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미래를 읽다(7회)

2011. 12. 17. 17:47삶(각종 수업 자료)/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강의자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언젠가 써 놓은 글인데 심심풀이 삼아 읽어 보세요.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
내 공부가 짧아서인지 모르지만, 배울 만큼 배운 박사니, 교수니 하는 분들, 물질에 영예에 위선을 동무삼고, 더하여 네편내편을 갈라 서로 바라보지도 못하게 높다랗게 담벼락을 쌓아놓았더군요. 나보다 학문적 내공으로 보나 인생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열하고도 몇 뼘은 더 올라갈 분들이기에 한동안은 참 고민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써 놓은 그 아우라(Aura) 넘치는 글귀들, 하느님 버금가는 놓치기 아까운 말씀들, 그래 눈맛에 귀맛까지 여간 아닌 그 글과 행동이 영 각 따로이기에 말입니다. 세상의 풍화작용에 저 이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맥없이 스러지는 것을 목도함은 뒤늦게 공부의 길로 들어선 나에겐 더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書自書我自我)’라는 말을 알고는 고민에서 배추꼬리만큼 벗어났습니다. 그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몇 해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돌더군요.
요령부득이지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삶의 근간인 인문학이 부고장을 돌릴 판이니 살려달라는 소리 아닌지요. 한때 인문학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우리네 삶의 구원군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지마는 이미 과거지사입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인문학이나 인문학을 하는 사람을 더 이상 우리 사회의 해방군으로 보지 않습니다. 아니, 이제는 인문학자들의 자조(自嘲)와 자긍(自矜)의 자웅동체 용어 ‘남산골샌님’조차도 웃음가마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 내가 보기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교조적 지식의 마당쇠를 자임하고 나선 인문학자들이 더 이상 할 소리는 아예 아니라 생각합니다. 인문학의 위기를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은 개도 웃을 일이지요.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 아니던가요. '망진자 호야'란 진시황의 진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이 다름아닌 아들 호이기에 나온 말임. 진시황은 '진(秦)나라를 망하게 할 자, 호(胡)라는 예언을 듣고서 변방을 막으려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자식 호해(胡亥)였다.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7).ppt

 

블랙스완(Black Swan)은 검은 백조이다. 이미 18세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되었다. 검은 백조의 출현은 흰백조만을 보았던 모든 이들의 경험세계를 무참히 무너뜨렸다. 더 이상 백조(白鳥)는 이전의 백조가 아니다. ‘블랙스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극한값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에서 불가능하다고 인식된 상황이 실제 발생함이란 상징적 의미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을 몇 더 생각해 본다. ‘무무(無無)’. 없을 무()자 겨우 두 개 뿐이다. ‘없고 없다그렇다. 전혀 없다는 뜻이다. 한 번 더해보자. ‘없는 게 없다’. 정 반대의 뜻으로 모두 다 있다는 의미이다. 한 번 더해도 된다. ‘없고 없다는 없는 게 없다이다단 두 글자 무무의 묘의에서 얻은 해석이 저토록 다르다.

우리는 결코 내일을 만나지 못한다는 간단한 진실도, ‘내일이란 평범한 일상어를 곰곰 짚으면 얻는다. 택당 이식은 그의 택당선생속집5, <()>에서 솥에 하늘과 땅을 어떻게 넣어 끓이리요라고 하였지만, 도원(道原)이란 스님은 반 됫박 들이 솥에 하늘과 땅도 끓인다라고 한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파고들면 해석도 저렇게 다르다. 마음이 있어야만, ‘보인다보다눈여겨보다들린다듣는다귀담아 듣는다순으로 나아간다. 마음이 있어야만 눈여겨보고, 귀담아 듣는다.

