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흰바탕이라야 그림을 그린다.

2011. 11. 15. 16:35삶(각종 수업 자료)/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강의자료)

2강입니다. 파일과 함께 원고를 올립니다.

 

 

 

 

고전에서 미래를 2.ppt

글자는 병사요, 뜻은 장수이고, 제목은 적국이다.

<소단적치인>

1. 心道: 마음 길

 

1: 소단적치(騷壇赤幟) 글자는 병사요, 뜻은 장수, 제목은 적국이다

첫계이다. 최신 생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마음은 뇌 속이 아니라 호르몬과 효소를 따라 몸 전체를 여행한다. , 냄새, 소리, , 부드러움 따위 오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글쓰기에 접근해야한다는 말이다. 허나 이러한 꾀바른 이치를 두엇 안다고 글쓰기가 쉬워지진 않는다.

시중에는 글쓰기의 성공에 일조하겠다는 관계 서적들이 많다. 그만큼 글쓰기가 어렵다는 반증이다. 그중 많은 글쓰기 관련 책들은 글쓰기는 글쓰는 것으로부터 풀어야 한다고 비의(秘意)인양 서두를 뗀다. 알렉산더가 고르디아스의 매듭(Gordian Knot)을 한 칼로 쳐 풀 듯, 글쓰기 고민을 이 한 마디로 푼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끊어진 것일 뿐.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어림없는 소리다. 저 쾌도난마식 글쓰기 묘방(妙方)이란 실은 무방(無方)에 지나지 않는다.

글을 곰곰 살펴보면 첫째 글재주로 쓴 글, 둘째 글쓰기 기술을 습득하여 쓴 글, 셋째 마음으로 쓴 글이 보인다.(붉은 고딕체는 <부록>에 보충 설명을 넣었다. 이하생략) 이중, 셋째 마음이 글쓰기의 비기로 하나로써 만 가지를 꿰뚫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다. 글쓰기는 글쓰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글을 쓰려는 마음에서 출발해야하기 때문이다.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짓기는 기술을 연마하여 써대는 글장난이요, 유희이다. 유희의 목적은 행위 그 자체로 끝난다. 글쓰기는 진실한 영혼을 건 마음 쓰기요, 양심이요, 생명이다. 양심이요, 생명이기에 살아있다. 글은 마음속에서 느낀 것을 머리를 거쳐 손으로 쓰기 때문이요, 임자 없는 글자들의 줄 세우기가 아니어서이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초등학교만 마치더라도 다 글을 읽고 쓰는데 아무 문제없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선생이 천지에 가득 찬 만물이 모두 시(盈天地者 皆詩)”라고 단언하였듯이 글감도 도처에 넘쳐난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기에 글을 못 쓴단 말인가? , 주제는 실종 신고요, 문장은 앞뒤가 묵은 원수처럼 서걱거리고, 내용은 읽으나마나한 아롱이다롱이요, 더욱이 글과 글쓴이가 어쩌면 저리도 데면데면하단 말인가? 앞에서 그것은 글을 쓰려는 마음 자세, 즉 글쓰는 이로서 양심이 없어서라고 하였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마음에서 우러난 영혼이 바로 양심이다. 영혼이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듯, 영혼이 없는 글은 글자는 있되 글은 없다. 영혼이 없어서다. 마음이 있는 글쓰기, 양심 있는 글쓰기는 정녕 자신의 영혼을 걸어야 한다.

오늘날 고전으로 부르는 글들은 모두 이 마음이 들어 있다. 이 책에서 자주 뵙는 연암 선생이나 다산 선생의 글도 물론이다. “연암 선생은 평소 글을 쓰실 때 천근의 활을 당기듯 하셨다(平日著作 如持千斤之弩)” 김택영(金澤榮,1850~1927)연암 박지원 선생의 문집인 중편 연암집을 간행하며, <>에다 적어 놓은 글귀이다. 연암 선생의 글쓰기가 천근의 활을 당기듯그렇게 신중했다는 의미이다.

연암 선생은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 글쓰기의 최고수이다. 그의 글 중,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라는 글은,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겐 최고의 지남석이다. 1계를 이끄는 글자는 병사요, 뜻은 장수이고, 제목은 적국이다라는 말은 바로 <소단적치인>의 첫 문장이다. 연암 선생이 글쓰기를 전쟁에 비유함은 글쓰기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양심과 영혼에서 한 발짝 더 나갔다. 전쟁터에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를 살아 낸 이정직(李貞稙,1853~?) 같은 이는 글쓰기는 나라 다스림과 같다. 글의 글자도 나라의 백성이다(盖治文猶治國 文之於字 亦猶國之於人)”(<부어만편빈어일자론(富於萬篇貧於一字論)>)라고 하였다. 글쓰기를 나라 다스림에 비유할 정도이니, 글쓰는 마음이 여하함은 미루어 짐작된다. 연암 선생은 이 마음을 특별히 심령(心靈)이라고 하였다.

