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도법(春花圖法) 사랑은 방안에 있다

2011. 12. 9. 14:53삶(각종 수업 자료)/고전에서 미래를 읽다 (강의자료)

날씨가 추웠는데도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춘화도법(春花圖法) 사랑은 방안에 있다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6).ppt

 

 

그리지 않고 그린 것을 읽어라. 김득신金得臣, 1754~1822<반상도班常圖>를 읽어 보자.

반상도班常圖김득신金得臣, 1754~1822

 

양반과 상민이 대조적이다. 말 위에 점잖 빼고 앉으신 양반종(兩班種) 어르신 말고는 모두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이다. 전모를 쓴 저 여인 두 손 모아 절하고, 그 옆의 사내는 죽을죄를 지어 마당꿇림이라도 당하는지, 아예 땅에 코를 박고 맨 뒤에 남정네는 허리가 휘었다. 양반종을 제외하고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하기야 지금도 이러구러 사는 이들이 저때보다 적다곤 못한다.

이해를 더하기 위하여 박제형(朴齊炯, 朴齊絅)조선정감朝鮮政鑑을 인용해 본다.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연암의 <양반전> 첫 머리에 나오는 사족이다.

 

선비로서 네 당파의 자손들은 비록 글을 몰라도 스스로 사족(士族)으로 행세하며 마을에서 제 멋대로 행동한다. 시골 백성을 억압하여 밭을 갈지 않고 베를 짜지도 않으면서 의식이 풍족하다. 모두 백성들의 살림을 박탈해서이다. 평민이 사족의 노여움을 사면 종을 보내 묶어다가 채찍으로 고문하며 오형(五刑)을 갖추기도 하는데, 관가에서는 금지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인 양 보아 넘긴다. 백성으로서 사족을 욕한 자가 있으면 관에서 보내는 율법을 매기고 심하면 사형에도 처하기도 하니, 백성이 사족을 두려워하여 귀신같이 섬긴다.

 

조선에는 양반종이라는 별종이 낮은 백성을 죽이고 살리는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저렇게 쥐었다. 오죽하였으면 사보두청이라는 말이 있을까. 사보두청은 사포도청(私捕盜廳)’으로 개인포도청이니, 권세 있는 집에서 백성을 함부로 잡아다 사사로이 처벌함을 빈정거리는 말이다.

춘화도는 조선후기에 진경산수화와 함께 정조 연간에서 순조까지 그 절정기를 이루었다. 김홍도(金弘道, 1745~?)신윤복(申潤福, 1758~?) 같은 여러 작가들이 그린 이 춘화도는 민중의 삶과 체취가 물씬 풍기는 풍속화였다. 특히 19세기 풍속화에서 성희性戱를 직설로 담은 춘화첩도 유행하였는데, <광한루기> 소설평은 춘희의 도색桃色 유희遊戱인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은은한 멋을 담은 뜻을 그림 속에 저며 둔 화폭이다. 대상도 논다니가 아니라, 기품과 맵시 있는 여염집 여인들이었다.

구한말의 유명한 화가 허소치許小痴를 고종이 불렀다. 고종은 그를 골탕 먹이려고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춘화도를 한 장 그리라한다. 얼마 후 소치는 이런 그림을 올렸다. 깊은 산 속 외딴 집, 섬돌 위에 남녀의 신발 두 켤레가 나란히 놓였다. 환한 대낮, 닫힌 방 안의 진진한 일은 알아서 상상하옵소서라는 재치이다. 14계에서 본 입상진의(入象盡意)를 이용한 그림이다.

 

