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론

2008. 10. 5. 14:39방송대/고전소설론

강의내용 김만중론입니다.

아래는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저와 함께 고소설론을 공부한는 이정훈 군의 과제물입니다.

김만중은 그의 어머니 혜평 윤씨를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 초점을 둔 글입니다.

같은 공부를 하는 동학의 글을 보는 것도 의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성을 사랑한 김만중..

-그의 어머니 혜평 윤씨의 영향을 중심으로-


과 목 명 : 고소설론

담당교수 : 간호윤 교수님

학 과 명 : 국어교육과

학 번 : 12012763

성 명 : 이정훈

발 표 일 : 05. 10. 17(월)



김만중 작가론# 들어가며..

김만중 작가론

김만중(金萬重)은 1637년 2월 10일에 병자호란의 와중에 피난 가던 배 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강화도가 함락될 때 선원(仙源) 김상용과 함께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기 때문에 그는 유복자였다. 김만중이 피난선상의 유복자였다는 것은 그와 그 어머니와의 관계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보통 사람의 모자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완강하게 결속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어머니에 대한 김만중의 효성이 평생토록 남달랐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소설 『구운몽』은 그가 선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어느 날 어머니를 위해 지어 바친 작품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김만중과 그의 어머니, 그의 작품 사이에는 매우 흥미 있는 상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김만중의 성장 과정에서 그의 어머니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관계를 실제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김만중의 무의식에 반영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작품 속에 표현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어머니.. 그 이상의 존재, 해평 윤씨.

김만중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선조의 딸 정혜옹주의 손녀요, 예조참판 지(墀)의 무남독녀였다. 정혜옹주에게는 그녀가 유일한 손자였기 때문에 친히 안아서 기르고 소학을 입으로 외워서 가르쳤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한 번만 가르쳐도 깨우쳐 정혜옹주는 그녀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슬기로운 부인이었다. 성품이 글을 좋아해서 늙어서도 그만 두지 않았는데 치란(治亂)과 명신(名臣)의 언행 보기를 즐겨했다. 또한 자칭 미망인이라 하여 종신토록 빛나는 옷을 입지도 않고, 연회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음악을 듣지 않았다.

전란 중에 남편을 잃은 후 윤 부인은 자신의 친정에 가서 생활했는데, 그의 아버지 참판공 윤지(尹墀)가 죽고 난 후 생활이 어려워져 베짜고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학업에 방해가 될 까 걱정하여 어린 자식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고, 소학 ,사략, 당시(唐詩) 등은 딱히 스승을 두지 않고 윤씨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그녀의 성품과 자식들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에 대해서 쓴 「선비정경부인행장」에 잘 나타나 있다.


“맹자 중용 같은 모든 책은 다 대부인께서 곡식으로 바꾸셨다. 좌전을 파는 자가 있었는데 선형이 뜻에 심히 사랑하되 권수가 많았으므로 값을 감히 묻지 못하매, 대부인이 베틀 가운데 명주를 베어 그 값을 갚으셨다. 이 밖에 남은 저축이라고는 없었는지라, 또 옥당의 관리로 있는 이웃사람으로부터 사서와 시경언해를 빌어다가 손수 베끼시니 자체(字體)가 정세(精細)하여 구슬을 꿴 듯하고 한 획도 구차함이 없으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에게 견줄게 아니니, 반드시 다른 날에 재주와 학문이 남보다 한 등급은 뛰어나야 겨우 남과 나란히 설 수 있느니라, 사람들이 행실 없는 이를 꾸짖을 적에 반드시 ‘과부의 자식이라’ 하나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땅히 뼈에 새길지어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실로 절행(節行)과 학식과 교육열에 있어서 대단한 여인이었다. 따라서 김만중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김만중의 전 생애를 통해 언제나 은은한 후광처럼 그의 내면 생활을 지배하던 것은 그의 어머니의 존재였다. 어머니를 향한 김만중의 사친지념(思親之念)은 그의 의식의 저변을 관통하는 한줄기 빛과 같아서, 드디어는 그의 무의식의 심연에 신비스러운 ‘모성상(母性像)’이 형성하였다.



