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만리타향에서 인연이 끊어지고 정자 한 귀퉁이에서 향기로운 넋

2008. 8. 17. 12:55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조반과 사랑하는 여인에 관한 슬픈 이야기입니다.

조반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12세 때 북경(北京)에 가서 한문과 몽고어를 배워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가 되어 귀국. 여러 번 명나라에 다녀오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상의 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등을 역임했다. 1392년 이성계의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복흥군(復興君)에 봉해졌다. 동대문구 전농동 272번지의 부군당(府君堂)에 주신(主神)으로 모셔져 있다.


36. 만리타향에서 인연이 끊어지고 강가 정자 한 귀퉁이에서 향기로운 넋 사라졌네(1)

 복흥군(復興君) 조반(趙胖1341~1401)1)은 황해도 배천(白川) 사람이다.

고려 말에 고모가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에 그 고모를 따라 탈탈 씨에게 양육됐다.

20세가 되었을 때에 한 미인을 운 좋게 만나 정이 심히 돈독하였다. 두 사람 간에는 자연히 굳은 맹서를 하여 신의가 단단하였다.

오래지 않아 원나라 망하고 탈탈 또한 도망하게 되었다.

조반 역시 급히 화를 피하여 본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조반은 미인과 하급관리인 소관(小官)과 함께 길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길을 가다 소관이 조반에게 의논성 있게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이 호랑이 입에서 화를 벗어나 근근이 여기까지는 왔습니다. 하지만 만일 중도에 우리 일행의 행색을 의심하여 묻는 자가 있다면, 그때에는 도마 위의 고기가 될 것입니다. 또 미인을 데리고 함께 가면 사람의 이목을 끌게 될 것입니다. 잠시만 생각한다면 인정 어린 마음을 베어버리는 것이 몸을 보전하는 길입니다.

조반이 소관의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저 여인과 이미 한 무덤에 들어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또 머나먼 타국에서 어려움을 맞아 이곳까지 함께 왔다. 만일 두 사람 모두 온전치 못하다면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저 여인을 선뜻 여기다 내려놓겠느냐.”

원래 영민한 미인은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말을 귓결에 듣고는 이미 일곱 여덟은 속내를 파악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물고기와 곰 발바닥을 모두 얻지 못한다(魚掌兼得).’하였어요. 지금 첩 한 사람 때문에 세 사람이 동시에 나란히 화를 당하는 것은 당치 않아요. 첩은 여기에서 이만 헤어지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이슬이 내리 듯 눈물을 흘렸다.

조반이 이것을 보고 애간장이 끊어져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한숨을 지으며 눈물만 흘렸다.

소관이 발을 굴렀다.

“세 사람이 함께 죽는 것보다 각각 살길을 찾아 후일을 기약하는 것만 못합니다. 공은 한때의 정으로 만 리의 앞길을 그릇되게 하지 마세요.”

그러며 정을 떨쳐버리기를 재촉하였다.

조반이 부득이 강가에 있는 정자를 찾아 들었다.

 한 귀퉁이 작은 상을 차려 놓고 서로 이별의 술잔을 교환한 후에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정자에서 내려와 손을 놓았다. 조반이 한 발자국에 고개를 돌리고 세 발자국에 또 돌아다 보고하여 여러 시간을 주저하여 선뜻 가지 못하였다.

소관이 뒤에서 채찍을 휘둘러 말을 치니 그제야 말이 나는 듯이 달렸다.

반 리 턱은 내려와 조반이 돌아다보았다.

저 먼 발치로 강가의 정자가 보이고 미인이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이 아슴아슴하게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은은히 미인의 곡성도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