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론

2008. 10. 5. 14:41방송대/고전소설론

박지원론입니다.

제 책 『개를 키우지 마라-연암소설 산책, 고소설비평시론』, 경인문화사, 2005를 참고하세요. 이 책은 연암을 '개를 키우지 마라'라는 키이로 열어 본 연암 박지원에 대한 작가론과 소설론입니다.

제 책은 교보문고(주소:http://www.kyobobook.co.kr/)에서 책의 제목을 치거나 '간호윤'을 치면 책이 뜨고 '미리보기'를 치면 30쪽까지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제 책 『개를 키우지 마라』의 한 장인 "나는 기억력이 아주 나쁘다."입니다.

제 학부 졸업 논문이 ‘연암 박지원 연구’였으니 20여 년이 넘도록 그를 본 셈이지요. 그런데도 아직 그의 옷섶 한 자락도 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참 보암보암 여간 아닌 분입니다.


"나는 기억력이 아주 나쁘다."
여담 같은 이야기련만, 연암의 말이기에 나 같은 행내기로서는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연암 선생께는 송구하지만 저 말 한 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연암 선생의 기재奇才를 알기에 저 말을 곧이 믿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내가 연암을 계속 공부해 가도록 붙잡아 주는 든든한 손임에는 분명하다.
언젠가 나는 󰡔�과정록󰡕�에 보이는 이 부분을 보고는 내심으로 반색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독자들이 궁금할 테니 막 바로 인용문을 보자.

아버지께서는 책을 보시는 것이 몹시 더뎌 하루 종일 한 권도 못 보셨다. 늘 말씀하시기를 “나는 기억력이 천성적으로 아주 나빠 늘 책을 보다 덮는 즉시 잊어버리니 머릿속이 멍한 게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단 말이야. …”
先君看書甚遲 日不過一卷書 常曰 吾記性甚短 每看書掩卷卽忘 胸中茫然 若無一字 …1)

“에이, 그게 겸사謙辭란 것 아니요!”라고 말하는 독자를 위하여 바특하지만 증거를 하나 더 대겠다.
아래 글은 연암의 처남 지계공芝溪公 이재성李在誠, 1751~18091)이 한 말이다.

지계공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연암은 책을 보는 것이 매우 더디셨지. 내가 서너 장을 읽을 때에 겨우 한 장을 읽을 뿐이고, 또 기억하여 외우는 재주도 나보다 좀 떨어지셨어.
芝溪公嘗言 燕岩看書甚遲 我下三四板之頃 僅下一板 且其記誦之才 若差遜於我1)

매형인 연암이 미워서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험담이야 했겠는가. 어쨌든 처남과 자신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온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기억력이 나쁘고 책 읽는 속도가 더딘’ 연암 선생의 글이 이런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지는 짐작이 간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이 지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이 있다. ‘재언才彦’이란 재주꾼이라는 소리이니 조선시대의 재주 있는 사람들을 기록한 책으로 이해하면 됨직하다. 이 책에 연암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지원은 자가 미중이요, 호는 연암으로 참판 박사유1)의 아들이다. 그의 글은 재기가 넘치고 수사와 착상이 뛰어나 한번 붓을 들었다하면 잠깐 사이에 천 여 행이 도도히 흘러 나왔다. 그의 <허생전>과 󰡔�열하일기󰡕�는 때때로 사람의 턱이 빠질 정도로 웃게 만든다. … 󰡔�열하일기󰡕� 5권을 짓고 5권을 증보하였는데 글을 아주 거침없이 휘갈겨서 자못 연의소설演義小說(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허구적인 내용을 덧붙여 흥미 본위로 쓴, 중국의 통속 소설. <삼국지연의>, <초한연의>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의 말투를 지녀 서을 도성에서 칭찬을 받으며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朴趾源 字美仲 號燕巖 參判師愈之子 文溢才氣 藻思多才 一筆俄頃 天行滔滔 其許生傳 熱河日記 往往解人頤 … 著熱河日記五卷 後增五卷 多舞文 頗有演義口氣 膾炙都城1)

이런 연암을 통해 타고난 재주꾼도 있지만 저처럼 노력을 더하여 재주꾼이 되는 경우도 있음을 확연히 보게 된다.
재주란 자고로 자랑할 것은 못 되는 성싶다.
공부를 하다 보니 재승박덕(才勝薄德,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음)인 분들을 의외로 두두룩히 보았다. 그 분들이 말씀하는 것을 들을라치면, 연방 쓴 입맛만 다시다가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거만한 어품語品에 더 듣다가는 정말 ‘천탈관이득일점天脫冠而得一點 내실매이횡일대乃失枚而橫一帶!’라고 속으로 욕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궁중 수라간을 배경으로 하여 얼마 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대장금>의 대사 한 토막에도 이러한 재주에 대한 대화가 있으니 들어보자.

