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론/김시습론

2008. 10. 1. 16:27방송대/고전소설론

간호윤입니다.
국문 여러분들과 만나 반갑습니다.
 

첫 강의입니다.

여러분들과 만나 반갑습니다.

다음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출석 수업을 통하여 여러분들은 다섯 명의 작가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유념할 점은 교과서의 작가론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작가론은 ‘작가에 대한 영혼의 연금술’입니다. 보는 이에 따라, 관점에 따라, 작가의 모습은 다채롭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작가의 생애를 외우는 전기(傳記)만으로는 작가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래를 글을 참고하여 우리의 고소설 작가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려 보세요.


<역사주의비평>

문학비평의 시작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되었다.

역사주의적인 비평방법은 한마디로 인과론이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생애, 성격과 무관하지 않으며 역사적 환경과 특정 민족의 정신성향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출발한다. 생트 뵈브는 이를 ‘그 나무에 그 열매’라고 말한다. 즉 문학작품이 역사적 산물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인데 비평가들은 마치 역사가처럼 자연스레 본래 작품원본(원전)이 과연 100% 믿을만한 자료인지 탐구하게 되고 이에 ‘원전을 확정’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된다.

해방전 한국현대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닥치는 큰 유혹 중의 하나는 작품 속에서 가능하면 일제에 대한 저항의 낌새를 들추려 한다는 점인데, 이는 역사비평의 한 방법이며 자칫 발생론적 오류에 빠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술품의 창조를 역사적인 계기로 인식하는 역사비평가의 맹위는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에 봉착하고, ‘원인과 환경이 같으면 결과(작품)도 같은가’ 하는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다.

문학작품보다 외적인 요소에 치우침으로써 결국 비평의 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오늘날에도 이 방법은 널리 이용되며, 대부분의 문학비평은 역사주의 비평의 업적을 기초로 하여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회문화비평>

역사주의 비평이 문학을 바라보는 손쉬운 방법으로 널리 사랑받을 무렵, 또 다른 시각의 방법이 등장하였다. 전자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사회, 문화 비평이 그것이다. 이는 역사적 방법을 대체로 수용하면서도 구별되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문학작품에 대해 가치평가를 내린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사회를 변화, 발전시킬만한 중요한 사상, 즉 힘을 포함하고 있어야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회문화비평은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역사 비평’이 실증적인데 반해, ‘사회 비평’은 이념적이며 상호(문학과 사회) 의사소통적이다. 따라서 사회 비평은 동시대적일 가능성이 높고 필연적으로 문학성을 간과할 우려를 내비친다. 사회 비평가들의 관심은 리얼리즘에 집중되고 현실의 맥락을 '반영'하는 작품이 중심 논의에 오르게 됨은 당연한 이치다. 이에 가장 주목되는 비평가는 단연 루카치(George Lukac)이다. 이때처럼 비평가가 사회에 능동적으로 개입한 적도 없다.

사회 비평은 역사주의 비평과 마찬가지로 작품 자체의 미학적 질이나 창조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닌다. 하지만 ‘현실과 역사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극복방법을 경험’하게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인간적인 인식을 확인시켜준 점에서 여러모로 수많은 잔뿌리를 내렸던 풍성한 과실수였다.


<형식주의비평>

역사주의 방법과 사회, 문화적 방법이 동시에 범하고 있는 약점을 극복하려는 이론이다. 형식주의비평은 1920년대에 등장하였다. 전자가 플라톤적(사회, 도덕적 영향에 대한 관심)이라면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작품자체의 예술성에 대한 관심)이다. 문학작품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유기체로 간주하고, 그 자체를 하나의 총체적 세계로 보는 야심찬 시도이다. 형식주의는 한마디로 질서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작품을 꼼꼼하게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고, 훌륭한 작품일수록 부분과 부분의 유기적 연결과 통일의 완벽성이 돋보인다는 믿음을 실제로 증명해보였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개념은 텍스트를 여러 가지 기교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형식주의 비평의 선언서였다. 60-70년대 미국에서 번성한 신비평의 뿌리가 바로 러시아 형식주의인데, 그 중심에 엘리어트(T.S. Eliot)와 브룩스(Cleanth Brooks) 등이 있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문학비평연구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이론은 작품 속에 구현된 구성원리, 언어작용, 상징 등을 이론의 중심으로 끌어왔다. 형식주의 비평은 서정시를 주로 분석하면서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으나 소설 같은 서사장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 방법에서 간과한 작품성과 형식주의적 방법에서 지나친 역사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법하지 않은가. 프라이(Northrop Frye)는 이 두 세계를 멋지게 결합한 멋진 신세계를 연다. ‘신화비평(혹은 원형비평)’이 그것이다.


