷해 보일 뿐이지 같지 않다는 사이비사이다. 사람으로 치면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고 그런 사이비다. 연암은 이런 자들에게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른다고 쏘아붙였다. 강산에서 나온 그림을 보고 강산을 그림 같다고 해서이다.

연암 선생은 강산의 모사본인 산수화를 들고, 산수인 원본에 비기는 어리석음을 통박한다. “무엇에 비슷한 것으로써 무엇을 비슷하다고 말함은 어디까지나 그것과 비슷해 보일 뿐이지 맞잡이는 아니다라는 설명까지도 친절하게 붙였다. ‘객관적 존재양태인 자연은, 결코 주관적 인식양태인 그림과 비슷하다, 같다, 유사하다, 근사하다, 닮았다할 수 없다. 연암은 이에 더하여 그림의 원근법perspective과 농담법濃淡法까지 동원하여 사이비사를 이해하려 하였다.

무게7g, 부피 6.5, 지름 2.4의 눈으로는 보는 것은 객관적 존재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보지만 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주관적 인식양태를 보려면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이 필요하다. 심안은 우리의 눈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의 눈을 의심할 때 마음이 보인다. ‘눈을 마음의 이라 부르는 이유도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는 뜻이다. 마음은 우리 몸의 중간이요, 사상이 착상되는 곳이요, 사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곳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읽으려면 이 ‘마음의 눈이 꼭 필요하니, 마음의 눈이 있어야만 사물의 이면을 보고 읽는다.

접적시接敵時, 최고의 검객은 적의 칼끝을 보지 않는다. 상대방의 눈을 본다.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기 위해서다. “꽃은 봄을 맞아 누구에게나 활짝 웃건만 자연에서 느끼는 사람의 정은 얕고 깊음이 다르구나(花含春意無分別 物感人情有淺心)” 김인후가 엮은 백련초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물은 보는 자의 안목과 마음에 따라 저렇게 꽃이 달라진다. 꽃의 웃음은 꽃에서는 결코 찾지 못하기에, 꽃 속으로 들어가려는 열정과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이 열정과 의지가 바로 심안을 만든다.

다산 선생의 <오학론>에 보이는 변별진위(辨別眞僞)’도 이 심안을 이야기한다. ‘변별진위란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가려냄이다. 글 쓰는 자라면 제 눈으로 사물을 보아야 하고,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는 심안을 갖춰야 한다. 뛰어난 안목이란 뜻의 척안(隻眼), 의학의 망진(望診)도 이 심안이다. 사물을 심안으로 보려는 자유의지가 없이는 결코 변별진위에 다가서지 못한다. 자유의지가 없는 삶은 타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제 생각이 아닌 남 생각만으로 사니, 그 눈이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텅 빈 눈으로는 사물의 참과 거짓을 결코 구별하지 못한다. 남의 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인 코드화된 눈으로는 남이 보는 내 뒷모습만 볼뿐이다. 이런 자들을 두고 산수도 모르고 그림도 모른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초과 실재의 세계를 그린 영화 <매트릭스>는 이 5계에 많은 생각을 준다. <매트릭스>에서는 산수와 그림을 제대로 구분하려면 빨간약을 복용하라고 한다. 연암은 저 시절 이미 빨간약을 복용하였다.

 

주관적 인식양태온고요략(溫故要略)에서 그 예를 찾는다. 일수사견(一水四見), 일경사면(一境四面), 일경사심(一境四心), 일경사견(一境四見), 명경비유(明境非有)라고도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제 눈에 안경이다. 완전한 객관인 세계는 없다는 말이다. 일수사견이란, 같은 물(), 그것을 보는 주체가 하늘이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물고기냐에 따라 네 가지로 보인다는 뜻이다. “하늘에서 물을 보면 유리로 생각하고, 사람이 물을 보면 물로 생각하나, 귀신이 물을 보면 불로 생각하며, 물고기가 물을 볼 때는 제가 살 집으로 생각한다. 이로써 비유한다면 제 각기 보는 바가 다르다는 법문이다.(天見水思琉璃 人見水思水 鬼見水思火 魚見水思室 以之譬所見各別法門)”라고 하였다. 사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이 저렇게 어렵다.