<춘화도>

춘화도는 남녀 간의 운우지정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이 그림처럼 밀애의 현장성을 감상자의 안목에 맡긴 화폭도 있다. 댓돌 위에 있어야 할 신발이 마루에 올라와 있으니 야릇한 관계일시 분명하고 큰 방석은 앉은 이가 서둘러 일어났는지 비뚜름하다. 두 남녀의 춘정春情이야 마루 왼편의 발그레한 춘화春花로 보암보암 눈짐작이 되니, 이제 눈썹달이 침침이 내리비치는 야밤이나 창호窓戶에 여명 우려든 새벽녘까지의 방안 풍경은 온전히 감상자의 몫이다. 저 방안에 능갈치는 사내와 하느작거리며 교태부리는 여인이 있다 한들 어긋남이 없으리라.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식 글 읽기란 이렇다. 디지털(digital)이 측정량을 불연속 수치로 표시한다면 아날로그(analogue)는 연속된 물리량으로 나타낸다. 문자판에 바늘로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 수은주의 길이로 온도를 나타내는 온도계 따위가 아날로그이다. 따라서 아날로그는 유추진실 탐구가 선행해 한다. 재단(裁斷)이 아니라 전체의 문맥 속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요, 그리지 않고 그리기이니, “산은 끊어져도 구름 속에 봉우리는 이어진다.(山斷雲連)”는 경구를 새겨들어야 한다.

 

○○(((()을 단순히 소리, , 마음, 뜻으로 이해해선 안 됨을 짚으며, 연암의 글 중 소리와 정만 좀 더 살핀다. 구체적으로 자연의 소리와 일상의 소리로 나뉜다. 자연의 소리로는 ()물소리, 빗소리, 물결소리, 메아리, 바람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 매미소리, 기러기소리 따위이고, 일상의 소리로는 다듬이소리, 웃음소리, 이야기소리, 기침소리, 신발 끄는 소리, 노랫소리, 닭 우는 소리, 코고는 소리, 풍악소리, 도장 찍는 소리 등이 보인다. 이 모든 소리들은 글 속에서 청각을 자극하여 정감을 고취처럼이거나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등 글의 분위기에 제 역할을 한다. 연암의 <열녀함양박씨전 병서(烈女咸陽朴氏傳 幷書)>16계를 마친다.

 

혈기가 때로 왕성해지면 과부라 하여서 어찌 정욕이 없겠느냐? 가물가물한 등잔불이 내 그림자를 조문이라도 하듯, 고독한 밤에는 새벽도 더디 오더구나. 처마 끝에 빗방울이 똑똑 떨어질 때, 창가에 비치는 달이 흰빛을 흘리는 밤 나뭇잎 하나가 뜰에 흩날릴 때나, 외기러기가 먼 하늘에서 우는 밤 멀리 닭 우는 소리조차 없고, 어린 종년이 코를 깊이 고는 가물가물 졸음도 오지 않는 그런 깊은 밤에 내가 누구에게 이 괴로운 심정을 하소연하겠느냐?”

 

연암이 그려낸 과부의 방안 정경이다. 이 짧은 글 속에 성색정경이 모두 들었다. 빗방울소리, 나뭇잎소리, 외기러기소리, 종년의 코고는 소리에 치마끈을 동여매는 과부의 슬픔이 응결진다. 성이다. 정은 이 소리 속에 들어 있는 정욕을 참아내는 인고(忍苦)이다. 색은 달이 흰빛 흘리는 밤에서 찾고, 경은 바로 수절하는 과부의 마음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며 저 성색정경을 지나침은 과부의 슬픔도 수절의 뜻도 모름이니, 글을 읽기는 했으되 글을 읽지 않음만 못하다.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무심히 스님 얼레빗질하듯 글자만 훑었으니 소설의 주제도 영판 잘못 짚는다. <열녀함양박씨전 병서>의 주제는 함양박씨를 열녀로 기림이 아니다. 과부에게도 여성으로서 성욕이 있음과 열녀제도의 모순에서 찾아야한다.

<덴동어미화전가>로 마음()을 한 번 더 짚는다. 덴동어미는 마음이 그 이유라고 답한다. 마음을 도스르고 아래 글을 읽는다면 덴동어미의 메나리조의 신산한 서글픔이 보인다.

 

고운 꽃도 새겨보면, 눈이 캄캄 안 보이고/귀도 또한 별일이지, 그대로 들으면 괜찮은 걸/

새소리도 고쳐듣고, 슬픈 마음 절로 나네 /마음 심자가 제일이라, 단단하게 맘 잡으면/

꽃은 절로 피는 거요, 새는 예사 우는 거요/달은 매양 밝은 거요, 바람은 일상 부는 거라/

마음만 예사 태평하면, 예사로 보고 예사로 듣지/보고 듣고 예사하면, 고생될 일 별로 없소/

 

참고로 유음()이나 비음(··), 모음으로 끝내면 글이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보다는 더군다나등으로.

