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집이 흥하고 망하는 건 오직 이 회초리에 달려 있다(2)

2008. 9. 16. 20:27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부인은 일찍이 시를 볼 줄 알았다.

 집 안의 아이들이 읊는 것을 보면 미리 그 빈궁하고 높이 됨을 점쳤다.

하루는 이웃집 아이들이 시를 지었는데, 한 아이는 “수탉이 담장 위에 올라 우네(雄鷄上墻鳴)”라 하고 한 아이는 “수탉이 울고 있네, 담장 위에 올라(雄鷄鳴上墻)”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이것을 보고는 평하였다.

“‘담장 위에 올라 운다(上墻鳴)’라고 한 아이는 반드시 지위가 병조판서에 이를 것이요, ‘울고 있네 담장 위에 올라(鳴上墻)’라고 한 아이는 반드시 요절할 것이다.”1)

후에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또 종손(從孫)1)인 홍명구(洪命耈, 1596~1637)1)가 어린 아이 때 시를 지었는데 “꽃이 떨어져 온 천지가 붉네(花落天地紅).”라고 하였다.

부인이 이 시를 보았다.

“이 아이는 반드시 일찍 신분이 높아지겠지만 수를 오래 누리지는 못할 게다. 만일 ‘꽃이 피어 온 천지가 붉네(花發天地紅).’라고 하였으면 복되고 영화로운 삶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인데. ‘떨어지다(落)’라는 글자는 큰 행복의 기상이 없으니 애석하구나.”

후에 또 결과가 증험하였다.

한번은 선비를 모아 반궁(泮宮)1)에서 시험 볼 때였다.

‘정중이 군사마(軍司馬)에게 삼가 사례하다(鄭衆拜謝軍司馬)’로써 글제를 삼았는데, 시험에 응시한 만 여 명중, 태반이 내시 정중(鄭衆)으로 그릇 알아 시험에 실패하였다.

부인의 친정 조카 유광(柳洸,1562~?)1)이 부인을 뵙고 글의 뜻을 설명하니 부인이 말하였다.

“후한에 두 정중(鄭衆)이 있으니 한 사람은 선비이고 한 사람은 내시이다. 여기서는 반드시 선비 정중1)이어야 한다.”

유광이 놀라 말했다.

“아주머니께서 오히려 이것을 아시는데 시험장에 가득 찬 선비들이 능히 알지 못하였으니 우리 숙모의 박학하심은 글 짓는 솜씨가 뛰어난 선비들도 미칠 수 없습니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1) 때에 임해군(臨海君, 1574~1609)1)이 이미 죽고 사친(私親)1)의 묘는 봉할 곳이 없었다. 오직 효경전(孝敬殿)1) 문간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방에 봉안하였더니 예관(禮官)1)이 “불가하옵니다.”라고 하였다.

부인의 친정 조카인 유일(柳溢)이 예랑(禮郞)1)으로 여러 대신에게 두루 의견을 모을 때 먼저 부인을 뵙고 그 일을 죽 이야기하니 부인이 말했다.

“예로부터 임금이 자신의 친어머니를 봉하여 바른 지위에 올려놓지 않은 자가 없다. 한나라 문제(漢文帝)는 어머니를 박태후(薄太后)에 봉하였고 한나라 소제(漢昭帝)는 구익부인(鉤弋夫人)에 봉하였으며 한나라 애제(漢哀帝)는 공황후(恭皇后)를 봉하고 송나라 인종(宋仁宗)은 신비(宸妃)를 봉하여 모두 아름다운 이름을 세상에 뚜렷이 드러내는 호로써 추봉(追封)1)하였다. 한나라 장제(漢章帝)가 유독 사친을 봉하지 않았는데 전사(前史)에 이것을 칭찬하였다. 이제 만일 사친을 봉하는 것을 옳다고 하면 이것은 옳지 않은 것에 가까운 것이요, 만일 배척하여 아니라고 한다면 반드시 일의 빌미1)가 되는 화가 있을 게다. 하물며 문간에 붙어 있는 방에 봉안하는 것을 두고 불가하다고 한다면 어떻겠느냐. 너는 이 문제를 신중히 하라.”

