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미래를 3차시 자료

2011. 11. 22. 17:04삶(각종 수업 자료)/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강의자료)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3).ppt

 

주관적 인식양태온고요략(溫故要略)에서 그 예를 찾는다. 일수사견(一水四見), 일경사면(一境四面), 일경사심(一境四心), 일경사견(一境四見), 명경비유(明境非有)라고도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제 눈에 안경이다. 완전한 객관인 세계는 없다는 말이다. 일수사견이란, 같은 물(), 그것을 보는 주체가 하늘이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물고기냐에 따라 네 가지로 보인다는 뜻이다. “하늘에서 물을 보면 유리로 생각하고, 사람이 물을 보면 물로 생각하나, 귀신이 물을 보면 불로 생각하며, 물고기가 물을 볼 때는 제가 살 집으로 생각한다. 이로써 비유한다면 제 각기 보는 바가 다르다는 법문이다.”라고 하였다. 사물을 제대로 본다는 것이 저렇게 어렵다.

우리의 눈을 의심하라. ‘몸이 천 냥이면 눈은 900이라는 속담이 있다. 심리학자들도 지각 형성의 73%가 시각에 의존한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로 눈은 의존도가 높은 감각 기관이다. 하지만 저 속담과 통계를 믿고서는 사물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쓰려면 우리의 눈을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한다.

 

어느 쪽이 더 길어 보이는가?

아래쪽이라고? 똑 같다. 못 믿겠으면 자로 재어보기 바란다. 눈의 착시현상이니 대단할 게 없다. , 제주도에 비탈 위로 물이 흐르는 있는 도깨비도로도 착시현상이잖은가. 우리가 눈을 믿지 말아야하는 이유이다.

직선을 그어보자.

……

혹 종이에 아래처럼 그리지는 않았는지?

상식이란 알아야겠지만 절대 고집할 것은 못된다. 직선을 잘못 그렸다. 위의 것은 직선이 아니라 선분이다. 선분은 아래처럼 선이 곧기는 하되,  A에서 B를 잇는다. 환언하면 한계가 있는 직선이란 뜻으로 유한 직선이라 한다.

   B

 

직선은 아래처럼 마냥 곧게 나간다. 끝이 없는 셈이다. 직선은 그냥 한정 없이 길어지는 곧은 금일 뿐이다.

 

A B

 

한정된 종이에는 결코 직선을 그릴 수는 없다. 우리는 이렇듯 선분을 그려 놓고 직선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삶이 마치는 날까지 그려도 결코 못 그리는 직선을, 선분 하나 그려놓고 잘 그렸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직선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선분을 그려 놓고는 직선의 진실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행동이 허다하다. 이 책을 쓰는 것도 동일하다. 내 힘껏 쓰고 다듬지만 독자들의 글쓰기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직선의 진실은 ‘AB’가 아닌, ‘AB’를 스치고 지나간 보이지 않는 곧은 선을 보아야만 얻는다. 보이지 않는  ‘AB’를 스치고 지나가는 선-. 한낱 우리의 육안으로는 결코 보지 못한다. ‘마음의 눈이 필요한 이유이다. 글쓰는 자에게 눈은 더 이상 얼굴의 소품이 아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직선의 곧은 선이 보인다.

접적시, 최고의 검객은 적의 칼끝을 보지 않는다. 상대방의 눈을 본다. 검객이 자기의 목을 겨눈 칼끝을 보지 않고 상대의 눈을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상대의 눈이 칼을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목을 향해 내려오는 칼날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손, 칼이라는 동선을 타고 내 목에 이른다. 마음이 칼의 가장 중심이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의 창인 눈을 봐야한다. 칼끝을 보는 순간, 상대방은 오간데 없고 목은 이미 상대방의 손에 있다. 칼이 글자라면 상대방 검객은 글자에 숨겨진 뜻이다.

척안은 뛰어난 안목이란 뜻이다. “석회는 물에 축축하니 젖어야 타고(石灰澆則焚), 옻칠은 축축한 속이라야 마른다.(漆汁濕乃乾)” 척안으로 세상을 본 정약용 선생의 <고시이십사수>의 한 구절이다. 어찌 젖어야 타고 또 젖어야 마르는가?