2. 사료 속에 기록된 김만중의 효심

그렇다면 김만중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윤씨 부인에 대한 김만중의 효심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지금부터 300여 년 전(숙종 18.1692년)에 김만중이 남해 적소에서 타계하던 날 (음력 4월 30일)을 『서포연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4월에 적사(謫舍)에서 고복(皐復)하다.

부군이 평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느라 지나치게 마음 상하여 병이 되었다. 게다가 남녘땅이 찌는 듯 덥고 습해서 부습(浮濕)과 해수(咳嗽)와 혈담(血痰) 등 증세가 해가 갈수록 차차로 심해졌다. 또 귀양살이하고 있는 여러 공(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잇달아 듣게 되자 3월에 육화공(六化公)【종형 萬增】에게 답장을 하는 편지에서는, “신상의 여러 증세들은 진실로 끝내 지탱해 낼 도리가 없고, 같은 시기에 쫓겨난 신하달은 모두 세상을 떠나 거의 없으니, 인생은 진실로 한바탕 꿈인가 합니다. 지난 가을 걸상을 마주하고 앉았던 일이 더욱 마음속에 또렷이 빛남을 깨닫습니다.” 하였으니 아마도 일어나지 못할 줄을 스스로 짐작했던 것 같았다. 병이 심해져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약을 바치면 물리치며 말했다. “내 병이 어찌 약을 쓸 병이겠는가?” 마침내 이 날 고복하였다. 목사공(牧使公)【아들 鎭華】은 이부인(李夫人)을 뵈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고, 단지 동복 두어 사람만 곁에 있었다. 섬에 함게 유배 온 이가 안타깝게 여기어 염습을 해 죽었다.


다음은 『숙종대왕실록』에 기록된 그의 사후 평가이다. 다만 <갑론>은 긍정적 시각을, <을론>은 부정적 시각을 보여준다.


<갑> 전 판서 김만중이 남해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쉰 여섯이었다. 만중의 자는 중숙(重叔)이니 만기(萬基)의 아우이다. 사람됨이 결백 온화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도타웠다. 조정에 벼슬을 하여서는 논의가 강직하였으니 영고성쇠의 갈림길에서 더욱 곧음을 드러내었다. 청렴결백함은 아무도 따를 수 없었으니, 지위가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도 청빈함이 유생(儒生)과 같았다.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였다. 권세 있는 요직을 피하고 멀리하여 이조(吏曹) 및 병조(兵曹)의 판서와 대제학(大提學)을 굳이 사양하고 제수받지 아니하니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문사(文詞)가 뛰어났으며 시(詩)가 더욱 고아(古雅)하여 근세의 조속한 말을 쓰지 아니하였으나, 또한 감추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천품(天稟)이 도(道)에 가까운데도 능히 학문에 힘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귀양 가 있을 적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분상(奔喪)하지 못하고 울부짖다가 병이 되어 세상을 떠나니 당시의 사람들이 슬퍼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숙종대왕실록』권지 24 14장 乙 면, 숙종 18년 4월 己酉일.


<을> 전 판서 김만중이 남해의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만중은 문사에 능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도타웠으니, 어머니 잘 섬긴다고 칭찬들을 하였다. 그러나 전혀 식견이 없었으니, 왕실의 가까운 친족으로 있으면서 지론(持論)이 지극히 준혹(峻酷)하여 훈신(勳臣)과 귀족에게 들러붙어서 청의(淸議)를 공격하기에 매우 힘썼다.

이사명(李師命)의 종용(慫慂)을 받고 거짓되고 패려(悖戾)한 말을 경솔하게도 상감께 말씀드리어 사화(士禍)의 계책을 꾸미다가 부자(父子)가 형(刑)을 받아 섬으로 귀양을 갔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분상하지도 못하고 이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뒤에 다시 또 흉악한 역모가 발생하여 집안 전체가 도륙을 당하니 세상에서는 만중이 당론을 준혹하게 한 응보라고들 하였다. 『숙종대왕실록 보궐정오』권지 24 1장 甲면, 숙종 19년 4월 己酉일.