과연 그 뒤에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를 성릉(成陵)으로 추봉하고 대비(大妃)1)의 호를 덧붙였으니,1) 하나하나가 부인의 말과 똑 같았다.

부인의 사물을 널리 보고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이와 같았다.

다만 집에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문자의 저술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짤막한 문구도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외사씨는 말한다.

부인이 널리 아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사물의 꿰뚫어 볼 줄 아는 식견과 앞날을 밝게 볼 줄 아는 선견을 갖기 또한 드문 것이다. 유부인은 이미 고금을 두루 통달하고 또 시를 보는 감식안이 뛰어나 미리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것은 규중의 여인으로서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1) ‘담장 위에서 운다(上墻鳴)’는 ‘울명(鳴)’자를 ‘담장장(墻)’자 아래 깔았지만, ‘울고 있네 담장 위에서(鳴上墻)’는 ‘울명(鳴)’자가 ‘담장장(墻)’자 위에 있기 때문이다.

2) 형이나 아우의 손자.

3) 본관(本貫) 남양(南陽), 자(字) 원로(元老), 호(號) 나재(懶齋)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등을 역임한 홍서익(洪瑞翼)의 아들로 평안감사(平安監司) 등을 지냈다.

4) 성균관(成均館).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

5) 자(字)는 무숙(武叔), 유몽사(柳夢獅)로 몽인의 조카이고, 조부(祖父)가 유당(柳(木+堂))이다. 159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감(縣監) 등을 지냈다.

6) 정중(鄭衆). 후한(後漢) 사람. 대사농(大司農) 벼슬을 했으므로 정사농(鄭司農)이라 하기도 한다.

7) 조선왕조 제15대 임금. 재위 1608∼1623. 휘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 김씨(恭嬪金氏) 소생.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됐다.

8) 선조의 첫째 서자(庶子).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世子)에 책봉되지 못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일부 대신들과 명나라에서 왕으로 즉위시킬 것을 주장하자 이를 불안해 한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永昌大君)·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역모 죄로 몰려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됐다.

9)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난 임금의 친어머니. 여기서는 공빈 김씨(恭嬪金氏)를 말한다.

10) 예의·제향·교빙·과거 따위의 일 맡아보던 관아의 관리.

11) 조선시대 예조(禮曹)의 당하관(堂下官) 관원을 합칭한 말.

12) 죽은 뒤에 관위(官位) 따위를 내림.

13) 한(漢) 제12대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애제의 생모인 정도공왕후(定陶共王后)를 황태후(皇太后)라 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좌장군 사단(師丹)이 대사마 왕망(王莽)과 함께 ‘예가 아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애제가 처음에는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후일 생모인 정후(丁后)를 공황후로 높였다. 낭중령(郞中令) 영포, 황문랑(黃門郞) 단유가 다시 아뢰어 번국명(藩國名)인 정도를 대호(大號)에 얹어 쓰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고 또 공황을 위하여 경사(京師)에 묘(廟)를 세우기를 청하매 사단이 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고향으로 내쫓겼다.

14) 왕조체제에서 전왕(前王)의 왕비이며 현왕(現王)의 어머니인 여성을 높여서 부르던 호칭. 왕대비(王大妃), 대왕대비(大王大妃) 등을 통틀어 대비로 일컫기도 했다.

15) ‘성릉(成陵)’은 광해군의 친어머니인 공빈(恭嬪)김씨의 봉호이다. 공빈 김씨는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577년 25세로 사망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공빈(恭嬪)김씨를 왕비로 올리고 어머니의 묘를 성릉으로 승격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성릉(成陵)은 성묘(成墓)로 강등되었으며,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위치해 있다. 광해군은 왕좌에서 쫓겨난 뒤 ‘어머니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공빈 김씨의 무덤인 성릉 우측 2km 산 아래 묘를 썼다.

16)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혼전(魂殿). 선조의 비(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의 혼전(魂殿). ‘혼전’이란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