중국의 비평가 김성탄은 이를 실천하여 나는 우리 집 마당에서 세상을 본다라고 하였다. 꼭 현장경험(Field Work)을 해야만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겠다는 마음자리, 그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또 보면, 안마당의 흙이 이웃 마을과 통하고 산을 넘어 다시 이웃 마을로, 이웃 마을이 이웃 나라의 국경을 가볍게 넘어선다.

푸른 까마귀라는 어휘에 주목해 본다. 글쓰기는 직관과 감정으로 승부하는 과학이 아니다. 글쓰기는 어휘를 통한 사고의 과정이기에 반드시 언어인식을 수반한다. 언어인식이란 눈으로 복제된 사물을 마음으로 재복제하는 수순을 밟는다. 눈이 선수(先手)라면, 마음은 후수(後手)이다. 선수는 후수를 당기고, 후수는 선수를 이끌어야 한다. 언어인식을 향상처럼려면 선수와 후수를 잇는 것은 어휘력을 증진해야 한다. 사물은 눈으로 보지만, 이를 정리하는 것은 어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붉다, 불그죽죽하다, 불그레하다, 발그족족하다, 빨그족족하다, 벌그스름하다, , 따위, 어휘가 풍부할수록 표현이 정확해진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어휘력의 신장이야말로 오이 붇듯 달 붇듯 문장력을 키워준다. 어휘력을 좀더 확장하기 위해서는 흔히 직간접 경험의 확충을 요구하는 사고의 영토를 넓혀야 한다. 새로운 정보가 이미 저장된 정보를 자극하고, 인식과 사유의 수준을 상승하는 역동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해서이다. 이때 연상 작용은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적절한 도움을 준다.

공자와 제자 자공의 대화부터 보고 연상 작용도 살핀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좋구나.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함만은 못하구나.”

 

자공은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제자의 이 말을 그대로 받아 아첨즐거움으로, ‘교만예를 좋아함으로 슬쩍 고치고, ‘것만은 못하구나(未若)’를 덧붙였다. 몇 자의 글자만을 바꾸었을 뿐인데, 자공과 공자의 학문적 깊이가 현격히 드러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공은 가난한 자는 아첨하고 부한 자는 교만한 것을 보고 ‘~않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돌려 생각한다.

반면 공자는 가난한 자아첨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얻은 것은 즐거움이다. ‘부한 자교만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를 찾았다. 자공이 가난한 자아첨, 부한 자교만이라고 생각한다면, 공자는 가난한 자아첨즐거움, 부한 자교만예를 좋아함으로 한 단계를 더 나아간 셈이다. 여기에 다시 만은 못하구나(未若)’라는 비교 부사격을 써서 즐거움예를 좋아함을 강조한다. 이를 연상 작용이라 한다.

이렇듯 한 단어가 지닌 여러 가지 함축적 의미를 떠올림을 연상 작용이라 한다. 이런 작용을 연속적으로 또 다른 단어로 연결시켜 나아갈 때, 연상을 조직화한다. 결국 연상 조직이란, 동시 다발로 함축 내용을 선별해서 조직해 나가는 사고의 확장 과정이 된다. 이러한 과정은 저장된 이전 지식을 기억해 내는 정신적 활동이다. 기억해 낸 개념들이 연결되며, 다른 개념과 만남을 꾀한다. 다른 개념과 만남은 새로운 낱말에게 연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공작관기>에서 연암은 다음처럼 색깔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무릇 색깔이 빛을 낳고, 빛이 빛깔을 낳으며, 빛깔이 찬란함耀을 낳고, 찬란한 후에 환히 비치게되니, 환히 비친다는 것은 빛과 빛깔이 색깔에서 떠올라 눈에 넘실거려서이다. 그러므로 글을 지으면서 종이와 먹을 떠나지 못한다면 아언(雅言:정확하고 합리적인 말)이 아니고, 색깔을 논하면서 마음과 눈으로 미리 정한다면 정견(正見:바로 봄)이 아니다.(夫色生光 光生輝 輝生耀 耀然後能照 照者 光輝之泛於色而溢於目者也 故爲文而不離於紙墨者 非雅言也 論色而先定於心目者 非正見也)

