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소설논쟁(유양잡조 사건:성종)(4)

2008. 8. 8. 19:06고소설 백과사전/고소설사 4대 사건

 

김심 등이 이극돈을 탄핵하는 저의底意를 분명히 의심하는 발언이다. 더구나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대표적인 괴탄불경의 서인 『태평광기』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언급이 없느냐고 추궁까지 한다.

여기서 성종이 언급한 『사문유취』1)는 사전류로 성종의 발언처럼 『태평광기』2)와 같은 유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유양잡저』와 『태평광기』는 내용상 별로 다른 것이 아니다.

더욱이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대해서는 세조는 물론 서거정․양성지․이윤보․성임 등의 학자들까지도 애독하였음이 실록에 그대로 보인다.

결국 김심 등이 이극돈을 탄핵한 것은, 당시의 정치 문제를 소설류로 빌미잡아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당시 이극돈은 훈구파勳舊派였고 김심 등은 이와 대립되는 사림파士林派였다. 사림파는 성종 9년 이후 홍문관弘文館이 새롭게 정비되며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성종 20년경부터 홍문관의 언관諺官3)기능의 강화와 함께 훈구파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하게 되었다.

성종 20년(1489)경부터 연산군 무오사화(1498) 직전까지 약 10여 년 간 활동한 사림계 인물은 김심․권오복․김일손․유호인․최부․양희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김종직을 위시로 한 김굉필․정여창․조위․유호인․표연말․이종준 등과 함께 성종 때 관계에 대거 진출하였으며, 도학적道學的인 유교정치를 실현하려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와 반목이 심하였다.

특히 이 사건이 정치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후일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4) 때 사형 당한 사림의 이종준은, 이극돈과는 달리 탄핵의 대상이었는데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성종에게 『유양잡조』 등의 책을 인간하여 올린 것은 이종준과 이극돈이 함께 한 일 아니던가.

마지막으로 피혐避嫌하기를 청하는 이극돈의 말 가운데서도 이미 『유양잡조』는 보는 사람들이 널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볼썽사나운 모습이지만, 이왕 꺼낸 문제니 조금만 더 살펴보자.


“이극돈이 와서 아뢰기를 “『태평통재(太平通載)』․『보한집(補閑集)』 등의 책은 전에 감사로 있을 때 이미 인간(印刊)하였고 유향의 『설원(說苑)』․『신서(新序)』는 문예에 관계되는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왕의 치도(治道)에도 관계되며 『유양잡조』가 비록 불경한 말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널리 읽는 사람은 마땅히 섭렵해야 되는 것이므로 신에게 간행토록 한 것입니다. … 그러나 홍문관은 다수의 의견으로 의결하기를 요구하는 곳으로서 신이 아첨을 한다고 배척하니, 부끄러운 얼굴로 직무에 관계되는 일에 있는 것이 마음에 진실로 죄송합니다. 피혐하기를 청합니다(李克墩來啓 太平通載 補閑集 前監司時 已始開刊 劉向說苑 新序 非徒有關於文藝 亦帝王治道之所係 酉陽 雖雜以不經 亦傳覽者 所宜涉獵 臣令開刊 … 然弘文館 請議所在斥臣獻諛靦面在職 心實未安 請避嫌).”5)


이 글로 미루어 보면 유향의 『설원』과 『신서』는 문예에 관계된다고 까지 하였고, 『유양잡조』는 당시에 널리 읽혀졌던 책이며, 『태평통재』는 이미 인간까지 하였음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에 소설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팽배하였다면 『태평통재』를 편찬할 수도 없었으며 작자에 대한 견해도 부정적이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어찌된 켯속인지, 『태평통재』를 편찬한 성임에 대해서는 같은 『성종실록』에서도 다루고 있으나 별다른 논평을 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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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김심의 차자箚子사건은 소설에 대한 박해라기보다는 사림과 훈구가 드잡이하는 데서 빚어진 정치적 부산물로 귀결된다.

이러한 것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중국의 소설을 향유하고 있었는데도 조정에서 통제를 가하지 않는 것 등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소설류는 조정의 중심인 훈구파들의 능란한 문필 자랑과 편찬 사업에 힘입은 바 컸다.6)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중국으로부터 소설류는 수입 제한 품목표인 네거티브리스트(negative list:수입을 규제하는 상품의 품목표)에 단골로 올라가게 되었고 정조 임금 때에는 이를 가혹하게 엄금하였다.

어찌되었건 이 용어는 이후 유교적 모랄의 강화와 함께 가장 소설을 배척하는 비평어로 많이 사용되었다. ‘기괴하고 헛된 소리’라는 이 ‘괴탄—’류의 비평어 속에서 당시 소설의 속성인 ‘허구성’의 함의를 읽을 수 있다.

→괴탄희극지서怪誕戱劇之書․불경지설不經之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