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론

2008. 10. 5. 14:43방송대/고전소설론

마지막 강의는 신재효론입니다.
신재효는 판소리 사설 작가입니다. 여기서 판소리 사설이란 물론 우리의 고소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따위와 관계된 것들입니다.
교과서의 신재효론은 작가론으로서 부족한데, 그 이유는 신재효에 대한 삶의 편린들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은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의 이해'라는 김승호 선생(고전산문. 동국대강사)의 글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판소리 사설과 신재효
판소리 사설은 무엇이며 판소리소설 무엇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엄밀한 구분없이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 판소리 사설이란 광대가 소리를 할때 바탕글로 삼고있는 것, 다른 말로 창본을 가리킨다면, 판소리계 소설이란 그 창본을 소설로 바꾼 것을 가리킨다. 사설은 평민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억울하고 서러운 심정을 쏟아놓고 때로는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지만 마음껏 양반을 조롱하고 비웃는 내용으로 처리해놓고 있어 특히 피지배층의 공감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사설이 평민들에게 대리 배설과 욕구 충족의 몫을 하게되자 일부 몰락양반이나 중인 중에는 사설을 창본으로서만 쓸게 아니라 소설책으로 만들면 어떨까 궁리했다. 이렇게 해서 사설은 쉽게 소설로 바뀌어졌다.

그후 서울 안성 전주등지에 필사자들이 모이고 세책(貰冊)하는 이가 생겨서 전에 보지 못하는 풍경이 생겼다. 책장수와 필사자들이 노리는 독자층은 농업의 광포화와 상업공업의 발달로 점차 경제적으로 여유를 누리게된 평민층과 도시의 상공업자들이었다.

판소리 사설이 노래판에서의 창본으로 그 쓰임새가 그치지 않고 소설로서 쓰임새가 바뀌게 된 계기는 19세기 사회 경제적 상황의 변화, 그리고 양반들의 의식과 구별되는 민중의식이 사설속에 강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판소리 사설과 판소리계 소설은 각각 연희에서의 공연대본으로서의, 또는 독서만을 위한 이야기로서 각각 다른 쓰임새를 지니고 있어 사실 그 차이가 크다. 그럼에도 사설과 소설의 차이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는 사설이 큰 수정이나 변형을 가하지 않은채 거의 그대로 소설책으로 둔갑시켜 이름만 바꾸어 쓴 탓이다. 그러나 그 쓰임새가 달랐으니 같은 이야기이지만 서술적인 면에서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설은 아무래도 공연물로서의 구실해야했기에 극적 요소가 보다 요구되었던 반면 소설은 순수 독서무로서 구체성인 이야기와 그 논리를 앞세웠다.

판소리사설이 나중에는 소설로 바꾸어도 표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의 세련도를 갖추게 되지만 판소리의 형성기만 하더라도 사설은 근원설화와 별반 다른게 없었다고 본다. 그때의 사설은 논리면에서나 이야기로서의 전체적 구조에서 통일성이 부족함은 물론 문체도 소박하고 매우 거칠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의 사설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다듬어 지지 않은 대신 초기의 사설은 민중의 생각과 감정을 바탕에 깔고 그들의 생기발랄한 삶, 역동적인 힘, 순진무구한 인물을 통한 해학과 익살스러움, 그리고 노골적인 화자의 설명과 해석이 질펀한 입담위주의 이야기에 실려 마음껏 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민중언어가 성취한 크나큰 성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평민들이나 중인층만의 예술로 머물지않고 양반들까지 판소리를 즐기게되면서 사설이 크게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시대변화와 관련지어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인물은 신재효이다.


신재효(申在孝)는 1812년 11월 6일에 생으로 그의 아버지 신광흡(申光洽)은 서울사람이었으나 고창현의 경주인 노릇을 했고 뒤에 그곳에서 관약방(官藥房)을 차려 크게 재산을 늘렸던 인물이다. 그런 집안 배경은 신재효로 하여금 뒷날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판소리에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낌을 베풀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왜 중인으로서 그가 열정과 재산을 바쳐가면서 판소리부흥에 매달렸는지 동기가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단지 재산이 넉넉했던 중인이었으나 아직 신분상승의 뜻을 이룰 수 없던 그로서는 예술가로서의 길을 찾기로 마음을 다진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든 아직 광대나 판소리에 대한 인식이 보잘 것 없던 그때 판소리 중흥에 온몸을 바친 것에서 그의 심미안적 안목과 선각자적 통찰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신분상승의 굴레를 극복하고 판소리중흥의 기틀을 다진 그의 생애는 그 자체로 돋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공적을 몇 가지로 나누어 구체화시킬 수도 있다.

