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귀신같이 길흉을 점치니, 인간의 운명을 도망가기 어렵구나

2008. 8. 11. 15:40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조위(曹偉,1454∼1503)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 태허(太虛). 호 매계(梅溪)이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며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檢閱)이 되고 수차에 걸쳐 시제(詩製)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떨쳐, 성종의 총애를 받아 경연에 나갔다. 1495년(연산군 1) 대사성(大司成)으로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여 올리자 그대로 편찬케 하였다. 후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부총관(副摠管)을 겸직했고,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도중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 의주에서 피체되어 투옥되었으나 이극균(李克均)의 극간으로 의주로 유배되어 순천에서 죽었다.



조위(曺偉,1454∼1503)의 호는 매계(梅溪)이니 김종직(金宗直, 1431~1492)1) 선생의 처남이었다.

 성종께서 일찍이 종직이 지은 글을 모아 책을 엮으라고 하였는데, 공이 조의제문(弔義帝文)1)을 수록하였다.

연산 임금 무오년(戊午,1498)1)에 유자광(柳子光, 1439~1512)1)이 이것으로 모함하여 죄가 됐다.

공이 이때에 하정사(賀正使)1)로 북경에 갔었다.

연산이 명하여 “국경을 넘어 오거든 즉시 베라.”라고 했다.

공의 일행이 사신의 일을 마치고 돌아 올 때, 요동에 이르러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공의 아우인 조신(曺伸,1450~1521경)1)이 점쟁이 정원결(鄭源潔)에게 길흉을 물으니 원결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만 두 구의 시를 써 주었다.


천 층이나 되는 풍랑 속에서 몸을 돌려 빠져 나오고   千層浪裏翻身出

모름지기 바위 아래에서 3일 밤이나 지새우는구나   也須岩下宿三宵


공이 낮게 중얼거렸다.

“첫 구를 보니 화는 면할 듯한데, 아래 구절의 뜻은 풀기가 어렵구나.”

공이 압록강(鴨綠江)에 도착하니, 이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1)인 금오랑(金吾郞)이 강가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공이 바라보고는 놀라 얼굴빛이 달라져 마주 보고는 오열을 하였다.

강을 건너가 들으니 대신 이극균(李克均,1437~1504)1)이 힘써 구하여 다행히도 사형을 면하고 다만 잡혀 죄를 문초 당한 뒤에 평안남도 순천군(順天郡:順川郡이라고도 함)으로 유배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공이 유배지에 갔다가 그 뒤에 병으로 이승을 달리하여 경상북도 금산(金山:지금의 금천군) 고향땅에 반장(返葬)1)하였다.

 그 뒤 갑자사화(甲子士禍)1)가 일어나자 전 죄를 추궁 받아 부관참시(剖棺斬屍)2)를 당하였다. 그 시신은 묘 앞 바위 아래에서 3일을 함부로 버려두었다.

아우인 신이 비로소 점괘를 깨닫고는 탄식하고 한탄하기를 그치지 못했다.



3)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본관은 선산(善山;일선 一善), 자는 계온(季)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4) 조선 성종 때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해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글. 김종직이 1457년(세조 3)에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으로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다가 꿈에 의제(초나라 懷王)를 만났는데 여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조문(弔文)을 지었다고 한다.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비유해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기록해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을 은연중 나타냈다.”고 하였다. 또 사관 권경유(權京裕)·권오복(權五福)은 김종직의 전을 지어 사초에 싣고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의(忠義)를 분발하니 보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을 편찬될 때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세조의 찬위를 헐뜯은 것이라고 하여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어세겸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를 유자광(柳子光)에게 고하였다.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감이 있었고, 이극돈은 김일손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유자광은 이 사실을 세조의 총신(寵臣)이었던 노사신(盧思愼)에게 고해 그와 함께 왕에게 아뢰어 “김종직이 세조를 헐뜯은 것은 대역무도(大逆無道)”라고 주장하였다.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김일손 등을 추국하게 하여 많은 유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던 글이다.

5)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6)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우복(于復)으로 부윤 유규(柳規)의 서자이다. 갑사(甲士)로서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세조 13년(1467) 길주의 호족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원하여 종군하고 돌아와서 세조의 총애를 받아 병조 정랑이 되었다. 1468년 병조 정랑으로 온양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 강순(康純)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으로 책정되고 무녕군(武寧君)에 봉해졌다. 천성이 음험하면서 재능이 있어 자기보다 더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이가 있으면 모함하기를 일삼았다. 연산군 4년(1498) 연산군이 사림(士林)을 싫어함을 기화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김일손의 사초(史草) 가운데 ‘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있음을 트집 잡아 연산군을 충동하여 그를 추국케 하였다. 또한 김종직의 문집에 실려 있는 ‘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추관(推官)들에게 보이고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주석을 달아 연산군에게 설명하고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그가 지은 글은 모두 없애야 한다고 건의하자 연산군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연산군 4년(1498)에 사초 사건과 관련하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탄압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이 일로 유자광은 권세의 정상에 올라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연산군 12년(1506) 9월에 대왕대비의 명으로 연산군을 폐하자 이듬해 대간 · 홍문관 · 예문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훈작을 삭탈당하고 관동으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경상도의 변군으로 이배되었다가 눈이 먼 뒤 몇 해만에 비참하게 죽었다.

7)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던 사신. 동지와 정월이 가까이 있으므로 동지사(冬至使)가 정조사를 겸하였다.

8)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문장과 어학에 능하여 사역원정(司譯院正)으로 발탁되었고, 『이륜행실도』를 편찬하였다. 저서에 『적암시집』, 『소문쇄록(聞錄)』 따위가 있다.

9)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중죄인을 신문하는 일을 맡아 하던 관아인 의금부에 소속된 관직으로 품계는 종5품이다.

10) 자는 방형(邦衡). 훈구대신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유자광에게 알려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던 이극돈(李克墩,1435)∼1503)의 아우이다. 성종 3년(1472) 동지중추부사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연산군 10년(1504)에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로 인동(仁同)에 귀양 가서 사사(賜死)되었다.

11)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우복(于復)으로 부윤 유규(柳規)의 서자이다. 갑사(甲士)로서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세조 13년(1467) 길주의 호족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원하여 종군하고 돌아와서 세조의 총애를 받아 병조 정랑이 되었다. 1468년 병조 정랑으로 온양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며,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 강순(康純)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으로 책정되고 무녕군(武寧君)에 봉해졌다. 천성이 음험하면서 재능이 있어 자기보다 더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이가 있으면 모함하기를 일삼았다. 연산군 4년(1498) 연산군이 사림(士林)을 싫어함을 기화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김일손의 사초(史草) 가운데 ‘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있음을 트집 잡아 연산군을 충동하여 그를 추국케 하였다. 또한 김종직의 문집에 실려 있는 ‘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추관(推官)들에게 보이고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주석을 달아 연산군에게 설명하고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그가 지은 글은 모두 없애야 한다고 건의하자 연산군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연산군 4년(1498)에 사초 사건과 관련하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탄압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이 일로 유자광은 권세의 정상에 올라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연산군 12년(1506) 9월에 대왕대비의 명으로 연산군을 폐하자 이듬해 대간 · 홍문관 · 예문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훈작을 삭탈당하고 관동으로 유배되었으며, 다시 경상도의 변군으로 이배되었다가 눈이 먼 뒤 몇 해만에 비참하게 죽었다.

12)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