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것을 허리에 차면 몇 천 리라도 노자가 필요치 않을 게요(2)

2008. 8. 13. 17:26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23. 이것을 허리에 차면 몇 천 리라도 노자가 필요치 않을 게요(2)

 이때에 생원이 동자와 함께 방향을 정하지 않고 가다가 한 곳에 이르렀다.

저녁노을이 지더니 이내 저물어 한 객줏집을 찾아 들어가 묵었을 때였다.

저녁밥을 먹고 막 잠자리에 들려하는데, 웬 나그네가 커다란 상자를 짊어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뒤이어 또 두세 사람이 들어 와 같은 방에서 묵었다.

그 다음날 새벽에 깨어보니, 뒤에 온 사람들이 언제 밖으로 나갔는지 알 수가 없고, 다만 상자를 졌던 나그네만이 가슴을 치며 크게 곡을 하는 것이었다.

 생원이 그 까닭을 물었다.

“나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사방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지요. 요즈음에 와서야 집안 형편이 조금 먹고 살만하여 부모의 유해를 선영의 아래에 이장할 생각으로 유골을 상자 속에 넣어 짊어지고 오는 길이랍니다. 아, 그런데 어젯밤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 뒤에 들어 온 사람들이 필연 이 상자에 재물이 있는 줄 알고 이를 도적질해 갔습니다. 만일 저 치들이 중간에서 그 상자를 풀어보고 사람의 백골임을 안다면, 반드시 버릴 것이니 이를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리고는 목을 놓아 곡을 하니 생원이 심히 측은하였다.

동자가 등을 돌리고 벽을 바라보고 앉아 소매에서 산가지1)를 꺼내어 종횡으로 늘어놓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다시 거두어 소매 속에 집어넣고는 밖으로 나가면서 눈짓으로 생원을 은밀히 불러냈다.

“이 상자는 저 이 말대로 어젯밤의 늦게 온 사람들이 도둑질해 간 게 확실합니다. 아마, 이 큰길을 따라 이십 리를 지나지 못하여, 그 사람들이 이것을 열어보고 재물이 아니라 사람의 백골임을 알고는 길가에 묻어버리고 갈 것이 분명합니다. 생원께서 저 사람에게 찾아 줄 뜻을 퉁기면 반드시 은혜롭게 여길 것입니다. 유골 상자를 찾아 준 후에, 또 산지(山地)를 택하여 주기까지 하면 저 사람에게는 큰 은인으로 되어 적게 잡아도 수천금의 후한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장사할 밑천으로 삼으면 지금의 찰가난을 능히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 네가 제법 점을 풀 줄 아는구나.”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동자의 말과 같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

그 사람은 크게 기뻐하였다.

“만일, 제 아버님의 유골을 찾아주시면 마땅히 가재를 기울여서라도 보답할 것이오.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 지 속히 알려 주시구려.”

이렇게 하여 생원이 그 사람과 동자를 동반하여 큰 길을 따라 이십 리 쯤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길가를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저만큼에 흙이 툭 비어져 나온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동자가 걸음을 멈추고는 생원과 슬쩍 눈짓을 주고받았다.

생원은 성큼 걸어가 우뚝 서더니 갑자기 발견한 것처럼 그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여기로구먼. 흉악한 도적놈들 같으니라고. 이곳에 묻어 놓았을 것이니, 한번 파 보시오.”

그 사람이 손으로 살살 파보니, 유골 상자가 나왔다.

“아, 이 크나큰 은혜를 갚을 길을 알 수 없소이다. 여기서 우리 집이 멀지 않으니 함께 가시지요.”

생원이 응낙하고 그 집으로 함께 갔다.

다음 날, 생원이 주인을 불렀다.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데, 그대의 선영은 어느 곳에 있소이까?”

“여기서 삼십 리 밖에 있는데 지관이 택한 게 아니요. 그냥 선영의 남은 산기슭이 있기에 이곳에 장례 지내려는 것이오.”

생원이 윤도(輪圖)를 펼쳐 놓았다.

“그대의 뒷동산에 맑고 아름다운 기운이 있으니 이곳에다 장사를 지내시오.”

주인이 크게 기뻐하며 그 말을 따르니, 생원이 뒷동산을 휘둘러보고 대충 한 곳을 짚어 명당이라고 풍을 넣어 말했다. 주인은 기껍게 이곳에 부모의 유골을 모신 후에, 생원에게 수천 금을 두둑하니 보수로 주었다.

생원이 금을 받고 동자와 함께 그 집을 나섰다.

얼마쯤 가다가 동자가 말하였다.

“저는 이곳에서 이만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생원이 깜짝 놀라 손을 잡았다.

“내가 수천 금을 얻은 것은 모두 자네의 공일세. 나와 고초를 함께 하며 예까지 왔고, 또 자네의 은덕을 후히 갚아야 하거늘, 여기서 헤어지자하니 난 이제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

“저는 따로 거처가 있습니다. 따라 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앞일은 제가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생원께서는 이제 밑천이 마련되었으니, 이것을 가지시고 동으로 먼저 가 명태를 사서 서쪽에다 파시고, 또 남쪽에 가 목면을 무역하여 북방에 가 파신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연 큰 부를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생원이 그제야 동자가 반드시 신인으로 자기를 위하여 여러 일을 행한 줄 알고 먼 하늘을 향하야 무수히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다.

그 후에 동자의 말대로 남북으로 물건을 사가지고 다니면서 팔았더니 10배의 이윤을 얻었다. 큰 부자가 된 생원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와 부부가 다시 만나 늙도록 즐거움을 누렸다.


1) 셈하는 데에 쓰던 막대기. 대나무나 뼈 따위를 젓가락처럼 만들어 가로세로로 벌여 놓고 셈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