소리()를 좀 더 살핀다. ‘성무애락, ‘소리에는 슬프고 기쁨이 없다이다. “꽃이 난간 앞에서 웃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고, 새가 수풀 아래서 우는데 눈물은 보기 어렵구나(花笑檻前聲未聽 鳥啼林下淚難看)라는 시구를 좀 보자. ‘꽃은 웃는다하였고, ‘새는 운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정녕 꽃이 웃고 새는 우는가? 아니면 관습적으로 꽃이 웃고, 새가 운다고 하는 것인가?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에서 혜강(嵆康, 223~262)音樂(음악)에는 哀樂(애락)이라는 인간의 감정이 담겨져 있지 않다라고 한다. 혜강의 말을 이해하려면 오감을 살펴야 한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사물을 인지한다. 문제는 시각미각촉각후각청각 중, 지나치게 시각을 중요시한다. 보이지 않음은 믿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부지불식중에 관습화되어서다.

태초에 청각이 역사를 시작했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발언이다. 인간 역사를 기록한 언어, 즉 말과 글 중 시작은 말이기 때문이다.성서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기록한다. 시각미각촉각후각은 드러나지만, 청각만큼은 보지도, 맛보지도, 느끼기도, 만지지도, 못한다. 이 모자란 부분을 채우려면 잘 들어야 한다. 청각의 ()’은 유심히 들으라는 뜻이다. 청약불문(聽若不聞), 혹은 청이불문(聽而不聞)이란 말도 그렇다. 듣고도 못 들은 체한다는 의미이다. ()은 가려듣는 게요, ()은 저절로 들려오는 소리다. 분명이 들려오지만(), 가려들었다.()는 의미가 청이다.

자세히 들으면 들리는 것을, 편하게 눈으로만 찾으려드니 들리지 않는다. 저런 성의 없는 행동이라면, 아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니 귀밝이술을 먹은들 소용없을 것이지만. 글 쓰고자 하는 이, 청각을 오감의 우듬지에 둘 때, 새로운 세계를 본다는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다시 혜강의 말을 본다. ‘음악에 슬픔과 기쁨이 없다’, 번역을 하자면 마음으로 듣는 음악의 오르가즘이다. 혜강이 말한 요체는 인간의 마음에 애락이 있다이다. 이 장의 끝에 일부를 새겨 둔 연암의 <일야구도하기>와 유사한 견해이다. 혜강의 처지로 본다면 새가 운다는 것은, 그저 짐승의 목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목 울림에 인간적 고뇌와 애락을 담아 읽는 인간이 주제넘기도 하고, 자못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듣는 이가 슬프면 슬프디 슬픈 구성진 <춘향가>의 옥중가 가락처럼 들릴 것이요, 기쁘면 자진모리장단 휘몰아치는 이몽룡 어사출또 장면처럼 들리지 않겠는가.

여기서 음악은 우리에게 그냥 듣는 것과 주위 깊게 듣는 것을 구분하도록 한다작곡가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말에 주의해야한다. 주위 깊게 들으면 들리는 것이 새롭기 때문이다.

<성무애락론>과 유사하지만 다른 견해를 펴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 조선후기 문인 이옥(李鈺,1641~1698)<개구리 울음을 읊은 부의 후편(後蛙鳴賦)>이란 소품이다. 이 글을 보면, 주인은 개구리 울음에 감정이 들었다하고, 객은 개구리 울음에 감정이 없다고 다툰다.

주인, 누구의 말이 옳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옥이란 이를 잠시 마주해야 한다. 이옥은 1790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5, 응제(應製, 임금의 명에 따라 시문을 짓던 일.)의 표문에 소설 문체를 썼다는 이유로 충군(充軍, 조선시대에, 죄를 범한 자를 벌로서 군역에 복무하게 하던 제도. 신분의 고하와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는데 대개 천역인 수군이나 국경을 수비하는 군졸에 충당했다.)의 벌을 받았다. 18002월에 완전히 사면되었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하고 불우한 생활을 한다. 사실적이면서 나른한 정감의 글쓰기를 중시하는 그는 매우 개성 있는 시와 산문을 남겼다. 그의 <독주문讀朱文>이란 글을 보고 논의를 잇자.

