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소설논쟁/ 채수의 죄를 교수형으로 단죄하소서(蔡壽之罪 斷律以絞) 1

2008. 8. 18. 17:14고소설 백과사전/고소설사 4대 사건

 

그런데 문제는 16세기 문인들의 소설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였다해도 소설을 지었다고 교수형에 처하자는 것은 광기어린 발언이라는 점이다.

채수의 『설공찬전』은 근래에 한글 번역본이 발견되어 실상을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정말 그러해야 했는지 살펴보자. 『설공찬전』의 개요는 청계 설공찬이 이야기다.


순창에 사는 설충란의 딸과 아들 공찬이 죽었다. 어느 날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이 뒷간에 갔다 오다가 미쳤다. 김석산이란 사람이 와서 보니 여자 귀신(공찬의 누이)이 설충수의 몸에 붙어 있어 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찬이가 와서 다시 공침의 몸으로 들어가고 이후, 공찬은 공침의 입을 빌리어 저승 이야기를 한다.


얼마 전 공전의 히트를 쳤던, 제리 주커(Jerry zuker) 감독의 「사랑과 영혼」이나 다키타 요지로의 「비밀」 따위와 유사하다. 『설공찬전』은 공수, 혹은 빙의憑依를 소재원으로 다룬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중세를 흥분과 광기로 몰아넣을 만한 소설이 아니다.

공수는 ‘무당이 신들린 상태에서 신의 말을 하는 것’이요, 빙의란 일반적으로 귀신들림, 귀신에 씌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산사람에게 다른 영靈이 들어온 귀신들린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귀신이 내린 소재원은 당시에는 흔한 스토리였다.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술한 『전등신화』나 『금오신화』․『태평광기언해』 등과 소재면素材面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들 작품들에서도 귀신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는 ‘귀신의 시대’라 할 만큼 귀신이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 제사를 재정비한 조처를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 귀신에 대한 논의가 많았기 때문이다.1) 훈구파인 성현은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에서 인귀人鬼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다양한 귀신의 예를 들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귀신의 문제는 조선 전기의 일반적인 문화현상의 하나였다. 문종文宗도 “정이 없는 것을 음양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만은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1) 하였다.

비슷한 시기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나 『기재기이企齋記異』 등 여러 패설의 작품들에서도 귀신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며 더욱이 귀신의 문제를 논하였다고 탄핵彈劾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헌부에서 『설공찬전』을 칭탈하여 중종 6년 9월 2일 채수를 탄핵한 것이다. 대간이 올린 상소를 보자.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은 그 내용이 윤회화복이 요망합니다. 조정과 민간에서 현혹되어 한자로 옮기거나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들을 미혹시킵니다(蔡壽作 薛公瓚傳 其事皆輪廻禍福之說 甚爲妖妄 中外惑信 或飜以文字 或譯以諺語 傳播惑衆).”1)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 5일에는 “『설공찬전』을 불살랐다. 숨기고 내어놓지 않는 자는 요서은장률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命燒薛公瓚傳 其隱匿不出者 依妖書隱之律 治罪).”1)라는 기록이 보인다.

 

말인즉, 사회 윤리 기강을 채수의 『설공찬전』이 해치기에 분서하고 숨긴 자는 ‘요서은장률妖書隱律’로 치죄한다는 것이다. 요서은장률이란 요망한 내용을 담은 책을 숨겼기에 죄를 다스린다는 것이니, 『설공찬전』이 적잖이 사회에 퍼진 듯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특히 현재 발견된 것이 한글본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부르주아문학(bourgeois)문학1)의 대두에 대한 철저한 배척이라고도 볼 수 있다.


1) 金時習(1435~1493)의 「神鬼說」․成俔(1439~1504)의 「神堂退牛說」과 『浮休子談論』에 보이는 귀신설․南孝溫(1454~1492)의 「鬼神論」․徐敬德(1489 ~1546)의 「鬼神死生論」, 그리고 李珥(1536~1584)의 「死生鬼神策」 등이 그 예이다.

 2) 『대동야승』, 민족문화추진회, 1985, 275쪽.

 3) 중종 6년 9월 2일(기유)

 4) 『중종실록』 6년 9월 5일(임자)

 5) 유럽 봉건사회에서는 일부 상류 특권계급의 소유물이었던 문학이 18세기 말 이후, 부르주아지(중산계급)의 발흥과 함께 점차 민중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궁정(宮廷)에서 가정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부르주아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