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홍차기

2008. 8. 29. 18:34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홍차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찾을 수 있다. 특히 풍산 홍씨의 여러 사적을 정리한 풍홍보감(豊洪寶鑑)과 홍양호의 <홍효자차기전>에 잘 나타나 있다. 풍산 홍씨 족보에 의하면 홍차기는 인보의 아들이고 족보에는 저한(著漢)으로 나온다. 홍차기의 어머니는 수원최씨였다. 이 집안은 현재에도 충주 노은면 가신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48년 감독, 주연 임운학, 각본 윤백남에 의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해내는 효자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영화인 <홍차기의 일생 [洪次奇의 一生, The Life of Hong Cha~Ki]>이 태양영화사에서 만들어지기도 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내 아버지가 살아 계신가

 동자 홍차기(洪次奇)1)는 충주(忠州) 노은동(孝隱洞) 사람이다.

홍차기가 어미 뱃속에 있을 때, 그 아비 선보(宣輔)가 그릇 살인범으로 죄에 연루되어 옥중에 매인 몸이 되었다.

차기가 태어난 지 수개월 후였다.

그 어미 최씨가 남편의 원통함을 하소연하기 위하여 한양에 갈 때 차기를 작은아버지 집에 맡겨 기르게 하였다. 차기는 작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그의 아버지가 선보인 줄은 몰랐다.

나이가 삼사 세가 되었을 때였다.

차기가 여러 아이들과 함께 잘 놀다가 별안간 놀라면서 울며 먹지 않았다. 작은 어머니가 그 연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는 울기를 그치지 않더니, 한참 있다가는 곧 그쳤다. 이와 같이 하기를 매 달 몇 차례씩 하니 집안사람들이 놀랍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 뒤에 사람이 읍에서 와 차기가 놀라 울던 날을 짚어보더니, 즉 관가에서 선보를 고문하던 날임을 알았다.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으며 집안사람들은 그가 하늘에서 내린 효성을 지녔음을 알았다. 그래 그 마음을 상할까 두려워하고 더욱 그 아비의 일을 감추었다.

차기가 열 살이 되었다.

선보의 나이는 이미 노쇠하였고 출옥의 날짜는 아직도 감감하였다.

하루아침에 목숨이 다하면 그 아들의 얼굴도 보지 못할까하여 집안사람을 시켜서 그 사실을 알리게 하고 옥문으로 데리고 오게 하였다.

차기가 아버지를 안고는 크게 곡을 하고 드디어 옥이 있는 읍내에 있으며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차기의 집은 옥중에 십 년 동안 음식을 집어넣느라 재산이 모두 없어져 생쥐 입가심도 못할 형편이었다.

작은 아버지 또한 달리 마련도 없는 형편이라 옥에 음식을 넣는 것이 어려웠다. 이에 차기가 나무를 져다가 쌀로 바꾸어서 아버지에게 음식을 넣었다.

이러한 지 또 여러 해가 흘렀다.

차기의 어머니 최씨가 여러 차례 상언(上言)2)하다가 답을 받아내지 못하고 마침내 서울에서 병으로 죽었다. 차기가 서울에 올라가 그 어미 시신을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지내고 아버지에게 하소연하였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한을 품고 돌아가셨습니다. 소자가 비록 어리나 지금 서울에 올라가 이 원통함을 하소연해보겠습니다.”

선보가 어리고 약함을 가련히 여겨 허락하지 않았으나 수일 후에 차기가 몰래 서울에 들어가 신문고(申聞鼓)3)를 쳤다.

조정에서 이를 살피는 관리에게 명하여 해결하라고 지시하였으나 또 응답이 없었다.

차기가 이 때문에 서울에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 여름이 됐다.

마침 큰 가뭄이 들어 임금이 나라 안팎을 깨우쳐 원통한 옥사와 죄의 유무를 판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라 하였다.

이때 차기가 대궐 문 밖에 엎드려 높은 벼슬아치로 조정에 들어가는 사람을 만나면 문득 울면서 아비의 원통함을 하소연 하였다. 이와 같이 한 지 십여 일이 지나니, 보는 자들이 모두 차기의 지성에 감동하였다. 그래 가끔 더러는 말로 위로하며 먹을 것을 주고 부녀자들은 혹 차기의 머리를 빗어 이를 없애 주었다. 또 새로 지은 옷가지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형조판서 윤동섬(尹東暹,1710∼1795)4)이 의옥(疑獄)5)을 조사하다가 차기의 일을 듣고 즉시 선보의 원통한 정상을 상주하였다.

상이 들으시고 측은히 여기어 안찰사(按察使)에게 명령을 내려 자세히 조사하여 주문(奏聞)6)하게 하였다. 안찰사가 글을 올리기는 하였으나 옥사가 오래되었고 일에 어둑선하여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다만 죽을죄를 완화하여 영남으로 방축(放逐)7)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 안찰사에게 명을 내릴 때 일이다.

차기가 여름날 한더위를 무릅쓰고 300리를 달음박질하여 감영에 이르러 그 아비의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 안찰사가 이것을 조정에 아뢰니, 차기가 또 빨리 서울에 가 도착하려다가 중도에서 병이 나 움직이지 못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조금만 머물러갈 것을 권하니, 차기가 이를 듣지 않고 사람에게 자기의 몸을 두 사람이 마주 메게 부탁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차기가 병 든 몸으로 대궐의 아래에 엎드려 있으니, 두창(痘瘡:천연두 혹은 마마.)8)이 크게 일어나 나흘 뒤에는 아예 세상일을 살피지 못하게 됐다.

