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내 머리는 자를지언정 이 관인은 주지 못한다(1)

2008. 8. 7. 08:34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정시(鄭蓍,1768∼1811)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원(德圓), 호는 백우(伯友)이다. 1799년(정조 23)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주부·도총부경력 등을 역임했으며, 18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홍경래가 통솔하는 남진군은 선봉장 홍총각(洪總角)을 필두로 그 날로 가산에 진격, 군리(郡吏)들의 내응으로 쉽게 읍내를 점령하였다. 당시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의 장계에 따르면 이렇다.

  “그 날 난리가 일어난다고 민심이 흉흉하고 군내가 떠들썩하며 백성들이 피난가려 하자, 그는 홀로 말을 타고 군내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효유하여 피난 가는 것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봉기군 50여 명이 관아에 돌입하여, 살고 싶으면 인부(印符)와 보화를 내놓고 항복문서를 쓰라고 하자, 그는 ‘내 명이 다하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다. 속히 나를 죽여라.’ 하고, 그들의 대역무도함을 꾸짖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대로 적의 칼을 받았다.”

  순조는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뜻에서 병조참판·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을 추증하고, 관(棺)을 하사하였다. 관찰사의 진상보고를 다시 접한 순조는 그 충렬을 찬탄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을 가증(加贈)하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동생과 수청기생에게도 관직과 상품을 내렸다. 1813년 왕명으로 정주성 남쪽에 사당을 세워 당시 싸우다 죽은 6인과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이를 7의사(七義士)라 한다. 정주사람들은 또 오봉산(五峰山) 밑에 사당을 세워 7의사를 모셨는데, 왕은 ‘표절(表節)’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이 글은  ‘홍경래란’의 한 이면을 들추고 있다. 홍경래와 반대 입장에 선 정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역사적 해석을 써넣느냐는 우리 후손의 몫이다. 역시 두 번에 걸쳐 연재한다.



53. 내 머리는 자를지언정 이 관인은 주지 못한다

 정시(鄭蓍)의 자는 덕원(德圓)이요, 호는 백우(伯友)이다.

정조(正祖) 임금 때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평안북도 가산군수(嘉山郡守)를 제수 받았다.

정시가 아버지 노(魯)를 모시고 근무지에 부임해서 일이다.

 토적(土賊) 홍경래(洪景來)1)등이 군사를 일으켜 군대의 세력이 창궐하며 주군(州郡)을 돌아가며 위험에 빠뜨렸다. 아버지 노가 아들에게 말했다.

“만일 우리의 힘으로 적을 세력을 대적하지 못하여 성을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마땅히 토지신을 섬겨 죽는 것이 너의 직분이다. 행여나 나를 염려하지 말거라.”

 이때는 적이 아침저녁으로 성 밑까지 쳐들어오려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공이 그 아우 질(耋)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의리로써 백성들을 깨우쳐 죽음으로써 성을 지킬 뜻을 보이니, 백성들이 이것을 보고 감격하여 감히 흩어지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의 대 부대가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왔다. 성을 지키던 군사는 수비가 약하여 능히 막아내지 못하고 성이 함락을 당하니, 공이 그 아버지에게 울며 말하였다.

“변란이 이미 이곳까지 이르렀습니다. 관직을 지켜 죽는 바른 뜻은 이미 명을 받았습니다만 아버지와 아우 질은 관리로서 직책이 없으니 죽을 의로움이 없습니다. 급히 화를 피하십시오.”

 이 말을 듣자 아버지 노가 소리 높여 꾸짖었다.

“사람이 의리에 죽는 것이거늘, 어찌 관직이 있고 없고를 따지느냐. 또 내가 너에게 죽기를 가르쳤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산단 말이냐.”

 이때 적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공이 의관을 바로하고 관아에 단정히 앉아 화를 기다리며 외숙인 박인양(朴寅陽)1)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카는 이제 죽을 것입니다. 외숙께서는 먼저 피하시어 제 유해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또 사랑하던 기생 홍련(紅蓮)을 다른 곳으로 피하게 하였다.

잠시 후에 적의 무리가 난입하여 검을 뽑아들고는 큰 소리로 “군수는 급히 마당에 내려와 우리들을 맞으라.”하니 공이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적을 꾸짖었다.

“너희 무리가 비록 효경(梟獍)1)의 무리이나 또한 우리 임금의 백성이다. 어찌 감히 병사를 일으켜 관을 침범하는 것이냐!”

적이 곧 검으로 위협하고 급히 항복하는 글을 올리고 또 인부(印符)1)을 내 놓으라며, 꾸물거리면 죽인다고 하였다. 공이 소리 높여 크게 꾸짖었다.

“인부는 임금에게 받은 것이니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어찌 적에게 주겠는가.”

이때 공의 아버지 노가 외쳤다.

“내 아들은 내가 있다고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1) 홍경래(洪景來,1771~1812)는 순조 때의 민중 혁명가. 1798년에 평양의 향시에 합격하고 사마시에 응하였으나 지방을 차별하는 폐습 때문에 낙방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811년에 평안북도 가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혁명을 꾀하다가 이듬해 정주에서 패하여 죽었다.

2) 부여현감 등을 지냈다.

3)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는 올빼미와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라는 뜻으로, 배은망덕하고 흉악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효파경(梟破獍).

4) 인장(印章)과 병부(兵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