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흥하고 망하는 건 오직 이 회초리에 달려 있다(1)

2008. 9. 4. 19:46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41. 집이 흥하고 망하는 건 오직 이 회초리에 달려 있다(1)

 유(柳) 부인은 본관이 전라남도 고흥(高興)인 유당(柳당(木+堂)의 딸이요, 율정(栗亭) 홍천민(洪天民, 1526~1574)1)의 후부인이요,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1572~1645)1)의 어머니이요, 어우 유몽인(柳夢寅, 1559~1623)1)의 손위누이이다.

경술년(庚戌年,1550년)에 태어나 수명이 나이 여든에 이르렀다.

어렸을 때에 남동생인 몽인이 수업 받는 것을 보고 곁에서 따라 속으로 암송하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통달하고 문장이 아주 컸다.

 그러나 스스로 말하기를, ‘부인이 글을 읊는 것은 마땅치 않다.’하여 세상에 전하는 시가 없다.

오직 아래 시 한 구절만이 세상에 전한다.


골짜기에 들어서니 봄빛을 뚫고 가고  入洞穿春色

다리를 건너니 물소리 밟고 지나가네  行橋踏水聲


그 남편인 율정이 죽은 뒤에 늘 삭망(朔望)1)이 되면 반드시 제문을 손수 지어 들고 읽은 후에 술잔을 올리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곧 제문을 불살랐다.

율정의 아우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1536∼1594)1)이 이것을 곁에서 들었는데 문장에 나타난 말이 더할 수 없이 비참하였다. 그러나 감히 이것을 보기를 청하지는 못하였다.

아들 학곡이 일찍이 아버지를 잃으니 부인이 친히 가르침을 주어 일정한 시간에 공부해야할 과목의 내용과 분량을 엄히 세워서는 권하고 장려하는 것도 힘써하였다.

공부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으면 회초리를 쳐서 피가 흐르게 하고 비단 보자기에 회초리를 싸서는 상자 속에 깊이 넣어 두며 말했다.

“아이의 부지런하고 게으름과 집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오직 이 회초리에 달려 있으니 어찌 어찌 중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학곡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 회초리를 넣어 둔 것이 몇 상자나 가득 찼다. 매일 아침 인사를 받을 때에는 반드시 휘장을 치고는 들으며 말했다.

“아이가 만일 잘 암송하면 내가 반드시 기쁜 빛이 있을 것이니, 아이가 이것을 보면 교태로운 마음을 먹기 쉽다. 이것을 휘장으로 감추어 아이가 나의 기뻐함을 보지 못하게 함이다.”

 부인이 나이가 들어 호당(湖堂)1)을 지나다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볼 때였다.

이곳을 지키는 노파가 전부터 내려오던 옥으로 된 술잔을 보이며 말했다.

“선생이 아니면 이것으로 마시지 못하오.”

부인이 웃었다.

“내 남편과 아들과, 내 남편의 동생과 여러 조카들이 모두 이 호당에 뽑히었소. 내 어찌 이 술잔으로 마시지 못한다는 게요”

이 이야기를 들은 자가 전하여 미담(美談)을 만들었다.


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달가(達可), 호는 율정(栗亭)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명종 8년(1553)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명종 10년(1555)에는 수찬(修撰)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정언(正言)을 거쳤고, 이조 좌랑(吏曹佐郞) · 예조 참의 등을 지냈고, 선조 5년(1572) 대사간이 되었다.

2) 본관 남양(南陽). 자 휘세(輝世). 호 학곡(鶴谷). 시호 문정(文靖). 1590년(선조 23) 사마시에 합격, 2년 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조좌랑 ·교리 등을 역임, 160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듬해 문과 중시(重試)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장인 황혁(黃爀)이 화를 입자 이를 변호하다 파직당하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정사(靖社)공신에 책록,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고 우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3)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자는 응문(應文). 문장이 뛰어나 1593년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벼슬을 내놓고 전전하다가 역모로 몰려 아들 약과 함께 사형되었다. 설화문학의 대가였던 그는 『어우야담』·『어우집』 등의 문집을 남겼다.

4)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을 아울러 이르는 말.

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이다. 대사간(1567) · 호조 참판(1575) · 부제학 · 예조 판서 ·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1591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졸옹집(拙翁集)』이 있다.

6)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부터, 학문(學問)에 뛰어난 문관(文官)에게 특별(特別) 휴가(休暇)를 주어 오로지 학업(學業)을 닦게 한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