, 이제 천근의 활을 당기듯이라는 연암 선생의 글쓰기 자세를 독자들이나 나나 책상 머리맡에 서리서리 얹어 놓고 문장중원(文章中原)으로 떠나보자.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리영희, <우상과 이성>

2: 미자권징(美刺勸懲) 흰 바탕이라야 그림을 그린다

글쓰기의 십 중, 칠팔은 마음이라고 했다. “글이란 마음에 연유하여 발로하는 것이므로 마음에 격함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그것을 막을 수 없다(文者緣情而發 有激於中 必形于外而不可過止者也).”(이상국집27, <여박시어서서>)라고 한다. 우리 한문학의 수준을 한껏 높인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선생의 이 글은 마음에 연유하여 발로한다는 연정이발론(緣情而發論)’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마음은 어떠한 마음일까? 그것은 소박하고 맑은, 진실한 마음이라고 다산 선생은 말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의재기> 첫머리이다.

 

사의재는 내가 강진에 귀양 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음이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음이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라고 하였다. 마땅함()은 의로움()이니, 의로 제어한다는 말이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 학업이 무너져 버렸음에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四宜齋者 余康津謫居之室也 思宜澹 其有不澹 尙亟澄之 貌宜莊 其有不莊 尙亟凝之 言宜訒 其有不訒 尙亟止之 動宜重 其有不重 尙亟遲之 於是乎名其室曰四宜之齋 宜也者義也 義以制之也 念年齡之遒邁 悼志業之頹廢 冀以自省也).(<사의재기(四宜齋記)> )

 

다산 선생은 강진에 처음 도착해 4년 동안 주막집에서 기거했다. 귀양을 와 주막집 곁방살이일망정 글하는 선비로서 기개를 꺾지 않고자 사의재라는 방 이름을 지었다. ‘사의재네 가지의 마땅함이 있는 서재라는 뜻이다. 생각은 담백하게(思宜澹), 외모는 장엄하게(貌宜莊), 말은 적게(言宜認), 행동은 무겁게(動宜重)사의이다. 다산은 그 중, 담백한 생각을 초꼬슴으로 든다. 담백한 생각이란 욕심이 없고 마음이 소박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어느 책을 보니 글은 아는 만큼 쓰고, 쓰는 만큼 는다라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담백한 생각이 없으면, 글을 써도 글로 남지 못해서다. 조선시대 담백한 생각으로 쓰지 않은 글들은 지금 우리에게 글로 다가서지 못한다. ‘담백한 생각이 없는 글들은 하나같이 태평성대 운운에, 충신연주가 교접하는 야합의 글이기 때문이다. 담백한 마음으로 보았기에 다산은 천하가 이미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다(天下腐爛已久)”라고 시대를 토혈했다. 그래 다산의 시들은 조선후기, 막돼먹은 세상의 방부서(防腐書)로도 읽는다.

다산은 당대의 곤욕스런 현실에 발 개고 나앉지 않으려 애썼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非詩也).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하고, 미운 것은 밉다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있지 않다면 시가 아니다(非有美刺勸懲之義非詩也)”라고 시를 정의한다. 2계의 문패인 미자권징,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라는 바로 앞 문장에서 얻었다. 다산시문집1<지루한 객지의 생활(倦遊)>에 써놓은 문장은 세속의 안목과 틀어졌다(文章違俗眼)”라는 고백이나 <애절양>이라는 시는 저러한 심정을 꿴 글줄이다.

다산 선생의 저 미자권징논어<팔일>편에 보이는 회사후소(繪事後素)와 이웃하고 지낸다. ‘회사후소,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는 뜻이니,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말한다. 흰 바탕은 글을 쓰려는 이의 진실한 마음이요, 그림은 글이다.

다산 선생은 세상의 허위, 위선과 싸우는 것이 글의 사명이라는 진실한 마음이 있었기에, 자신이 양반이면서도 그른 행동을 일삼는 동료 사대부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그가 저술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2000여 편이 넘는 사실을 그린 시들은 모두 이 마음으로 조선의 진실을 날카롭게 직시한 데서 나온 고뇌들이다. 시경사무사(思無邪)나 중국의 비평가 이지(李贄, 1527~1602)의 동심설(童心說), 연암 선생의 동심설과 조선후기의 성령(性靈)은 모두 글쓰는 이의 진실한 마음을 촉구하는 발언들이다.

작금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외수 선생은 나쁜 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라고 하여, 다산 선생의 소박하고 맑은 진실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었다.

고전에서 미래를 2.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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