 

주자의 글은 이학가가 읽으면 담론을 잘하고, 벼슬아치가 읽으면 상소문에 능숙하고, 과거시험 보는 자가 읽으면 대책문에 뛰어나고, 촌사람이 읽으면 편지를 잘 쓰고, 서리가 읽으면 장부정리에 익숙해진다. 천하의 글은 이것으로 족하다.”

 

<독주문>이란, ‘주자의 글을 읽다이다. 주자(朱子, 1130~ 1200)가 누구인가.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로 조선 500년간 그토록 숭앙해 마지않았던 송대의 유학자다. 그의 말은 조선 유학자들에게 교리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자칫 그의 심기라도 거슬리면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했다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린다. 숙종 때의 대학자인 윤휴(尹鑴)조차 유교 경전을 주자의 견해대로 따르지 않는다하여 사문난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런 주자의 글을 두고 담론이나 잘하고, 상소문이나 잘 짓고, 대책문에 뛰어나게 된다는 말도 일종의 폄하인데, 나아가 촌사람은 편지를 잘 쓰게 되고, 서리는 장부정리에 익숙해진다고까지 한다. 유교의 도리로 조심성 있게 모실 주자의 글을 일상적 유용함에 갖다 붙이니, 모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렇게 이옥은 전범적 문장 일체를 부정하며 자신이 사는 시대에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언어창출을 추구하고 싶었다.

<개구리 울음을 읊은 부의 후편>에서 이옥의 견해는 주인이다. 이옥은 당연히 개구리 울음에는 감정이 있다한다. ‘은 개구리의 울음에 감정이 없다고 맞받는다. 개구리는 소리만 낼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므로 개구리의 울음에는 뜻이 없다는 것이 객의 주장이다.

이옥은 그가 살던 시대를 고통으로 일관한 이이다. 고통의 심정으로 잉태한 문학이니, 하찮은 개구리 울음일망정, 자신이 글자마다 행간마다 내면의 소리가 배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같은 소리건만 혜강과 이옥이 저렇고 이렇게 다르다. ‘혜강이 맞다’, ‘이옥의 견해가 그르다’, ‘아니 그 반대다는 이 글에서 시비할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일한 사물과 현상을 바라봄이 이토록 다름을 아는 일이다.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일야구도하기>는 연암의 글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을 모은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에도 실렸다. 원문이 길므로 그 일부만 싣는다.

 

나는 문을 닫고 드러누워 냇물 소리를 구별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 깊숙한 솔숲에서 울려나오는 솔바람 같은 소리, 이 소리는 청아하게 들린다. 산이 쪼개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이 소리는 격분해 있는 것처럼 들린다.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 소리는 교만한 것처럼 들린다. 수많은 축()이 번갈아 울리는 듯한 소리, 이 소리는 노기에 차 있는 것처럼 들린다. 별안간 떨어지는 천둥 같은 소리, 이 소리는 놀란 듯이 들린다. 약하기도 세기도 한 불에 찻물이 끓는 듯한 소리, 이 소리는 분위기 있게 들린다. 거문고가 궁조(宮調)우조(羽調)로 울려 나오는 듯한 소리, 이 소리는 슬픔에 젖어 있는 듯이 들린다. 종이 바른 창문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 이 소리는 의심을 품은 듯 들린다. 그러나 이 모두가 똑바로 듣지 못한 것이다. 단지 마음속에 품은 뜻이 귀로 소리를 받아들여 만들어 낸 것일 따름이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무렵이다.

바야흐로 한여름의 뙤약볕 밑을 지척지척 걷는데, 홀연히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아 붉은 물결이 산 같이 일어나서 끝이 안 보였다. 아마 천 리 밖에서 폭우로 홍수가 났기 때문인 듯하다. 물을 건널 때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해 묵도를 올리려니 했다.

