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드라이기 이름값 고(考)

2018. 2. 28. 12:37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헤어 드라이기? 풋 드라이기?
    
목욕탕에 가면 참 곤욕스러운 물건이 있다. 바로 헤어드라이기다. 명칭으로 보아 분명 머리 말리는 용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용도에서 멀찍이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그 헤어드라이기를 내 머리에 갖다 대기가 영 불편하다.
어제도 그랬다.
내 좌측 40대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 손에 들린 헤어드라이기는 주인의 손을 따라 머리가 아닌 제 그곳에서 시작하여 발까지 내려갔다. 무좀균이 있는지 열 개 발가락 하나하나 말린 사내는 드라이기를 제 앞에 놓았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내 앞에 드라이기를 가져다 제 머리를 말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그곳과 발가락 말린 물건을 머리에 갖다 대기가 불편했나 보다. 
나 역시도 본 이상에는 저 '헤어드라이기'로 머리 말릴 마음이 추호도 없다.  저  '헤어드라이기'는 분명 달라지지 않았건만, 나에게는 더 이상 그 이름값을 못한다. 저 헤어드라이기로 도저히 내 머리를 말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이상 저 헤어드라이기는 나에게 헤어드라이기가 아니다. 이름을 '00용드라이기'로 하거나 아니면 '발가락용드라이기'로 바꾸어야 한다. 
이를 두고 '헤어드라이기가 이름값을 못한다'라 할 수 없다. 헤어드라이기 문제는 헤어드라이기가 아닌,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헤어드라이기로 제 그곳과 발가락을 말린 40대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 공중목욕탕 예절 부족이 문제다. 그런데도 나에게 저 헤어드라이기는 더 이상 헤어드라이기가 아닌 혐오스런 물건일 뿐이다. 헤어드라이기는 결단코 예의 없거나 경우 없는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 내가 형편없이 되는 경우가 있다. 형편없는 사람이 아닌 나를 상대가 형편없이 대하기에  내가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두 사람만이 아닌 여러 사람일 경우에는 그야말로 곤욕스럽게 난감에 난감을 더한다. 둘이라면 내가 가버리면 되지만 여럿이 있는 데서는 내가 간들 내 뒤통수가 간지럽지 않을 도리 없다. 나 '간호윤'은 이럴 경우 철저하게 이름값을 못하고 인금은 한없이 주저앉는다. 그러고 보니 이름값은 제 할 탓도 있지만 상대에게 달린 경우도 왕왕이다.

엊그제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 나와 별로 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르지도 않는, 제법 글줄깨나 읽고 가방끈깨나 긴, '어떤 이'를 만났다. 그 어떤 이는 나에게, '책 많이 쓰셨는데 책 한 권 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 책만 쓰시지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나는 졸지에 '고전독작가 간호윤'에서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쓰는 이'라는 매우 민망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어떤 이'는 어디에 가서든 '고전독작가 간호윤'인 나를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쓰는 이'라 칭할 것이고 듣는 이는 나를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쓰는 이'로 기억할 것이라는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