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글 두 편

2017. 11. 20. 09:30학생들의 글, 리포트/학생들의 글과 리포트

'역지사지'와 창오적오라는 말로  생각해 본 글 두 편입니다. 이제 대학 1학년 학생인데도 생각할 거리를  넉넉히

줍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다

인하대학교 2170000 조00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다. 우리에게 친근한 사자성어 중 하나이며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람들이 지향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타인의 입장 또한 생각해볼 수 있어 이는 아집에만 갇혀 살아갔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때문에 역지사지는 갈등 해결의 원인이자 공감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를 무리해서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식을 듣고 난 다음날 장례식을 찾아갔고 친구와 나는 얼싸안고 울었다. 친구의 힘들어 하는 모습이 밝았던 친구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더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내가 친구의 상황이었다면 그 슬픔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서 슬픈 감정은 더욱 격해졌다. 하지만 그 다음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과 대화했다. 어제 느꼈던 감정은 단지 일회용이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평소처럼 양치를 하며 거울에 비친 어제와의 이질적인 내 모습을 보았을 때, ‘내가 이렇게 즐겁게 지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분명 내가 웃고 떠드는 이 동일한 시간에 친구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지금 느끼고 있을 친구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나는 이렇게 즐거운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었다. 분명 어제의 격했던 감정이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가라앉은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진정 어제 친구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공감했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1주일간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는 내 모습을 인지하는 순간순간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제어를 걸었다. 감정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회의감까지 느꼈다. 그렇게 일주일간을 고민한 끝에 나는 친구의 슬픔을 똑같이 느낀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지사지에 대해 생각해보던 중, 어느 한 블로그에서 ‘진정한 공감은 역지사지로 부족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이성적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공감을 이룰 수 없으며 추론하는 것과 실제의 경험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분명 역시사지는 공감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상대방의 상황과 입장을 100% 이해할 수 없다. 이를 깨달은 나는 친구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점과 이질적인 감정들로 혼란과 죄책감, 자괴감을 느꼈던 스스로를 보듬어 줄 수 있었다.

 

 친구는 아버지로 인한 슬픔을 평생 간직하며 살 것이다. 언젠가 나 또한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어찌 보면 타인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내 모습은 단순히 표면적으로 바라본 모습인 걸지도 모르겠다. 단지 친구보다 표면적으로 슬픔을 드러내는 모습이 오래가지 않을 뿐,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그 감정은 내 가슴 한편에 존재한다. 하지만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항상 공감의 감정을 끌어올리려 해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사건으로 슬픔과 안타까움이 지배했던 내 마음이 자연스레 누그러지며 가슴 한편으로 자리 잡는 동안 나는 일주일간 그 과정을 들쑤셨다. 하지만 힘들었던 일주일간의 고민 끝에 나는 깨달았다. 그 과정은 사람이 살기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평소 타인의 상황에 공감하는 자세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때, 내가 친구의 감정에 공감하며 슬퍼할 수 있음은 ‘역지사지’자세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지사지’는 그만큼 삶에 있어 중요하고 소중한 자세이다. 하지만 좋은 것을 과다하게 복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적당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역지사지’의 자세는 지향해야할 자세이지만 분명 지양해야 할 순간도 존재한다.

 

[출처]

- 네이버 한자 백과사전: http://ksc12545.blog.me/220043120838

- 블로그 인용 글: http://ksc12545.blog.me/220043120838



창오적오(蒼烏赤烏) - 검어야했던 까마귀에 대하여

인하대학교 270000 장00

까마귀는 모름지기 검었거늘, 그렇게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것은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창오적오는 진리라고 믿은 것이 진리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선입견을 타파하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검어야했던 우리네 삶 속의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이 기회를 들어 평소에 의문이 들었던 어떠한 진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한다.

 

흔히 우리는 사람의 ‘죄성’을 논할 때 7가지를 꼽는다. 교만, 식탐, 질투, 나태, 탐욕, 색욕, 분노가 그 7가지이며, 이는 영화를 비롯하여 대중매체에서 흔히 쓰이는 클리셰이기도 하다. 대중매체에서는 이 7가지 ‘죄성’을 토대로 누가 봐도 악할 수밖에 없는 범죄를 그려낸다. 그렇게 그려낸 범죄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죄성’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성’을 누가 봐도 악한 ‘죄’로만 봐야하는가? 이런 것을 없애야지만 우리네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죄성’을 배격할 수 없다. 필요 이상의 ‘죄성’은 과유불급(過猶不及)으로 당연히 문제가 되지만, 필요 이하의 경우 역시 문제가 되는, 이름지어 정도의 부족함에 따른 과유불급(寡猶不及)의 상태가 된다.

 

7대 ‘죄성’의 부족함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저서 『에티카』에서 ‘질투’를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라고 정의하였다.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기 때문에 ‘질투’를 가진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행동을 한다. 그 행동이 타인의 신체나 정신에 해악을 끼치는 행동이라면 문제가 되지만, 자기 자신을 단련시키는 행동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령 친구의 시험점수가 나보다 높게 나와서 그것에 대해 내가 ‘질투’를 가진다면, 나는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타인의 불행이 될) 시험점수를 더 높게 받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나를 단련시키는 행위가 ‘죄성’의 결과로 나왔다면, 이는 배격해야 할 일인가?

 

‘나태’의 경우, 반대되는 말은 ‘근면’이다. ‘근면’에 충직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보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방향을 택한다. 이는 생각의 부재를 낳으며, ‘근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종속되는 한계점을 낳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태’는 자기 자신을 마음 중심에 두어, 자신의 생각을 일궈나가게끔 만드는 마중물과 같다. 이러한 ‘나태’한 사람이 있기에 사회는 ‘나태’하지 않게끔 사람들에게 복지를 소망하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근면한 사람들만 있는 사회였다면 복지가 잘 이루어졌을까?

 

다른 ‘죄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마찬가지다. ‘죄성’의 결과를 이끄는 과정 안에서는 분명 사회로선 납득하기 힘든 ‘악함’이 있다. ‘질투해야 내가 발전한다.’ 라는 말과 ‘나태해야 사회가 발전한다.’ 라는 말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자가당착적 발언인가? 과정의 부조리함만을 보고 ‘죄악’을 무조건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상엔 검은 까마귀만이 있다고 말하는 천편일률적 사고가 낳은 주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회의 프레임에 맞춰 ‘죄악’이라는 까마귀는 검어져야만 했고, 검어진 ‘죄악’은 사회의 뭇매를 맞았다. 이 까마귀의 순기능을 다시금 생각해내고, 인정했을 때, 검어야했던 까마귀는 비로소 색상에 구애받지 않는 창오적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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