한참 뒤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 때 내 생각은 틀렸다.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탕탕(蕩蕩)히 돌아 흐르는 물을 보니, 굼실거리고 으르렁거리는 물결에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갑자기 현기중이 일면서 물에 빠질듯하여 얼굴을 젖혔으니, 하늘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물을 피하려는 심사이다. 사실 목숨이 위태로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기도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건 그렇고, 그 위험이 이러한데도 이상스럽게 물이 성나 울어 대진 않았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요동의 들이 널따랗고 평평해서 물이 크게 성나 울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은 물을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 나온 오해이다. 요하가 어찌하여 울지 않겠는가? 그건 밤에 건너지 않아서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보니, 그 위험한 곳을 보는 눈에만 온 정신이 팔려 오히려 눈이 있음을 걱정해야만 할 판이다. 무슨 소리가 귀에 들려오겠는가. 그런데 이젠 낮과는 반대로 밤중에 물을 건넌다. 눈엔 위험한 광경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위험한 느낌이 쏠리니 귀로 들리는 물소리가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

, 나는 그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와 귀와 눈이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됨을 깨달았다.

나를 시중해 주던 마부가 말한테 발을 밟혀 그를 뒷수레에 실었다. 내 손수 말의 고삐를 붙들고 강 위에 떠 안장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모아 앉았다. 한 번 말에서 떨어지면 곧 물이다. 거기로 떨어지면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性情)을 삼으리라. 이러한 마음의 판단이 한 번 내려지자, 내 귓속에서는 강물 소리가 마침내 그치고 만다.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하니, 마치 방 안의 의자 위에서 앉아있고 기거하는 듯했다.

 

연암은 뒤를 이렇게 잇는다.

소리와 빛은 모두 외물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눈과 귀에 누가 되어 보고 듣는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사물조차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한 인생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들음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 될까?”

연암은 이렇듯 넘실거리는 강물을 변용시켜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우리의 인생도 잘 보고, 잘 듣는데 있지 않을까? 글을 쓰려는 이라면 마땅히 성생정경으로 만물을 읽어야 한다. 저 위에 적어 놓은 총명한 삶은 덤이다.

 

일세일장(一歲一章) 한 해는 한 악장이다

홍길주는 글자가 살아있다고 하였다. “천지 사이에 늘 살아 있어 죽지 않는 것은 오직 문자뿐이다.늘 큰 도시의 시장에 가보면 천만 사람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데 마치 제자백가들이 글을 펼쳐놓아 읽는 것 같다.”(<제자휘서(諸子彙序)> 많은 이들은 이렇듯 살아 있는 글자를 책상에 앉아 밋밋이 읽어만 댄다.

음악은 앞 계에서도 일별하였지만 글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공부의 종주국 중국을 만들어 놓은 공자께서 대단히 음악을 즐겼으니, 이 분 말씀도 들어본다. 그는 음악으로 덕을 배양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국가를 통치할 적에는 순임금의 음악인 소()를 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순임금이 태평성대를 이끌었으니 그 음악도 당연히 좋다는 연계론이다.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을 듣고는 어찌나 좋은지 삼개월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고도 한다.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을 참으로 아름답고 또한 참으로 훌륭하다라고 하였지만, 혁명을 통해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의 음악은 참으로 아름다우나 훌륭함을 다하지는 못하였구나라고 한다. 주나라 무왕이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순임금의 음악과 무왕의 음악을 듣지 못하기에, 공자의 말씀처럼 음악에 그 주인들의 덕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공자처럼 음악으로 국가를 통치하고자 한 이가 또 있었다. 세계사 속에서 악역을 자임했던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1889~ 1945)이다. 그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음악을 틀어놓고 폭격 명령을 내렸다. 게르만의 서사시와 음률을 바탕에 깐 바그너의 음악과 게르만주의를 외친 히틀러는 궁합이 잘 맞았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리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라는 오페라를 들으며 폭격명령을 내렸고, 유태인 학살 장소인 아우슈비츠의 형무소에서도 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 이유로 유태인들은 지금도 바그너의 음악을 금지한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음악(音樂), 누군가에겐 어지러운 소리인 음악(淫樂)’된다는 예를 히틀러가 보여줬다. 자신의 음악(音樂)음악(淫樂)’으로 변한 바그너의 심기가 불편할 듯하다. 바그너가 게르만주의를 그의 음악에 담았을지언정, 히틀러와 같은 행동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지만 말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음악은, 누군가에게 더 이상의 음악이 아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淫樂)이다. 이와 상반하는 경우도 있다.

