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것을 허리에 차면 몇 천 리라도 노자가 필요치 않을 게요(1)

2008. 8. 12. 10:11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23. 이것을 허리에 차면 몇 천 리라도 노자가 필요치 않을 게요(1)

 영남 안동(安東)1)에 이 생원이란 자가 있었다.

집안이 거덜 나 아주 빈한하여 생계를 유지할 길조차 없으므로 부부가 상의하여 집안 세간을 모두 팔아치워 돈 60냥을 얻었다. 20냥은 그의 아내를 주어 본가로 보내고 40냥은 생원이 가지고는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떠다닌 지 여러 날에 전라도 남원(南原)지방에 도착하니 어느 사이 주머니가 텅 비어 능히 나아가지 못하고 한 객줏집에 들어가 오래 앉아서는 일어나지를 못 하니 집 주인이 물었다.

“생원은 어찌 먹지도 않고 나가지도 아니하시는 게요.”

“노자가 다 떨어져서 밥을 사 먹을 수도 없고 또 굶주린 사람이기에 나다닐 힘도 없어 일어나지 못하오.”

 객주집 주인이 안으로 들어 가 밥 한 사발의 가지고 와서는 주었다. 생원이 이것을 모두 먹고도 일어나지 않으니 객주집 주인이 고민하다 한 꾀를 생각하여 쪼개진 윤도(輪圖)1) 한 개를 내어주며 말했다.

 “생원의 겉모습이 지사(地師)1)와 흡사하니 이것을 허리에 차면 몇 천 리라도 노자가 필요치 않고 전국을 모두 다닐 수 있을 게요.”

그리고는 생원을 내쫓았다.

생원이 부득이 문을 나와 고을마다 밥을 빌어먹으며 한 곳에 이르니 초상을 치르는 상가가 있었다. 집안 형편이 밥술깨나 뜨겠거늘, 문으로 썩 들어가 그 집 사람에게 하룻밤 머물기를 청하였다.

집안사람이 저녁밥을 한 상 차려 접대하고는 말하였다.

“저의 집은 상가라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머물기가 불편하니 다른 곳으로 가셨으면 하오.”생원이 민망하여 몸을 일으키려할 때였다.

그 집에서 일찍이 심부름을 하는 열 서너 살 먹은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생원이 윤도를 차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주인에게 고하였다.

“지나는 저 길손께서는 지관(地官)인가 봅니다.”

이러하니 상주가 급히 생원을 만류하여 별실로 맞아들인 후에, 다시 갖은 음식을 차려 내와 환대하였다.

“생원이 지관이라 하시니, 좋은 산지 한 곳을 점지해주기를 바라오.”

생원이 주저하면서 대답하지 않고 먼 산 바라보기만하니, 그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문 밖에서 ‘허(許)’자를 써서는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생원이 속으로 그 뜻을 넘겨 집고 즉시 “점지해 드리리다.”하고 허락하였다.

상주는 크게 기뻐하여 더욱 후대하였다.

한밤중이 되어 사람이 없을 때를 타서 아까 그 심부름하는 아이가 들어왔다.

“제가 어렸을 때에 부모님을 일찍이 여위고 몸을 의탁할 곳이 없다가 이 집에 사환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주인의 은덕을 많이 받았기에 감히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눌러 살고 있습니다. 오늘 다행히 생원을 만났으니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생원도 도움을 얻을 것이고, 나도 이곳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 좋은 묏자리를 잡으러 나가시거든 반드시 여차여차 하십시오.”

생원이 응낙하고 다음날 아침에 주인과 함께 산지(山地)를 답사할 때 동자는 말고삐를 잡고 갔다. 반나절을 가서 한 곳에 이르렀다.

산이 훤하고 물이 맑고 아름다운 것이 비록 보통 사람의 안목으로도 의사를 둘만한 곳이었다.

동자가 문득 채찍을 멈추고 그곳에서 소변을 보니, 생원도 그 뜻을 어림잡고 말에서 내려 오줌을 눈 곳에 윤도를 놓더니 극구 칭찬을 하였다.

 “이곳이 크게 길한 땅이올시다. 반드시 다른 곳을 구하지 말고 이곳에다 장사(葬事)를 모시기 바라오.”

주인의 소견에도 이곳이 아주 합당해보였는지 크게 기뻐하여 날을 택하고 장사를 지낸 다음 생원을 후하게 대접하여 여러 날을 머무르게 하였다.

하루는 생원이 돌아가기를 말하니 동자가 다시 생원에게 은밀히 말을 넣는 것이었다.

“생원이 돌아간다고 말씀하시면 반드시 사례하는 금을 내릴 것입니다. 이것을 사양하시고 다만 저를 함께 데리고 가겠다는 뜻을 간청하시면 주인이 부득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제가 여기서 몸을 벗어날 것입니다. 내 몸이 벗어난 후에는 생원을 좇아 이에 상당하는 계책을 가르쳐 드릴 것이니, 이 말을 새겨두십시오.”

생원이 응낙하고 다음날 주인에게 작별의 뜻을 고하였다.

주인이 만류하다가 백금을 주어 두둑하니 보수를 주거늘 생원이 이를 넌지시 사양하였다.

“나는 금을 받는 것을 원치 않소이다. 다만 저 동자를 함께 가게 해주시면 좋을 듯합니다만.”

“저 아이를 여러 해 길러 정이 두터워 서로 헤어지기가 어려우나, 생원이 이렇게 간청하시니 거절하기가 어렵구료. 뜻대로 데리고 가시오.”

주인은 섭섭한 마음에 오히려 노잣돈까지 후히 얹어 주었다.

생원이 감사를 표하고 즉시 동자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일정한 방향이 없었으니 동자가 가자는 대로 따라 여러 날을 그렇게 갔다.



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2) 풍수(風水:地官)가 쓰는 나침반으로 가운데에 지남침을 꽂아 놓고 가장자리에 원을 그려 이십사방위로 나누어 놓은 기구. 방위를 아는데 쓰임.

3) 땅의 길흉을 점지하는 자로 지관(地官)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