우리의 눈을 의심하라. ‘몸이 천 냥이면 눈은 900이라는 속담이 있다. 심리학자들도 지각 형성의 73%가 시각에 의존한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로 눈은 의존도가 높은 감각 기관이다. 하지만 저 속담과 통계를 믿고서는 사물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쓰려면 우리의 눈을 끊임없이 의심해야만한다.

 

어느 쪽이 더 길어 보이는가?

아래쪽이라고? 똑 같다. 못 믿겠으면 자로 재어보기 바란다. 눈의 착시현상이니 대단할 게 없다. , 제주도에 비탈 위로 물이 흐르는 있는 도깨비도로도 착시현상이잖은가. 우리가 눈을 믿지 말아야하는 이유이다.

직선을 그어보자.

……

혹 종이에 아래처럼 그리지는 않았는지?

상식이란 알아야겠지만 절대 고집할 것은 못된다. 직선을 잘못 그렸다. 위의 것은 직선이 아니라 선분이다. 선분은 아래처럼 선이 곧기는 하되,  A에서 B를 잇는다. 환언하면 한계가 있는 직선이란 뜻으로 유한 직선이라 한다.

   B

 

직선은 아래처럼 마냥 곧게 나간다. 끝이 없는 셈이다. 직선은 그냥 한정 없이 길어지는 곧은 금일 뿐이다.

 

A B

 

한정된 종이에는 결코 직선을 그릴 수는 없다. 우리는 이렇듯 선분을 그려 놓고 직선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삶이 마치는 날까지 그려도 결코 못 그리는 직선을, 선분 하나 그려놓고 잘 그렸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직선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선분을 그려 놓고는 직선의 진실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행동이 허다하다. 이 책을 쓰는 것도 동일하다. 내 힘껏 쓰고 다듬지만 독자들의 글쓰기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직선의 진실은 ‘AB’가 아닌, ‘AB’를 스치고 지나간 보이지 않는 곧은 선을 보아야만 얻는다. 보이지 않는  ‘AB’를 스치고 지나가는 선-. 한낱 우리의 육안으로는 결코 보지 못한다. ‘마음의 눈이 필요한 이유이다. 글쓰는 자에게 눈은 더 이상 얼굴의 소품이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직선의 곧은 선이 보인다.

접적시, 최고의 검객은 적의 칼끝을 보지 않는다. 상대방의 눈을 본다. 검객이 자기의 목을 겨눈 칼끝을 보지 않고 상대의 눈을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상대의 눈이 칼을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목을 향해 내려오는 칼날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손, 칼이라는 동선을 타고 내 목에 이른다. 마음이 칼의 가장 중심이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의 창인 눈을 봐야한다. 칼끝을 보는 순간, 상대방은 오간데 없고 목은 이미 상대방의 손에 있다. 칼이 글자라면 상대방 검객은 글자에 숨겨진 뜻이다.

척안은 뛰어난 안목이란 뜻이다. “석회는 물에 축축하니 젖어야 타고(石灰澆則焚), 옻칠은 축축한 속이라야 마른다.(漆汁濕乃乾)” 척안으로 세상을 본 정약용 선생의 <고시이십사수>의 한 구절이다. 어찌 젖어야 타고 또 젖어야 마르는가?