천 곡의 악곡을 연주해 본 뒤라야 소리를 깨닫고 천 개의 검을 본 뒤라야 보검을 안다.(凡操千曲而後曉聲 觀千劍而後識器)” 문심조룡(文心雕龍)48<지음(知音)>에 보이는 말이다. 음악(音樂)과 음악(淫樂)을 제대로 읽으려면 책을 두루 보는 박문(博觀)의 자세가 필요하다. 박문이야말로 깊이 있는 감상으로 이끌어준다. 문심조룡은 유협(劉勰)이 지은 중국 최고 문학이론서로 문심이란 글을 쓰는 마음이요, ‘조룡은 글 꾸밈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곡은 21000여 곡이 넘는다. 그중 널리 알려진 곡만 짚어도 시벨리우스의 <폭풍우>, 쇼스타코비치의 <멕베스 부인>,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그리고 베르디의 장엄한 오페라 <오셀로>와 프로코피예프의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 등이 모두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파생하였다.

그러니 책도, 음악도, 세상일도 잘 읽을 일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으로 읽듯, 독서도 글쓰기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된다. 일제치하의 친일 문학가, 독재정권에 아부하는 글들이 바로 저 히틀러의 후예들 아닌가? 문장이 좋다고 내용이 훌륭한 글도 아니고, 이 시절에 훌륭하다 치하를 받은 글을 후일 휴지통에서 찾게 된다.

학생들의 조별 발표시간에 똑같은 장면을 음악만 바꾸어 보여주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음악이 바뀔 때마다 장면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작품 이해에 청각이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큼을 알았다. 우리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연암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는 많은 도움을 준다.

광한루기소엄주인이 구체적으로 소설을 읽는 수용론자의 태도를 적은 비평어로 가득찼다. 조선 후기 한글춘향전이 너무 요야하다며 한문으로 지은 광한루기속의 비평어들은 당시로서는 꽤 소설을 가치 면에서 고급 문학의 위치로 패러다임을 변화하려 한다. 소엄주인은 <광한루기 독법>에서 소설 독법으로 기격론을 든다. 이 용어는 당시에 널리 퍼진 시론(詩論)이며 동시에 화론(畵論)이기도 하다.

소엄주인은 이 넉 자로 작품을 읽어냈으니, 부연하자면 소설(문학)과 음악미술을 아우르는 예술의 총체로서 소설을 인식한 비평어라고 할만하다.

이 독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각조기론

2

청각조운론

3

시각조신론

4

시각(촉각)조격론

 

, 거문고, , 꽃이라 것은 모두 독서 상황을 말한다. , 거문고, , 꽃이 직접 독서물 그 자체는 아니나 독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각기 다른 저러한 독서 상황에서 글을 읽기에 응당 독서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술 한 잔을 거나하게 하고 읽는 <춘향전>과 맨 정신으로 읽는 <춘향전>이 같을까? 음악을 연주하며 <돈키호테>를 보고,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 필 무렵>, 또 꽃구경을 하며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읊조린다면?

모르긴 몰라도 미각, 시각(촉각), 청각이 자연과 교감을 통한 정신적 흥취를 돋우는 가운데 책을 읽는다면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수입종 언어를 당겨오자면, 책 속의 글자 그대로는 텍스트(text)이고, 사정이나 형편은 컨텍스트(context)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랑한다라는 말을 이몽룡이 그네 뛰는 춘향이에게 할 때와 헤어지는 날 한 것은 같으면서 다르다. ‘사랑한다는 말은 텍스트로 같지만, 문맥환경(컨텍스트)은 영 딴판이다. 만날 때의 사랑한다는 아름답게 들리겠지만, 헤어질 때의 사랑한다는 춘향의 눈물만 흘리게 하는 가혹한 소리일 뿐이다. 상황이 다르면 문맥도 다르다.

이제 을 보자. 이 용어는 독성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술 마시며 읽으면 기를 돕고, 거문고를 타면서 읽으면 운을 돕고, 달을 마주하고 읽으면 신을 돕고, 꽃을 구경하면서 읽으면 격을 돕는다.(宜飮酒讀可以助氣 宜彈琴讀可以助韻 宜對月讀可以助神 宜看花讀可以助格)”라는 뜻이다. ‘은 우리의 한문소설광한루기에 보인다.

다시 다산의 시 한 수를 읊어보자.