다만 때로 몇 마디 잠꼬대만 하였다.

“내 아버지가 살아 계신가.”

얼마 후에 곧 사면이 내려졌다.

곁에 있는 사람이 차기를 불러 그 일을 알리니 차기가 놀라 깨어서는 말했다.

“지금 저를 위로하려는 것인가요.”

사람이 판결의 취지를 적은 글을 읽어 보여주니, 차기가 눈을 뜨고 손을 들어서 하늘에 축수하고, 또 벌떡 일어나서는 춤을 추었다.

“아버지께서 살아나셨다네! 아버지가 살아나셨어!”

그리고는 엎어져서 다시 말 한 마디 입에 내지 못하고는 이날 밤 마침내 죽었다.

이때 차기의 나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원근각처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외사씨는 말한다.

이에 대하여 대제학(大提學)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찬(贊)하였다.

[태어난 해에 아비가 옥에 들어가 죽은 해에 아비가 옥에서 나왔으니 하늘이 내신 것이 거의 우연이 아니로다. 옛날에 효를 따라 죽은 자 중에 이 같은 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내가 옛날 역사책을 살펴보니 아버지의 원통함을 하소연하여 죽음을 벗어나게 한 효자 효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차기와 같은 어린 나이로 하늘이 낸 효자는 실로 듣고 보지 못하였다. 마땅히 하늘이 도우셔서 수명을 연장할 것이거늘, 마침내 효를 다하다 죽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하늘의 속내를 알기 어렵고 재판관은 믿음직한 사내를 만나기 어렵다’라 한 것이 이것이던가.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마을에 있는 홍차기 효자비로 높이 95cm, 너비 47cm, 두께 17cm 이다.

정조 19년인 1795년(정조19년) 충주목사로 있던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쓴 추모글을 새겼다.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효자풍산홍차기비(孝子豊山洪此奇碑)>


홍씨(洪氏)성의 동자는 아름이 차기(此奇)요, 아버지는 인보(寅輔)인데 법에 걸려 한 달에 세 번 곤장을 맞아서 살 속이 터질 정도였는데 아이가 막 밥을 먹다가도 용하게 알고 부르짖으며 뒹구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원통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눈물이 마르고 피가 다하여 목숨이 쇠약해지더니 마음속 응어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객지에서 죽어 돌아 왔다.

아이가 이에 표연히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몰래 올라가 신문고를 울리고 여러 해 동안 대월 문을 지키고 있었다. 봉두난발을 하고 다리에는 굳은살이 박이니 보는 사람들이 탄식하고 혹은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머리의 이와 서캐를 잡아 주기도 하였다.

이 해에 큰 가뭄을 만나 혹시 죄가 의심스러운 죄수가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대신이 이를 말하자 왕은 “아! 본도에 명령을 내려 증거가 없는 말인지 깨끗하게 살피라.”고 하셨다.

아이는 자기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분주히 다니며 역마가 갈 때나 역마가 올 때나 모두 앞장을 섰는데 90리도 이르기 전에 병이 이미 위독한 상태였으나 기어서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자비를 구하였다. 은혜로운 말씀이 비로소 내려왔지만 기운은 실낱과 같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읽어주니 듣고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아버지! 아버지! 살게 되었습니다.”라 하고는 잠시 후 눈을 감고 마침내 죽고 말았다.

아버지가 옥에 들어갈 때 아이는 태중에 있었고 아버지가 옥에서 나옴에 이르러서는 아이가 상여에 있었다. 14년간 하늘이 실로 쇠퇴한 풍속을 안타깝게 여겨 그로 하여금 붙잡아 지탱하도록 한 것이니 아! 슬프구나, 사람의 모범이 여기에 있도다.


지금 임금(정조) 19년 을묘(1795년) 10월 일

자헌대부 행 충주목사 여흥(驪興) 이가환(李家煥)이 글을 짓고 쓴다.

孝子豐山洪此竒碑」

洪姓童子名此竒父曰寅輔文法罹月三栲㮄肉中悲兒方」

口食聖得知叫呼宛轉輒如期母訟父寃走亰師淚枯血盡」

命之衰視不受含旅復夜兒乃飄然不父辭撾鼓經秊守」

天扉蓬髮繭足觀者噫或與之餌去虱蟣會歲大旱慮」

囚疑貴臣爲言 王曰咨飭令本道淸單辭兒不量力」

爲奔馳驛往驛囘皆先之未至三舍病已危匍匐詣 闕」

冀 聖慈恩言纔降氣一絲傍人讀聽倐躍而父兮父兮」

生矣㢤已而瞑目遂大歸方父入獄兒在胚比父出獄兒」

在輀十四秊間天實爲如憫衰俗俾扶持吁嗟人式其在斯」

上之九秊乙卯十月 日」

資憲大夫行忠州牧使驪興李家煥撰並書」

乃父銘之曰母兮子兮呼願守 闕」

活夫活父天降孝烈世無聞矣始」

短碣是誰之力錦帶下恤徳若山髙」

㤙如海濶乃父之心與碑共屹」

舎弟集浩謹書」

塚在 祖父校理公墓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