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이런 제기랄! 종이 밖이 다 물 아니냐!

2008. 8. 9. 08:50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최북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초명은 식(植). 자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이다. 호로 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其齋)·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 등을 썼다. 호생관이라는 호는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것이다. 칠칠이라는 자는 이름의 북(北)자를 둘로 나누어 스스로 지은 것이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하였으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다. 1747년(영조 23)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스스로 눈을 찔러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술을 즐겼고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두루  유람하다,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투신하여 죽으려한 자살 미수사건도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로 많은 일화와 재치를 남긴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자기만의 예술에 대한 끼와 꾼의 기질을 발휘,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지만, 출신 성분이 낮았던 최북은 직업 화가로서 그림 한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그는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다.

또한 삶의 각박함과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의 일화로 남겼다. 최북의 작고 연도는 정확치 않다. 1712년 출생하여 49세인 1760년 설과 75세인 1786년 설이 있는데 1786년을 주장하는 학설이 많다.


52. 어찌 세상의 한 미친 사람으로만 볼 것인가

이런 제기랄! 종이 밖이 다 물 아니냐!

 최북(崔北, 1712~1786(?)1)의 자는 칠칠(七七)1)이니 그 조상을 알 수 없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한쪽 눈이 먼 애꾸라 늘 안경을 꼈다. 화첩을 펼쳐 놓고 붓을 잡아 휘두르면 신기한 경지에 다다랐다. 술을 즐기고 산수를 좋아하여 일찍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들어가 크게 취하여 소리 높여 울다 웃다 하다가는 말했다.

“천하의 최북이가 천하명산에서 죽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

그리고는 ‘휙’하니 곧 몸을 날려 연못에 떨어졌으나 구하는 자가 있어 살아났다.

술을 마시는데 하루에 늘 예닐곱 되를 먹으니 집안 형편은 더욱 빈곤해졌다. 평양과 동래 등 도회지를 떠돌아다니니 부호와 글깨나 한다는 선비들이 비단을 가지고 오는 자들로 문에 발꿈치를 서로 잇댔다.

산수화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산을 그리나 물을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칠칠이 붓을 홱 집어 던지고는 일어났다.

“이런 제기랄! 종이 밖이 다 물 아니냐!”

칠칠이 스스로 부르기를 호생자(毫生子)1)라 하였는데, 이때 ‘호생자’라는 이름이 온 나라에 떠들썩하였다. 다만 그의 그림쪽만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기가 복받치는 씩씩한 기상과 굳은 지조를 사고 싶어서였다.

칠칠은 성품이 뻣뻣하고 오만하였다.

일찍이 서평공자(西平公子)1)와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100냥의 금으로 내기를 걸었다.

칠칠이 막 이기려고 하니 서평이 한 수 물리기를 청하였다. 칠칠이 끝내 검은 돌, 흰 돌을 뒤섞어 바둑판을 엎어버리고 물러나 앉아 서평에게 말했다.

“바둑은 본래 사람들이 희롱하는 놀이요. 만일 한 번 물러주는 것을 쉽게 하면 세월이 다 가도록 한 판도 끝내지 못할 겝니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는 서평과 바둑을 두지 않았다.

칠칠이 일찍이 서울에 머무를 때에 하루는 아무개 귀한 사람의 집을 방문하였다. 문지기가 칠칠의 이름 부르기를 꺼려, 들어가 “최 직장(直長)이 왔습니다.”하니 칠칠이 성을 내며 말했다.

 “너는 왜 정승이라 부르지 않고 직장이라 부르는 겐가?”

국가 조직에 직장은 음관의 8품직이요, 정승은 영의정을 부르는 것이라 문지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 언제 정승이 되셨나이까?”

“그러면 내가 어느 때에 또 직장이 되었나? 만일 헛 직책을 빌려서 나를 부르려면 정승과 직장이 같은 것이거늘, 하필이면 높은 자리를 놔두고 왜 낮은 것을 취한단 말이냐.”

그리고는 드디어 집 주인을 보지도 않고 돌아왔다.

칠칠은 성품이 호방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고 술친구를 만나면 나이를 잊었으며 만일 자기와 뜻이 여상(如常)하지 않은 자를 만나면 높은 귀족이라도 배척하고 욕을 해댔다. 늘 노래를 읊조리는 것으로 강개불우한 소리를 만드니 세상 사람들이 부르기를 어떤 이는 “호방한 선비”라하며 어떤 이는 “미친 나그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이치에 들어맞았고 세상 사람을 풍자하는 말이 많았다.


1) 호를 ‘칠칠(七七)’이라 함은 ‘북(北)’자를 좌우로 파자(破字: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눔)하여 이른 것이다. 공교롭게도 칠칠이 이 세상에 머문 햇수도 마흔아홉 해였다.

2) ‘호생자’란 붓 끝으로 먹고 산다는 의미이다.

3) 이요(李橈)로 조선 후기의 종실. 선조의 왕자인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증손이며, 화춘군 정(花春君凈)의 아들이다. 종실이면서도 서민적인 성격이었으며, 학문이 깊고 달변이었다. 왕으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점차 교만해져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사치를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최북의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

 혹한의 겨울밤이다. 길손을 향해 짖는 개. 어디 갔다가 돌아오는 나그네인가. 이런 그림을 ‘지두화(指頭畵)’라 한다. 지두화란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을 이름이다. 팍팍한 삶, 붓대를 손으로 잡는다는 것조차 사치이던가? 달리 마련없는 인생길을 걸었던 최북은 그렇게 자기의 삶을 그렸다.

화가의 기량을 따지는 좋은 말이 있다.

“보통 화가는 있는 대로 그리고, 못난 화가는 있는 것도 못 그리고, 뛰어난 화가는 있었으면 좋은 것을 그려낼 줄 안다.” 

최북은 저 그림처럼 어느 한 겨울 날, 그림 한 점 팔아서는 술 사먹고 돌아오다 길가에서 얼어 죽었다 한다. 저 그림 속에는 그래도 개도 있고, 꼬마둥이 녀석도 있건마는, 저승길 배웅하는 동무 하나 없이 갔다. 혹 ‘“있었으면”하는 마음에서 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닐까?’하는 우문(愚問)을 삼킨다.

누구는 비견할 이로 서양의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라는 귀를 자른 화가를 꼽기도 한다지만-, 어디 최북의 고단한 삶과 예술에 비길쏜가?

눈보라 몰아치는 중세의 길목을-,

외눈박이 환쟁이가 허정허정-,

걷는 걸음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