 

소나무 단에 하얀 돌 평상은, 松壇白石牀

바로 내가 앉아 거문고 타는 곳. 是我彈琴處

산객은 거문고 걸어두고 가버렸지만, 山客掛琴歸

바람이 불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구나. 風來時自語

 

소나무 아래 하얀 돌 평상에 앉아 다산이 거문고를 탄다. 얼마쯤 흘렀을까. 다산은 거문고를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내려온다. 산바람이 와서 거문고를 스치고 지나간다. 휘잉! 거문고 소리가 다산의 걸음을 따라 나선다. 멋진 시다. ‘의 거문고를 타면서 읽으면 운을 돕는 격이다.

술로 건너간다. ‘에서 술 마시며 읽으면 기를 돕는다고 한다. 소동파는 시 <동정춘색(洞庭春色)>에서 술을, “응당 시를 낚는 낚시라 부르고, 또한 시름을 쓰는 비라 부르리라고 한다. 소동파의 저 말이 이 기격를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나 기격이 독서 감흥을 낚는 낚싯대로 쓰인 것은 틀림없다.

만해 선생의 <춘주春晝>라는 연시조다. 풀이하면 봄날의 낮정도의 의미이다.

 

따스한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춘주2수 중, 1수이다. 한용운 시전집에는 춘화(春畵), 그림 같은 봄날이라고 하였다. ‘봄날의 낮이든, ‘그림 같은 봄날이든, 만해 선생의 깨달음의 세계를 읊은 선시임엔 틀림없다. 나른한 졸음이 오는 봄날의 한낮. 만해 선생이 따스한 봄볕을 등에 지고 불교의 경전인유마경을 읽는다. 어디선가 팔랑, 봄꽃이 날아와 유마경한 글자 위에 앉는다. 만해는 구태여 꽃 밑의 글자를 읽을 필요 없다고 한다. 어찌 유마경속에 진리가 있겠느냐는 깨달음이다. 선가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보면 경전은 휴지조각과 같은 무용지물이라 한다. 나른한 봄날의 볕, 어디선가 날아 온 꽃 잎 한송이가 깨달음의 세계로 만해를 이끌었다. 이 또한 기격의 독서이다.

김만중 선생은 글을 악기에 견주었다. 구운몽을 짓고 우리말을 사랑한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글을 악기에 견주어 매우 흥미로운 견해를 편다. 서포는 문장이란 금죽이란 악기와 같다. 그 소리는 서로 아우를 수가 없으니 각기 특이한 경지가 있어서다. 만약 아우르면 반드시 제 소리를 이룰 수 없다.(文章如金石絲竹 其聲不能相兼 而各有所至 苟欲兼之 則亦未必成也)”(서포만필)라고 한다. 제 각각의 악기 소리가 다르듯, 글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 소리를 내라는 뜻이니, 독성 또한 제 각각 달라야함을 서포 선생의 이 글에서 읽는다.

중국의 소설가 겸 문명비평가 임어당(林語堂)의 말로 끝맺자.

 

청년 시절 독서는 문틈으로 달을 바라봄이고, 중년 시절 독서는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봄이요, 노년 독서는 창공 아래 정자에 올라 달을 바라봄이다. 책을 읽는 깊이가 체험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어휘 만들기 리포트를 학생들에게 내주었다. 글쓰기에서 언어의 조합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내준 리포트인데, 영역을 전이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학생들의 발상이 꽤 신선하고 재치 있다. 아래는 서울교육대학교와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만든 새로운 어휘들이다.

 

날짜알람시계: 생일이나 중요 날짜를 알려주는 시계.

스타킹양말: 스타킹이되 발목까지는 양말.(스타킹이 너무 얇아서 발이 아프기 때문)

과외팰리스: (과외+부자들이 산다는 타워팰리스) 과외를 많이 해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학생.

셤파라치: 시험 정보를 잘 캐내오는 학생.

학점홀릭: 학점 따기에 중독이 된 학생.

숙티즌: 인터넷에 숙제 찾으러 들어 온 네티즌을 지칭.

티쳐보이: 마마보이처럼 과외 선생님에게 학업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학생.

과제테인먼트: (과제+앤터테인먼트) 과제를 오락처럼 줄기면서하기.

청개구리족: 사회에 반감을 가지고 위법행위를 일삼는 사람.

