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살아생전 충의를 지킨 송상현 부사와 김섬

2008. 8. 2. 09:34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아래 글은 ‘3. 살아생전 충의를 지킨 송상현 부사’편에 보이는 김섬이란 기생이야기입니다.

 김섬은 조선 중기의 함흥(咸興) 기생으로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의 첩이었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현재 부산 동래구 명륜동 소재의 동래성이 이 함락되고, 송상현이 전사하기 직전에 시중을 들다가 함께 순절하였지요. 임란 당시 왜군과 함께 들어 온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는 송상현의 충절과 김섬의 순절에 탄복하여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였습니다.


‘3. 살아생전 충의를 지킨 송상현 부사’

김섬(金蟾, ?~1592)은 함흥의 이름난 기생으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1)이 사랑하여 첩으로 삼았다.

선조 임금, 임진왜란에 공이 동래를 지킬 때 수많은 적군이 밀물 듯이 쳐들어 왔다. 상현이 군민을 통솔하여 남문에서 싸움을 감독하고 사기를 북돋았으나 성이 장차 함락되려하자 글을 부채에 써서는 아버지에게 전하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외로운 성에 달무리 끼어있어     孤城月暈

펼쳐진 진을 베고 누웠습니다     列陣高枕

임금과 신하의 의리 중하오니     君臣義重

부자간 은혜 가벼이 되었군요     父子恩輕


글을 마친 상현은 급히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조복을 가져다가 갑옷 위에 껴입고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적장 평조익(平調益)1)은 통신사를 따라 조선에 왕래할 때에 상현의 정성스러운 대접을 여러 번 받은 자였다. 이 지경에 이르자 평조익이 눈짓으로 상현에게 성 방벽의 으슥한 곳으로 화를 피하라 하였다.

그러나 상현은 응하지 않고 싸웠다. 그리고는 끝내 적장에게 붙잡히게 되었지만 굽히지 않고 ‘이 개 같은 오랑캐인 왜놈들!’이라고 꾸짖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김섬이 안쪽 관아에 있다가 상현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절개를 지켜 생때같은 목숨을 버리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즉시 여종 금춘(今春)과 함께 공의 처소에 가서 함께 화를 입으니, 적장이 의롭게 여겨 관을 구하여 상현과 합장하였다.

상현에게 또 다른 첩이 한 명 있었으니 성이 이(李)씨였다.

성이 함락되기 하루 전에 서울로 보내 갔는데, 중도에서 부산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다.

“내 여기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서 죽음을 맞아야해.”

그리고 동래로 되돌아가다가 여종 만금(萬金)과 같이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1536~1598)1)이 이 이씨를 자기의 여인으로 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씨가 죽음으로써 거부하니, 수길이 ‘의롭다’ 여기고는 그 마음을 빼앗지 않고 관백(關白)1)을 지낸 원씨(源氏;겐지)의 딸과 함께 같이 별채에서 살게 하였다.

이씨는 왜란이 평정되고 일본과 조선이 화친한 후에 절개를 온전히 지켜 귀국하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1) 본관 여산(礪山). 자 덕구(德求). 호 천곡(泉谷)·한천(寒泉). 시호 충렬(忠烈). 1570년(선조 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항전했으나 함락되게 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으며, 이때 그의 아비 복흥(復興)도 함께 순절했다. 충절에 탄복한 적장(敵將)은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이조판서·찬성이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 됐다.

2) 다이라(平調益)는 쓰시마 태수 소오 요시토시의 부하 장수였다. 그는 일찍이 다이라 시게노부(平調信)를 따라 사신을 수행한 적이 있어, 송상현의 인품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송상현에게 피신을 권했으나, 송상현은 의롭게 순절하였다.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에 감복한 소오 요시토시 등 일본군은 그의 시신을 성 밖 북쪽에 안장하며 "조선충신송공상현지묘朝鮮忠臣宋公象賢之墓"라는 묘표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3)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6세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시작한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해외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죽을 때까지 최고위직인 다이코[太閤:1585~1598]를 지냈다. 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의 실권을 잡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592년에 임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1597년 제2차 조선침략에 나섰으나 전투가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4) 중세 일본의 관직명. 관백은 대장군(大將軍)이라 하기도 하고 대군(大君)이라 하기도 하였다. 원씨(源氏)는 관백으로 2백여 년 간 있었고 평수길(平秀吉)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