우선 노래 부르고 당대적 명창을 얻는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벗어나 그 당시 이미 전성기에 들어선 판소리를 체계화하고 그 이론의 틀을 만들어 뒷세대에 물려주려 애썼음을 잊을 수 없다. 둘째 광대들을 문하에 끌어들여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한편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남창만 존재하던 시절 진채선(陳彩仙)이나 허금파(許錦波)같은 여창을 발굴하고 길러낼 수 있었던 것은 개방적인 그의 안목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웠다. 셋째 직접 자신이 광대가를 비롯하여 14편의 단가를 짓는 등 나름의 창작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중구난방으로 떠돌던 판소리를 고르고 매만져 춘향가(남창 동창) 토별가 심청가 박타령 적벽가 변강쇠가 등의 6마당을 정착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를 긍적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특히 그가 사설을 매만지고 고쳐 6마당으로 정해놓은 일은 잘한 짓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었다. 그런데 신재효 판소리 사설이 양반중심으로 고쳐진 데는 시대적으로 그럴만한 까닭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들어서 양반도 이제 열렬한 판소리의 감상자로 떠올랐다. 이런 사실은 1754년 유진한(柳振漢)이 소리판에서 춘향가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이를 한시로 남긴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가 있는데 이는 양반들의 판소리에 대한 인식을 보이는 최초의 기록이다. 또 1810년에는 양반인 송만재(宋晩載)가 그 아들이 급제했으나 판소리판을 열어줄 돈이 없어 민망해하다 놀이판을 그대로 묘사한 관우희(觀優戱)를 지어 잔치에 대신한다고 했다. 50년을 두기로 나타난 이 두 자료는 19세기에 이르면서 평민못지않게 양반들도 판소리를 적극적으로 줄기는 분위기로 바뀌었음을 일러준다. 단적인 사례로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철종 대원군 고종등의 임금과 상층군에서는 판소리 광대를 궁궐안으로 불러들여 소리판을 벌였고 벼슬을 내리고 푸짐한 댓가를 내려 광대의 사기를 높였다. 광대들은 이제 시골이나 장터에서 소리를 팔아 푼전을 챙겨 근근히 생활하는 딱한 신세들이 아니었다. 유명한 광대는 재물과 벼슬을 얻게 되었고 그런 변화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에 관심을 갖고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는 상층의 입장과 그들의 취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세기의 판소리를 둘러싼 이같은 변화는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을 개작하고 정립시키는데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간추려 말한다면 신재효 판소리 사설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평민의 입장에서 지어진 사설을 될 수 있는대로 양반들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말과 줄거리를 고쳐나가고자 애썼다는 것이다. 그의 사설개작을 자세히 살피다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우선 그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자주 사설에 끼워넣었다.



다른 가객 몽준중가는 황릉묘에 갔다는데 이 사설 짓는이는 다른데를 갔다하니 좌상처분 어떨는지



화로에 향피우고 바리에 물을 부어 앙천암축하시는데 가만가만 빈말씀을 알수가 없건마는 제사를 지내실제 축문이 있겠기에 이 사설 짓는 사람 제의사로 지었으니 공명선생 아심면 꾸중이나 안하실지



신재효의 사설정리는 단순한 채록의 수준이 아니었다. 사설을 자기 마음대로 고치고 심지어 엉뚱하게 줄거리를 바꾸기까지 했는데 그런 적극적 개작은 판소리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이해가 깊다는 스스로의 자신감과 우월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밑줄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한편으로는 양반 좌상, 곧 그보다 신분이 높은 관중을 퍽 의식하여 사설을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설에 적극 얼굴을 내밀어 사설 개작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넣었으나 창자들에게는 소화해내기 어려운 군더더기가 배어버렸다.

두번째 신재효 사설에 이르면 민중의 성격이 크게 약화된다. 문체에 있어서나 주제에 있어서나 작중인물에 있어서 이같은 현상은 폭넓게 나타난다. 그때까지 불려졌던 판소리의 바탕글들은 세속의 평민들이 일상에서 내뱉는 욕 비어 속담 육담 사투리가 예사로 판을 쳤고 그것이 별 여과없이 문면에 고스란히 받아들여졌으나 이제는 말을 고르고 다듬어 가능한 점잖고 품위있는 것으로 고쳐나가려고 애썼다. 다음에 이고본과 신재효사설을 예시하겠다. 이고본은 신재효사설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어서 이 둘을 비교하면 신재효 개작의 특징이 나올 것이다.



<이고본(李古本)> (방자가) 밧비 뛰며 건너가서 눈우의다 손을 언고 벽역갓치 소래를 질너 이애 춘향아 말듯거라 야단낫다 야단낫다. 춘향이가 깜짝 놀나 추천줄의 둑여날여와 눈 흘기며 욕을 하되 애고 망칙해라 제미*개*으로 열두다섯 번 나온 년석은 어름의 잣바진 경풍한 쇠누깔갓치 최생원의 호패 구역갓치 또 뚜러진 년석이 대갈이는 어러동산의 문달래 따먹든 덩덕새 대갈리 갓튼 년석이 소리는 생고자 색기 갓치 몹시 질너 하마트면 애보가 떠러질 번 하였다.