스투던쳐: (student + teacher) 과외나 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대학생.

머니즘: 물질만능주의

안티플러: 리플에 안티글을 쓰는 사람들

다이어트닥터: ‘다이어트치료 따위로만 밥을 먹고 사는 의사를 비아냥거리는 용어.

샐러리던트: (salaried man + student). 회사에서 명퇴 안 당하려 퇴근 후 공부하는 직장인.

간장남: 된장녀의 반대로 짠 구두쇠 남성을 지칭.

매지컬: (매직 + 뮤지컬). 마술과 뮤지컬을 혼합한 장르.

배타걸: ‘알파걸에 가려 주눅이 들어 사는 만년 2인자인 여성. ‘베타가 아닌 배타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서 따온 순 우리말.

센티어링: 향기(scent) +귀고리(earing). 귀고리 자체에 향기가 있어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소량의 향기가 나옴.

싱그맨: (Singer+Man) 가수가 개그맨이 되는 경우(탁재훈, 윤종신, 김씨 따위)

스니두: 스니커즈(sneakers)+구두. 구두 모양의 운동화.

3W: 결혼(wedding )+직업(work)+외모(몸무게:weigh). 현대 여성의 세 가지 고민.

코노피오신드롬: 코를 높여 예뻐지려는 경향을,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에 빗댄 말.

팰리우스: 팰리스(palace)+하우스(house). 궁전 같은 집.

츄잉족: 츄잉(chewing) +. 만났다하면 남을 씹어대는 사람들.

클라커: 시계(clock) + 사람을 뜻하는 접두사(~er). 시계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인을 이르는 말.

유한인: ‘유행만 따라가는 한심한 인간을 비꼬는 말.

리칠드: 부자(rich) + 어린이(child).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돈 많은 어린이.

넷팔: 예전의 펜팔에 해당. 현대는 인터넷으로 벗을 사귄다.

정크리포트: 인터넷 기사들이 정크프드(겉보기에 화려하며 맛있어 보이고 빠르게 생산해 재빨리 소비하는 음식)’의 속성을 그대로 지닌다는 데서 나온 말.

엘로우칼라: 화이트칼라도 아닌 블루칼라도 아닌, 안전모를 쓰고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분들.

글로벌리즌: 글로벌(global) + 시민(citizen). 세계화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이름.

그랜드캐리어: 나이가 지긋하신 커리어 우먼.

24마켓족: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지칭.

프랜드맵: 친구관계를 나타내는 지도.

메트로시티즌: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

마더니즘: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존하는 현상.

클래스브레이커: 수업 분위기를 흐리는 학생.

인스턴트커플: 쉽게 사귀고 헤어지는 현대의 연인을 지칭.

뻐꾸기 후배: 늘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는 후배.

떡버거: 떡으로 만든 버거.

폰 살균기: 핸드폰 살균기.

(): 악플의 반대.

코래식: 국악과 클래식의 만남.

네카시즘: (네티즌 + 메카시즘)남을 무차별 비방하는 네티즌.

NG: (No + Graduation) 졸업할 여건을 충족했는데도 취업 때문에 졸업을 미루는 대학 5학년 생들을 지칭하는 슬픈 용어.

샌드위치제너레이션: 자식교육과 노부모를 부양해야하는 40~50대의 세대.

장미족: 장기간 미취업인 백수들.

노무족: (No + more + uncle)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다란 뜻으로 과거의 문화를 즐기면서 최신 유행에도 뒤처지지 않는 40~50대 중년 남자.

천재일우(千才一愚):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뜻.

인생무상(人生霧狀): 안개가 낀 것처럼 앞이 암담한 신세.

복배상접(腹背相接): 배와 등이 서로 접합. 매우 배고픈 상황.

설상가상(說相佳狀):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

에이씨이(ACE): (과제assignment + 학점credit + 교육education): 진정한 배움보다는 과제와 학점만을 위한 교 육을 지칭하는 말.

스펙이즘(명세서specification + ~ism) 사람을 학력, 학점, 토익 따위 외적조건만으로 따지는 사회적 경향.

MP3: 'M's(이명박 대통령의) Plan 3'. ‘종부세 폐지’, ‘고환율’, ‘실업률 증가라는 딱한 경제계획.

고전에서 미래를 읽다(6).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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