<구조주의비평>

‘신화비평(혹은 원형비평)’에 앞서 언급해야할 방법들이 있다. 소쉬르의 언어학적 배경에서 출발한 구조주의이다. 구조주의가 기존의 방법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전통적 신념을 철저하게 거부하며 시작한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1968년의 한 에세이에서 작가들은 기존의 글들을 혼합하고 재조립하거나 재배치하는 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저 이미 누군가 이룩한 언어와 문화의 방대한 사전(Lexicon)에 의존할 따름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식주의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소쉬르(Saussure)는 ‘언어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구별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본다. 즉, 신호등의 빨강은 ‘파랑이 아니니 서시오’라는 의미를 부여받는다. 모든 기호는 기의(記意:signifié: 서시오)와 기표(記標:signifiant: 빨강)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철저히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야심을 품은 구조주의는 인간이 이룩해놓은 다양한 체계를 최소단위의 분석들을 통해 설명해 낸다. 사회 관습들을 언어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체계로 해석해내는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슬픈 열대>를 비롯한 그의 구조인류학)은 구조주의가 이룩한 결정판처럼 충격적이다. 이는 마치 문학작품을 수학문제 풀 듯 공식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는 오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조주의 입장에서 작가와 독자의 몫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오히려 자체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심리주의비평>

심리주의 방법은 시대와 문학을 읽어내는 방법이 한 천재의 등장으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바로 그이다.

심리적 방법은 프로이트 이전에도 여러 학자와 작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용되었으나 프로이트에 와서야 비로소 완결된 하나의 학문적 갈래로 정립되게 된다.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은 형식주의 비평과 흡사하다. 작가와 독자의 영향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의 심리분석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주의 방법은 어떤 비평방법의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과 종종 연합한다.

심리비평의 기저를 이루는 프로이트의 개념은 ‘무의식 속의 억압된 본능(Id), 자아의 행동원리(Ego), 사회적 양심과 내적검열인 초자아(Superego)’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욕망의 억압이 유발시키는 신경증과 콤플렉스, 그리고 무의식의 탐구를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심리상황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니스트 존스의 ‘햄릿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잘 알려진 심리적 비평방법의 좋은 예다. 사실 연대기적인 비평사에서 살펴본다면 프로이트의 제자인 융(Carl Gustav Jung)의 이론이 문학비평에 먼저 도입되고 뒤이어 라캉(Jacques Lacan) 등의 학자들에 의해 프로이트가 문학이론에 새롭게 조명되었다. 프로이트 심리학과 문학과의 연관성은 오늘날까지 가장 관심을 끄는 분야임은 틀림없다.


<원형비평>

원형 비평은 문학작품의 구조 분석을 통해 ‘인간사고의 공통양식을 찾으려는 환원주의적 시도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개성의 작품을 동일한 원형으로 단순화한다는 얘기로 역사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야심 찬 시도다. 가장 뛰어난 비평가 프라이가 『비평의 해부Anatomy of criticism』를 통해서 문학작품을 꿰뚫는 공통 원리로 ‘신화’와 융의 ‘집단 무의식’ 개념을 내세운다. 이 방법에 프로이트보다 융이 먼저 연구된 것은 예술가에 대한 존엄성을 부여하는 융의 태도에, 그렇지 않은 프로이트보다 신화비평가들의 관심이 쏠린 탓이다.

그러나 신화비평 또한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의도 자체가 어차피 환원적인 것이라, ‘원형에 대한 대원리’를 추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일정한 틀로 회귀하려는 동일성이나 예상성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마무리를 짓자. 학문이 그러하듯 문학연구 또한 비등점이 없다. 적어도 문학비평의 방법에는 절대적인 가치는 없으며 다만 문학의 해석과 설명에 대한 진지한 탐구만이 있을 뿐이다.


이 글은 테리 이글턴/김명환 외 공역, <문학이론입문>, 창작과 비평사. 이선영 편, <문학비평의 방법과 실제>, 삼지원 등의 책을 참조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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