 

이러한 언어인식을 얻으려는 방법을 김조순 선생에게 도움 받자면 고심으로부터 시작한다. “무릇 고심하면 반드시 생각이 깊어진다. 깊이 생각하면 반드시 이치가 해박해지고, 이치가 해박하면 반드시 말이 새로워진다. 말이 새로워지고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면 공교해지고, 공교해지고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면 귀신도 두려워할만하게 되고 조화가 옮겨온다.”(풍고집(楓皐集)16, ‘잡저’, <서금명원경독원미정고후(書金明遠畊讀園未定稿後)>)라고 한다. 김조순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문장가다. 저 고심이 없다면 새로운 언어는 없다. 연암의 글에서 고심의 그 구체적 어휘가 창오가야(蒼烏可也)’ 푸른 까마귀라도 괜찮다이다.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기는 이렇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다. 점심도 먹지 않고 일을 하였지만 오늘도 친구 나무꾼의 짐이 반 자는 더 높다. 늘 그러하듯 친구 나무꾼은 점심을 먹고 한동안 쉬며 도끼날이나 갈자고 한다. 하지만 나무꾼은 친구 나무꾼을 이겨보려고 바쁘다며 온종일 도끼질을 쉬지 않는다. 허나 결과는 역시 같았다. 이유야 번연한 것, 무딘 도끼날로 온종일 수고를 한들 날선 도끼를 당하지 못한다. 글쓰기도 같은 이치이다. 글에서 날이 선 도끼는 어휘와 구체성이다.

사물을 바꾸어 생각해보기는 연암의 글에서 넉넉히 찾는다. 연암은 종종 이 방법을 사용하여 글을 구상하는데 여간 흥미롭지 않다. 하루는 빗줄기가 하염없이 처마를 내리는 봄날이었다. 연암은 대청마루에 쌍륙(雙六)을 펼쳐놓고 놀이를 한다. 쌍륙은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가지고 차례로 주사위 둘을 던져서 나는 사위대로 판에 말을 써서 먼저 궁에 들여보내는 놀이이다. 혼자 할 놀이가 아닌데도 한참을 그러더니, 이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사흘간이나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어여쁜 살구꽃이 모조리 떨어져 마당을 분홍빛으로 물들었습니다. 나는 긴 봄날 우두커니 앉아서 혼자 쌍륙놀이를 하지요.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다섯이야! 여섯이야!’ 소리칩니다. 그 속에 나와 네가 있고 이기고 짐에 마음을 쓰니, 문득 상대가 있고 짜장 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내 두 손에게도 사사로움을 두는 건지. 내 두 손이 갑과 을로 나뉘었으니 사물이라 할 수 있고 나는 그 두 손에게 조물주의 위치입니다. 그렇건마는 사사로이 한쪽 손을 편들고 한쪽 손을 억누름이 이렇습니다.

어제 비에 살구꽃은 모두 떨어졌지만, 꽃망울을 터뜨릴 복숭아꽃은 이제 화사함을 뽐내겠지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물주가 복숭아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움을 두어서인지.”

연암은 잡기놀이에서 글을 구상하였다. 왼손과 오른손을 복숭꽃과 살구꽃으로 처지를 바꾸어 생각했다.

동물의 처지에서 인간을 생각해 보기도 흥미롭다. 자신이 고양이를 싫어한다면, 자신이 고양이의 처지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본의 대표작가 나쯔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에서 인간을 묘사한 부분은 꽤 흥미롭다.

인간이란 동물은 사치스럽다. 발이 네 개 있는데도 두 개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사치다. 네 발로 걸으면 그만큼 빨리 갈 텐데, 언제나 두 발로만 걷고, 나머지 두 발은 선물 받은 말린 대구포처럼 하릴없이 드리워 우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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