<갑>은 김만중이 속한 노론의 시각이고 <을>은 반대 당파였던 남인의 시각에서 서술된 것이다. 소속 당파에서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반대 당이었던 남인의 시각에서도 김만중은 매우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서술될 정도였다. 윤씨 부인이 김만중에게 어느 정도의 존재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3. 한시 속에 표현된 김만중의 여성상

김만중은 2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정시(庭試)에서 장원급제하여 관직을 제수받게 되는데 그가 예조좌랑으로서 처음으로 행한 정치적 행적은 바로 시골 관기의 절개를 표창하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단천의 관기를 위해 그 이야기를 「단천절부시」라는 212구나 되는 장편 서사시로 엮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보면, 단천의 관기 일선(逸仙)이 단천 부사의 아들 진사 기인과 사랑하고, 마운령 고갯마루에서 이별을 하게 된다. 이 때 일선은 혈서로 불망기(不忘記)를 쓰고 상사 낭군은 머리털을 매듭지어 신표로 잘라 준다. 그 후 단천에는 안사(按使)가 오는데 안사는 공사(公事)엔 관심이 없고 오직 일선을 수청들게 하는 것이 관심이다. 그러나 일선은 수청을 거부하고 우물에 투신하는데 이웃사람들에게 구출되고 여론이 비등한다. 이후로 일선은 화장도 몸치장도 포기한 채 낭군이 남기고 간 상자 속의 머리털만 열어보며 그리워한다. 하루는 그 머리털이 저절로 퇴색하더니 서울로부터 상사의 부고(訃告)가 온다. 일선은 상복을 입고 분상차 서울로 달려간다. 상사댁의 온갖 구박과 멸시를 감내하면서 물 긷고 방아 찧는 노고를 다하니 드디어 본부인과 시어머니가 감동하여 일선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로써 일선의 수절하려는 입지는 관철된다.


또한 서포집에는 모두 366수의 한시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미인을 제재로 한 시는 51수가 되어 약 14% 정도이다. 그 양적 비중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대게 이것들은 고시나 악부체의 장편들이어서 실제 그 문집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다른 제재의 작품들보다 막대한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을 소재로 한 그의 한시들을 통해서 김만중이 구현한 여성상(女性像)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시에서 형상화한 여인들을 분류해 보면 ①버림받은 궁녀, ②인고의 여인, ③춘몽같은 미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흔히 ①버림받은 궁녀나 ②인고의 여인은 군신관계 또는 정치적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되는 제재이며 ③춘몽같은 미녀는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할 때 많이 사용되는 제재이다. 그러나 김만중의 ②인고의 여인에 관련된 한시 중에는 군신관계를 가탁한 것인지 아닌지 그 낌새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옛것을 본떠서 지은 시 김병국,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pp.132~133

평평한 들판은 아득히 넓고

산엣 나무들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네.

서릿바람이 찌는 더위를 쓸어가니

병든 잎이 날로 쌓이네.

해와 달이 번갈아 광명 되나니

음과 양은 잘도 바뀌네.

갈대를 보고 저 사람 생각하고

북풍에 수레를 함께 타기 읊조리네.

인생은 뜻에 맞음이 귀하거니

어찌 옛 터에 연연해 하겠는가.

아름다운 사람이 빈 골짜기에 있으니

용모가 어여쁘기 꽃봉오리 같네.

긴 옷자락에 명주를 차고

하얀 이빨은 맑은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네.

가락의 고상함은 세상에 드문 것이니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어찌 많으랴.