일상으로 척안을 돌려 본다. 송곳의 끝이 뾰족하다고? 그렇지 않다. 돋보기로 보면 뭉툭하다. 흔히 밤하늘의 별은 반짝인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반짝거리지 않는다. 1년은 365일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1년은 365.2422일이 맞다. 계이름 역시 그렇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우리 선조들이 쓴 궁상각치우는 무엇이란 말인가? 1에서 10의 중간은? 5가 아니라, 5.5가 맞다. 행복과 불행은 멀고 먼 관계? 아니다. 행복이라는 ()와 괴롬이라는 ()는 겨우 선 하나()’ 차이일 뿐이다. 순금은? 제 아무리 높아야 99.99%까지 밖에는 안 된다. 이 세상엔 어떤 물질이든지 100% 완벽하게 해당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관찰을 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관찰을 하면 파리 대가리나 모기 속눈썹도 본다. 척안이란 이렇듯 사물을 세세히 훑는 눈빗질이다.

망진은 의학 용어로 시진(視診)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사물을 관찰하는 마음의 눈이다. 즉 의사가 육안으로 안색과 눈, , , , 혀 따위를 살펴보고 그 외부에 나타난 변화에 따라 병의 증상을 진단하는 일이다. 글을 쓰려는 자라면 응당 사물을 망진할 줄 알아야 한다.

<매트릭스>는 이 5계를 정확히 관통하는 영화이다. 바로 사이비사와 마음이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시대의 화두인 시뮬라시옹부터 살펴야 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끄르가 작용하는 동사이다. ‘시뮬라끄르(프랑스어:simulacre, 영어:simulation)’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초과 실재로 모사본(模寫本)이다. 초과 실재, 즉 모사본이란 실재를 베꼈지만 결코 실재가 아니다. 바로 사이비사이다. 그런데도 이 시뮬라끄르인 모사본이, 때로는 실재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 현대사회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예언자 오라클은 주인공 네오에게 그노티 세아우톤(γνθι σεαυτόν)”너 자신을 알라임을 일러준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너는 마음의 감옥에서 태어났다라고 한다. 자신을 알고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깨어있으라는 주문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가상의 공간인 매트릭스요, 일상의 현실이 모두 거짓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안다는 것은 고통이다. 깨어있기 위해 네오는 목숨을 건 싸움을 한다.

빨간 약을 먹으면 우리는 집단 가사상태인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와 원본인 현실을 본다. <매트릭스>는 우리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 지배질서에서 잘 훈육된 자들이 서성거리는 가상과 실재 현실을 인식하려면 늘 깨어있어야 한다. 빨간 약을 먹으면 되지만 혼자만의 고독한 길을 순례자처럼 가야만 한다. 파란 약은 매트릭스다. 모든 것을 기계가 통제해 준다. 모든 사람들처럼 적당히 생각하고, 몸에 깊숙이 각인된 관습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산다. 내가 거울을 보지만 내가 없다. 몸과 마음이 조작된 일상 관습의 노예가 되어, 내 마음의 자유가 없는 감옥에 갇힌 것조차 모른다.

연암은 이미 이 시대의 화두인 시뮬라시옹을 저 시대에 말해 놓았다. ‘산수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 군이 바로 그것이다. 연암은 빨강 약을 복용하였다. 우리는 흔히 산수를 흡사하게 그려 놓으면 통상적 관념으로는 같다라는 말을 쓰는데, 단지 비슷한 것이지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시뮬라끄르와 원본은 다르다. ‘시뮬라끄르’, 즉 연암 글 속의 그림은 어디까지나 가짜다.

르네 마그리트, ‘금지된 복제(Reproduction Interdite)’

한 남자가 거울을 보나 거울 속에 얼굴이 없다. 그는 비슷한 가짜인 시뮬라크르의 눈만 지녔다. 시뮬라크르의 눈으로는 자기를 찾지 못한다. ‘파블로브의 개처럼 과거에 경험한 형식과 규범의 문화가 너무 몸에 젖어 조건반사 (conditioning)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경험한 문화 중, 대다수는 시뮬라크르임을 모른다.(시뮬라크르는 원래 플라톤이 정의한 개념이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원형인 이데아, 복제물인 현실, 복제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로 나누었다. 여기서 현실은 인간의 삶 자체가 복제물이고, 시뮬라크르는 복제물의 재 복제이다.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3).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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