한상궁, 백성들이 곰탕을 먹는 이유는 좋은 고기와 뼈를 먹을 수 없기에 잡뼈로 우리고 또 우리어 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빼내 맛에서나 몸에나 좋은 것을 먹기 위함이다. 헌데 너는 오로지 이기겠다는 마음에 음식을 하는 기본자세도 다 팽개치고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좋은 머리로 편법이나 생각해낸 것이 아니더냐! 내 일찍이 네가 숯을 생각해내고 광천수를 생각해내 냉국수를 만들고 어선御膳(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이르던 말)경연에서 숭채菘菜(배추만두)를 만들어내는 재기를 높이 사 너에게 맛을 그리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 재기才氣가 너에게 오히려 독毒이 돼버렸구나!

한상궁이 재주를 믿는 장금에게 ‘재기才氣가 오히려 독毒’이 될 수도 있다는 세상의 순리를 따끔히 이르는 말이다.
한상궁의 말로 연암의 기억력 운운을 되짚어 본다면, 연암은 자신의 재주를 경계해서였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고 좀스런 소기小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결의다짐이라고 해도 무난하다. 사실 당시에 연암의 한문소설이나 글들에서 비범한 그의 재주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글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진하게 우려낸 뽀얀 사골 국물에 화려한 고명으로 치장하여 보기도 먹기도 좋은 음식일 것 같은 것도 알고 보면 재주를 경계하는 마음에서 노력을 더하여 얻어낸 결과이리라 생각한다.
연암의 이러한 겸손은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에서 “나는 삼류 선비다余下士也”라고 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자기 문장을 과신하여 동료들의 글 솜씨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의 ‘문인상경文人相輕’이란 말이 널리 퍼졌던 때이다. 연암이 󰡔�열하일기󰡕�를 쓴 것은 44세였고 이미 조선에 그의 문명이 적잖이 알려져 있었지만 열하를 여행하면서 조선 선비 연암은 자신의 왜소함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삼류[下士]’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스스로를 삼류라 여긴다는 것은 ‘노력’을 더해야겠다는 다짐이리라.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이란 분이 있는데 기억력에 관한한 빼놓을 수 없는 분이라 짚고 넘어간다. 이 양반의 독서 편력은 정말 대단하였는데, 1만 번 이상 읽지 않은 책은 독서 목록에 올리지도 않았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 중 <백이전佰夷傳>은 1억 1만 3000독讀, 현재 수치로는 11만 3000번을 거듭하여 서실書室의 이름조차도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 하니 그 독서력이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하루는 이 분이 길을 가다 책 읽는 소리를 듣고는 “그 글이 익숙하기는 한데 어떤 글인지 생각이 나지 않네”라고 하자, 말 고삐를 끌고 가던 하인이 <백이전> 구절임을 알려주었다 한다. 학문의 힘이 어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길러지겠는가만은 평생 10만 번이 넘게 읽어 놓고도 그 구절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를 정녕 몰랐다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데도 이 김득신이란 분은 부족한 기억력에 굴하지 않고 공부하여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것을 보면 제아무리 한 번 듣거나 보거나 한 것을 잊지 않고 오래 지니는 총기인 ‘지닐총’이 없다하여도 공부는 가능한 것인가 보다.
연암의 「낭환집서蜋丸集序」라는 글에는 또 이런 부분도 있다.

쇠똥구리는 스스로 쇠똥을 사랑하여 여룡驪龍(몸빛이 검은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역시 그 구슬을 가지고 저 쇠똥구리의 쇠똥을 비웃지 않는다.
蜣蜋自愛滾丸 不羨驪龍之珠 驪龍亦不以其珠 笑彼蜋丸1)

‘낭환’이란 쇠똥구리이다.
쇠똥구리가 여룡의 구슬을 얻은들 어디에 쓰며 여룡 역시 쇠똥을 나무라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 재주 없음을 탓할 것도 없지마는 저 이의 재주를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하고 재주가 있다고 재주 없음을 비웃지도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심조룡文心雕龍󰡕� 제48장 「지음편知音篇」에 보이는 말로 이 장을 마친다.

무릇 천 곡의 악곡을 연주해 본 뒤라야 소리를 깨달을 수 있고 천 개의 검을 본 뒤라야 보검을 알 수 있게 된다.
凡操千曲而後曉聲 觀千劍而後識器.

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 꾸준한 연마를 요구하는 비평에 관한 글이지만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라는 연암의 말과 선을 잇댄다.
경계할지어다. 재주를!
세상을 보는 눈을 조금만 넓혀보자.
과過똑똑이들이 많은 세상이지만은 지둔遲鈍의 덕, 둔하지만 끈기 있고 느리지만 성실誠實한 자들로서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우뚝 남긴 분들도 꽤 있다. 저런 이들이 우리에게 뚱겨주는 인생 훈수는 ‘둔재鈍才라고 여기는 이들도 노력을 하면 된다’이다. 또 운명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우연이란 다리를 놓아준다하니 지긋이 의자에 엉덩이를 오래도록 붙여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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