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詩心), 그리고 기생(妓生)(3) 계생(桂生)편

2008. 7. 17. 17:12포스트 저서/못 다한 기인기사

 

3.

계생(桂生, 1573~1610)1)은 전라북도 부안의 이름난 기생이다.

성은 이(李)요 자는 천향(天香)이요, 호는 매창(梅窓)으로 시를 잘 짓고 노래와 춤을 잘 하였다.

계생은 한 태수와 몹시 사이가 가까웠다. 태수가 벼슬이 갈린 뒤 고을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워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계생은 늘 달이 밝으면 가야금을 공덕비 곁에서 타고 긴 노래를 불러 그를 잊지 못하는 속내를 보였다.

 계생이 처음에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2) 첩이 되었는데, 그가 귀경한 후에 행방은 감감해지고 편지조차 끊어졌다. 계생은 희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치지 못하여 이에 노래를 지어 그 심중을 나타냈다. 이 시조는 계생이 지은 단 한 수의 시조이다.


배꽃 비처럼 흩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이,

가을바람 떨어지는 낙엽에 임도 나를 생각할까,

천 리 밖의 외로운 꿈만이 오락가락 하는구나.


계생이 한 시대의 이름난 선비들과 시를 주고받았는데, 시집 한 권이 세상에 전한다. 아래에 그녀의 시 두어 수를 기록한다.

<임에게 보냅니다(贈人)>시는 이렇다.


 물가마을 조그마한 사립문에 찾아와보니    水村來訪小柴門

 연꽃 떨어진 연못에는 국화조차 쇠했구나   荷老寒塘菊老盆

 갈가마귀 떼는 석양 고목에서 울어대고     鴉帶夕陽啼古木

 기러기 떠날 때 알고 안개내린 강 건너네    鴈含秋意度江雲

 서울 사람 잘 변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休言洛下時多變

 정녕 인간만사 아예 듣고 싶지 않으니        我願人間事不聞

 술동이 앞에 두고 한 번 취함을 사양 마오    莫向樽前辭一醉

 신릉군의 호기도 풀숲의 무덤이랍니다 3)      信陵豪氣草中墳


이 시의 압운의 어구에서 기상이 퍽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일찍이 한 지나가는 나그네가 시를 지어 계랑에게 집적거리니 계생이 곧 운을 차운하여 화답하였다.


평생 않는 건 여기서 먹고 저기서 자는 짓   平生不觧食東家

다만 매화 창에 비끼는 달만 사랑했다오     只愛梅窓月影斜

글 짓는 이 남 깊은 속내 알지 못하고서     詞人未識幽閑意

행운이라 손가락질하며 그릇 알고 있구려    指點行雲枉者嗟4)


그리고 또 <술 취한 나그네에게 준 시(贈醉客)>가 있었다.


취한 나그네 내 옷을 휘어잡으니  醉容執羅衫

손길 따라 옷자락이 찢어 진다오  羅衫隨手裂

이깟 옷이야 아깝지 않소마는   不惜一羅衫

다만 그대와 의 상할까 두렵소   但恐恩情絶


또 <봄의 원망하는 시(春怨詩)>가 있다.


 대나무 둘린 집에 봄바람 가득하니 새들은 지저귀니 竹院春心鳥語多

 화장 지운 민낯엔 눈물 머금으며 드리운 발 걷고는 殘粧含淚捲窓紗

 가야금 끌어안고선 홀로 상사곡을 연주하니 瑤琴獨彈相思曲

 꽃은 떨어지고 봄바람에 제비는 비껴나네 花落東風燕子斜


그 시의 운율이 일으키는 운치가 청초하여 읊는 사람들로 하여금 입 안에 향이 절로 생기게 한다.

 

 

이매창묘 /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전북기념물 제65호.

 

계랑은 계유년(1573) 태생이기에 계생, 또는 계랑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본명도 가지고 있다. 계랑, 이매창은 1573년에 당시 부안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안의 명기로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시와 가무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정절의 여인으로 부안 지방에서 400여 년 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은 후 몇 년 뒤에 그의 수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