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

2017. 4. 11. 10:53글쓰기/글쓰기는 연애이다

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

2017.04.11. 10:23
URL 복사 통계 http://blog.naver.com/ho771/220980343646

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

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

저자 존 카밧진

출판 불광출판사

발매 2012.11.01.

상세보기
(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이란 책을 읽습니다.

저자는 부처님의 45년 설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 나를, 내 것이라 집착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화, 즉 자기 것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합니다.

옳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도, 내가 만나는 사람 모두 유한합니다. 모두 사라질 것들입니다. 따라서 내것(자기 것)이라 집착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을 집착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매 순간의 집착은 자기화니 자기 것에 대한 집착과는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자기화니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은 영원토록 소유하려 하기에 욕망의 노예가 되지만 매 순간의 집착은 잠깐의 소유에 만족하려 하기에 욕망의 주인이 되어서입니다.

잠깐의 소유,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이를 카르페디엠!이라 하였습니다. 즉 '이 순간을 즐겨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매 순간만 내가 욕망의 주인으로 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라캉은 욕망의 이론에서 욕망의 끝은 '죽음'이라하였습니다. 인간은 끝없이 욕망을 좆는 존재라는 데서 착안한 이론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인간은 욕망덩어리요, 집착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욕망은 욕망을 낳고, 또 욕망은 욕망을 낳고ㅡㅡㅡㅡㅡ라는 가정형에 기반한 논리입니다.

하나의 욕망을 하나의 욕망으로만 한정시킨다면 굳이 죽음까지 끌어 올 필요가 없습니다. 꽃을 보고 싶다는 욕망, 사랑하는 이를 이 순간 안고 싶다는 욕망, ㅡㅡㅡ이렇게 순간의 집착에 충실하고 순간의 욕망에 만족한다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의 주인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기화니 자기 것에 대한 영원한 집착과는 다릅니다. 순간 순간의 집착이기에 영원에서 오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 임제선사도 "수처작주 불수위위지야"라고 일갈 하신게 아니겠는지요.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남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마라."라고 말입니다.

결코 저자의 의견에 딴지를 걸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주인은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내가 아닌지요? 내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는 것 아닌지요? 그래야만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목숨 붙이고 살아갈만한 존엄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겠는지요?

그렇기에 '순간순간의 집착과 욕망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닐까요?'라고 생각해보는 독후입니다.

첨언:​ 소크라테스는 '나는 욕망에 관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욕망의 주체는 내가 아닌  '대상의 욕망'입니다. 혹 내 욕망이 '대상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아닌가?'를  꽤 생각해 보아야할 듯합니다.



'글쓰기 > 글쓰기는 연애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도 웃을 일>  (0) 2018.05.08
. “나도 너만큼 알아. 이제 더 이상 전문가 의견 안 들어”  (0) 2017.05.09
지둔(遲鈍)의 공(功).  (0) 2015.12.08
아델라인  (0) 2015.12.08
캐스트 어웨이  (0) 201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