매양 생각하되 좇아 놀아서

죽음에 이르러도 맹세코 다른 맘 없을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절행의 여인과 지조의 선비가 겹쳐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갈대를 보고 저 사람 생각하고 북풍에 수레를 함께 타기 읊조리네. 인생은 뜻에 맞음이 귀하거니 어찌 옛 터에 연연해 하겠는가”를 보아 이 작품은 지조 있는 선비와 함께 하기를 노래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지조 있는 선비의 모습은, “아름다운 사람이 빈 골짜기에 있으니 용모가 어여쁘기 꽃봉오리 같네. 긴 옷자락에 명주를 차고 하얀 이빨은 맑은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네” 에서와 같이, 절행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김만중은 절행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지조 있는 고상한 선비의 한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김만중이 이렇게 절행의 여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칭송해 마지않는 것은 그것이 단지 여인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그가 지향하고 있는바 가장 소망스러운 인간상, 즉 그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형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김만중 작가론4. 소설을 통해 살펴본 김만중의 여성상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통해서도 여성에 대한 그의 인식과 여성상을 이해할 수가 있다. 『구운몽』은 창작 의도 자체가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양각색의 8명의 여성이 핵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즉 여성을 단순히 부수적인 인물이 아니라 중요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김만중이 여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가 있다. 『사씨남정기』 또한 비록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목적소설이지만 교활한 첩과 현덕한 본처의 대립을 내세워 그가 바라는 여성상을 표현하고 있으며 주인공 사씨의 성품은 그의 어머니 윤씨의 성품과 유사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운몽(九雲夢)

『구운몽(九雲夢)』을 글자 그대로 풀어 보면 '구운(九雲)'의 꿈이라는 뜻이다. 전체적인 『구운몽』의 내용은 양소유가 입신양명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8명의 여인을 만나 사랑하는 내용이 주가 된다. 따라서 이 글의 제목을 성진과 8선녀를 구운(九雲)이라 하고, 이들 아홉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 세움으로써 소설의 주인공 양소유뿐만 아니라 8선녀 또한 그 비중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 설정하고자 했던 김만중의 의도를 알 수가 있다.

팔선녀는 성진의 꿈속에서 양소유가 만나게 되는 8명의 여성으로서 등장하는데 그 여성들은 매우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며 동시에 다재다능한 인물들이다. 진채봉은 신의를 가진 인물로, 가춘운, 계섬월, 적경홍은 빼어난 자색과 가무 솜씨가 뛰어난 인물로, 심요연과 백능파는 뛰어난 무술 솜씨와 용기를 가진 인물로, 정 소저와 난양 공주는 어진 덕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김만중은 등장하는 모든 여성을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로 그리는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정경패 : 정 사도의 딸. 거문고가 인연이 되어 만났다. 후에 황태후의 양녀로 들어가 영양 공주로 불린다. 소유의 제 1부인.

· 이소화 : 난양 공주. 천자의 친동생이다. 제 2부인

· 진채봉 : 어사의 딸. 양소유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여 서로 인연을 맺었다. 소유의 제 3부인.

· 가춘운 : 정경패의 시비(侍婢). 소유의 제 4부인.

· 계섬월 : 낙양의 기녀. 천진교 주루에서 처음 만나고 후에 양소유가 연왕을 항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나 인연을 맺음. 소유의 제 5부인.

· 적경홍 : 북방 궁벽한 시골의 천한 집의 딸. 양소유가 벼슬길에 오른 후 연왕을 항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만나 인연을 맺었다. 소유의 제 6부인.

· 심요연 : 변방에서 검술과 칼춤을 배우며 자랐다. 양소유가 토번과의 전쟁에 참가했을 때 적진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제 7부인.

· 백능파 : 용왕의 딸. 토번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꿈 속에서 처음 만났다. 제 8부인.