<신재효사설> 방자(房子)가 썩 들어서며 이에 춘향(春香)아 너본지 오래구나 노모(老母) 시하(侍下)에 잘 있었느냐 춘향(春香)이 돌아보니 전에 보던 방자(房子)여든 너 어찌 나왔느냐 사또 자제 도령님이 광한루(廣寒樓) 구경왔다 추천하는 제 네 거동을 보고 대노(大怒)하여 불러오라 하셨으니 나를 따라 어서 가자 춘향(春香)이 천연정색(天然正色)하여 방자(房子)를 꾸짓는다. 서울 계신 도령님이 내 이름을 어찌 알며 설령 알고 부르란들 네가 나를 누구로 알고 부르면 썩 갈줄로 당돌히 건너온다. 천만불당(千萬不當) 못될 일을 잔말 말고 건너가라



같은 대목을 두고 <이고본>과 <신재효사설>은 이렇듯 서술에 있어 큰 차이가 나타난다. 앞의 것이 현장의 말을 그대로 채록한 수준이라면 뒤의 것에서 보듯 신재효는 유식한 문자로 말을 다듬고 장면을 정리하는데 매우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신재효는 이야기의 전체적 틀도 실수많고 무식하고 가난한 평민의 생애가 아니라 영웅의 일생구조에 맞는 줄거리로 뜯어고치기도 했다. 특히 춘향전에서 춘향을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로 보고 지상에의 탄생과 시련 고난 그리고 극적 반전을 거쳐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해 놓았는데 유충렬전과 같은 영웅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을 보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평민의 발랄함이나 현실에서의 실감나는 묘사가 신재효의 적극적 개작으로 해서 크게 상처가 난 것은 사실이다.

그밖에 인물을 자의적으로 나름대로 함부로 탈락시킨 것도 그의 잘못으로 꼽기도 한다. 房子와 같은 인물이 그의 사설에서는 사라지는 일은 대표적 예이다. 춘향전의 방자는 작중인물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양반에 기생하는 천한 신분이나 상전인 이도령이나 춘향을 예사로 조롱하고 골탕먹이는가 하면 민중의식을 감춘 채 은근히 양반을 욕하는 구실이 사람들에게 적잖은 재미와 익살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신재효는 그 인물을 지워버렸다. 그럼 기존의 사설을 이렇게 함부로 고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중인층로서 당시 신재효 개인의 사정을 살펴야할 것이다. 조선후기 돈많고 문자를 아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신재효로서는 끝내 양반의 신분에 올라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는 벌써 양반의 세계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판소리계의 수장격이 된 그로서는 이전부터 중구난방으로 흘러온 판소리와 그 사설을 정리하고 가다듬어 후대로 전해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에 사로잡혔을지 모른다. 그런 의식은 그가 남긴 판소리 6마당의 설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가 정착시킨 판소리 여섯마당(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가 )가 한결같이 유교주의적 덕목인 충(忠) 효(孝) 열(烈) 우애(友愛)를 주제로 삼고있음은 주목할 점이다. 다시말해 그는 사설개작과정에서 양반이 지향하는 의식세계를 의식했고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합리성과 논리 그리고 도덕적으로 깨우침을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특히 그는 광대들의 중심인물로서 위치를 거듭 생각했다. 이미 당시 광대중의 일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양반과 매우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평민보다 상층들을 더 의식하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신재효로서는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사설에 반영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설을 전아하고 품위있게 고쳐 양반의 입맛과 취향에 고쳐나간 일은 신재효 개인의 사정과 함께 당대 광대들이 처한 미묘한 입장을 암시해주는 셈이다.


그러나 판소리사에서 신재효의 업적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판소리 사설의 정착과정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나누어 부르게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신재효는 창과 인물에 따른 배역분담이 필요함을 스스로 터득했고 이를 사설에 적극 반영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사설의 개작을 통해 이른바 상층과 하층이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매우 고심했던 것으로 비친다. 그의 앞시대의 사설이 골계와 비속함으로 흘러갔다면 그는 거기에다 비장함과 전아함이 깃들게 하여 판소리 사설의 균형감을 살리는데 힘을 기울였다. 결국 판소리 사설의 개작의 의미는 민중과 양반의 대립적 의식을 없애 계층과 신분을 떠나 보다 많은 이가 판소리를 감상하고 즐길수 있도록 하는데 뜻을 두었다. 이는 그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직접 광대를 지도하고 뒷바라지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크게 높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방송대 > 고전소설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송대 기출문제(고전소설론)  (0) 2010.09.12
홍길동전 자료  (0) 2008.10.06
박지원론  (0) 2008.10.05
김만중론  (0) 2008.10.05
허균론  (0) 2008.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