일상으로 척안을 돌려 본다. 송곳의 끝이 뾰족하다고? 그렇지 않다. 돋보기로 보면 뭉툭하다. 흔히 밤하늘의 별은 반짝인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반짝거리지 않는다. 1년은 365일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1년은 365.2422일이 맞다. 계이름 역시 그렇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우리 선조들이 쓴 궁상각치우는 무엇이란 말인가? 1에서 10의 중간은? 5가 아니라, 5.5가 맞다. 행복과 불행은 멀고 먼 관계? 아니다. 행복이라는 ()와 괴롬이라는 ()는 겨우 선 하나()’ 차이일 뿐이다. 순금은? 제 아무리 높아야 99.99%까지 밖에는 안 된다. 이 세상엔 어떤 물질이든지 100% 완벽하게 해당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관찰을 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관찰을 하면 파리 대가리나 모기 속눈썹도 본다. 척안이란 이렇듯 사물을 세세히 훑는 눈빗질이다.

망진은 의학 용어로 시진(視診)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사물을 관찰하는 마음의 눈이다. 즉 의사가 육안으로 안색과 눈, , , , 혀 따위를 살펴보고 그 외부에 나타난 변화에 따라 병의 증상을 진단하는 일이다. 글을 쓰려는 자라면 응당 사물을 망진할 줄 알아야 한다.

<매트릭스>는 이 5계를 정확히 관통하는 영화이다. 바로 사이비사와 마음이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시대의 화두인 시뮬라시옹부터 살펴야 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끄르가 작용하는 동사이다. ‘시뮬라끄르(프랑스어:simulacre, 영어:simulation)’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초과 실재로 모사본(模寫本)이다. 초과 실재, 즉 모사본이란 실재를 베꼈지만 결코 실재가 아니다. 바로 사이비사이다. 그런데도 이 시뮬라끄르인 모사본이, 때로는 실재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 현대사회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예언자 오라클은 주인공 네오에게 그노티 세아우톤(γνθι σεαυτόν)”너 자신을 알라임을 일러준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너는 마음의 감옥에서 태어났다라고 한다. 자신을 알고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깨어있으라는 주문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가상의 공간인 매트릭스요, 일상의 현실이 모두 거짓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안다는 것은 고통이다. 깨어있기 위해 네오는 목숨을 건 싸움을 한다.

빨간 약을 먹으면 우리는 집단 가사상태인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와 원본인 현실을 본다. <매트릭스>는 우리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 지배질서에서 잘 훈육된 자들이 서성거리는 가상과 실재 현실을 인식하려면 늘 깨어있어야 한다. 빨간 약을 먹으면 되지만 혼자만의 고독한 길을 순례자처럼 가야만 한다. 파란 약은 매트릭스다. 모든 것을 기계가 통제해 준다. 모든 사람들처럼 적당히 생각하고, 몸에 깊숙이 각인된 관습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산다. 내가 거울을 보지만 내가 없다. 몸과 마음이 조작된 일상 관습의 노예가 되어, 내 마음의 자유가 없는 감옥에 갇힌 것조차 모른다.

연암은 이미 이 시대의 화두인 시뮬라시옹을 저 시대에 말해 놓았다. ‘산수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 군이 바로 그것이다. 연암은 빨강 약을 복용하였다. 우리는 흔히 산수를 흡사하게 그려 놓으면 통상적 관념으로는 같다라는 말을 쓰는데, 단지 비슷한 것이지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시뮬라끄르와 원본은 다르다. ‘시뮬라끄르’, 즉 연암 글 속의 그림은 어디까지나 가짜다.

르네 마그리트, ‘금지된 복제(Reproduction Interdite)’

한 남자가 거울을 보나 거울 속에 얼굴이 없다. 그는 비슷한 가짜인 시뮬라크르의 눈만 지녔다. 시뮬라크르의 눈으로는 자기를 찾지 못한다. ‘파블로브의 개처럼 과거에 경험한 형식과 규범의 문화가 너무 몸에 젖어 조건반사 (conditioning)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경험한 문화 중, 대다수는 시뮬라크르임을 모른다.(시뮬라크르는 원래 플라톤이 정의한 개념이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원형인 이데아, 복제물인 현실, 복제의 복제물인 시뮬라크르로 나누었다. 여기서 현실은 인간의 삶 자체가 복제물이고, 시뮬라크르는 복제물의 재 복제이다.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3).ppt
1.8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