여기서 특기할 것은 심지어 8명의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양소유에게서도 여성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소유는 그 기질이 청수하고 용모가 옥 같은 선비로서 아무래도 여성적인 남성, 즉 미소년이다. 『구운몽』 전편을 통해 양소유가 환기하는 이미지는 이른바 출장입상하는 영웅으로서의 남성상이 아니라, 항상 그 타고난 미모와 시재로 여인을 유혹하는 호색한이며, 그 호색한으로서의 이미지는 여성적 기질과 표리(表裏)의 관계에 있다. 사실, 그에 대한 인물묘사는 ‘얼굴은 옥으로 다스린 듯하고 눈은 새벽 별 같다.’든가, ‘기질이 청수하고 하고 지혜 너그러워 엄연한 대인군자’라든가 하여, 여성적 미모와 선비로서의 청수함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한시에서 나타난 그의 여성관과도 일치한다.


김만중에게 있어서 자아를 넘어서는 심리 세계의 원형상이 그의 어머니이고 이의 문학적 현현(顯現)이 곧 『구운몽』의 여인들이다. 그러므로 양소유의 두 부인과 여섯 낭자는, 그들의 사회적 계층이 각기 아무리 달랐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과 슬기로움과 어짊에 있어서만은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해 낼 수 있는 최상의 여성성으로 김만중이 드러내고자 했던 어머니의 형상과 동일시 될 수 있다.


-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사씨남정기』에도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한다. 현덕(賢德)한 사씨와 대비되는 교활한 교씨, 사리판별자로서의 숙모 두부, 유한림과 사씨를 연결시켜주는 여승 등이다. 작가 김만중이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는 일반적으로 처첩간의 갈등으로 보고 있으나, 오히려 여성의 덕(德)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성혼 과정에서 매파가 사소저의 미색을 칭찬하자 유현은 덕을 강조하여 말했고, 또 사부인이 남편 유한림에게 소실을 얻도록 주선해주는 것은 부덕(婦德)의 소치이다. 그리고 교씨의 간교로 인해 시가에서 쫓겨난 사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부모의 산소에서 지내는 것은 끝까지 덕을 실행 해보려는 강인한 의지의 발로라고 하겠다.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의 주인공 사씨 역시 김만중의 어머니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현덕하며 인고하는 사씨의 모습이 바로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며 또한 그것이 김만중이 추구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형상화된 여성상의 모습인 것이다.



# 결론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났기에 살부(殺父)의식의 대상이 없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꼈던 것도 아니고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한 페미니스트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러한 어머니를 통해 형상화된 여성을 사랑했고 여성들을 자신의 작품들에 투영시켰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그는 여성을 사랑했지만 ‘sex’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gender’로서의 여성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 것을 뒷받침하는 예로 그의 종손 북헌 김춘택(金春澤)의 말을 옮기며 글을 마친다.


사람은 여색에 있어서는 정자가 말한 금수의 경계를 지킬 수 있는 이가 드무니, 만약 할 수 있는 이가 있다하더라도 흔히는 억지로 애써서 지키는 것이다. 선생은 젊어 이동리(李東里) 동리 이은상(李殷相). 김만중의 장인,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름.의 집에서 데릴사위로 살았다.

김만중 작가론동리가 평소 노래하는 기생을 자못 좋아했는데 선생은 그런 환경에 살면서 특별히 잘난 체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했다. 뒤에 관찰사가 되어 외방(外方)에 나가 있을 적에 전례를 따른 기생 공봉(供奉)을 처음부터 또한 물리치는 일이 없었고, 거문고를 듣거나 춤을 감상하며 이를 시사(詩詞)로 나타내기까지 했으나, 그 속마음은 덤덤해서 마치 오래된 우물이 물결이 일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것이 억지로 애써서 지키는 것에 비해 어찌 더욱 어렵지 않은 일이겠는가. 김춘택, 「서포유사별록(西浦遺事別錄)」, 『북헌집(北軒集)』권 16.




【참고문헌】

김병국,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설성경, 『구운몽 연구』, 국학자료원, 1999.

김일렬, 『고전소설신론』, 새문사, 2001.

정규복, 『김만중문학연구』, 국학자료원, 1993.

설성경, 『서포소설의 선과 관음』, 장경각, 1999.

이복규, 『우리 고소설 연구』, 역락,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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