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둔(遲鈍)의 공(功).

2015. 12. 8. 15:43글쓰기/글쓰기는 연애이다

<문예지에 준 글>

지둔(遲鈍)의 공().

경계할지어다. 재주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내 학부 졸업 논문이 연암 박지원 연구였으니 근 30여년이 다되도록 그를 본 셈이다. 그동안 석사학위 논문인 연암 소설에 나타난 참여의식 연구(1990)를 시발로 개를 키우지 마라-연암 소설 산책(2005),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일세(2006), 그리고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2012)와 연암의 평전인 당신, 연암(2012)을 출간했지만 아직도 그의 옷섶 한 자락 잡지 못하였으니 참 보암보암 여간 아닌 분이다. 이 연암 선생 말씀이다.

 

나는 기억력이 아주 나쁘다.”

 

여담 같은 이야기련만, 연암의 말이기에 나 같은 지둔한 행내기로서는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연암 선생께는 송구하지만 저 말 한 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암 선생의 기재(奇才)를 알기에 저 말을 곧이 믿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내가 연암을 계속 공부해 가도록 붙잡아 주는 든든한 손임에는 분명하다.

언젠가 나는 과정록에 보이는 이 부분을 보고는 내심으로 반색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아버지께서는 책을 보시는 것이 몹시 더뎌 하루 종일 한 권도 못 보셨다. 늘 말씀하시기를 나는 기억력이 천성적으로 아주 나빠 늘 책을 보다 덮는 즉시 잊어버리니 머릿속이 멍한 게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단다.’”

 

에이, 그게 겸사란 것 아니요!”라고 말하는 이들을 위하여 바특하지만 증거를 하나 더 대겠다. 아래 글은 연암의 처남 이재성(李在誠, 17511809)이 한 말이다.

 

내 매형 연암은 책보는 것이 매우 더디셨지. 내가 서너 장을 읽을 때에 겨우 한 장을 읽을 뿐이고, 또 기억하여 외우는 재주도 나보다 좀 떨어지셨어.”

 

매형인 연암이 미워서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험담을 하겠는가. 어쨌든 처남과 자신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온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억력이 나쁘고 책 읽는 속도가 더딘연암 선생의 글이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반열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지는 짐작이 간다. 이런 연암을 통해 타고난 재주꾼도 있지만 지둔의 공을 쌓아 재주꾼이 되는 경우도 있음을 확연히 본다.

재주란 자고로 자랑할 것은 못 된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재승박덕(才勝薄德,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음)인 분들을 의외로 두두룩이 보았다. 그 분들이 말씀하는 것을 들을라치면, 연방 쓴 입맛만 다시다가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거만한 어품(語品)에 더 듣다가는 정말 천탈관이득일점(天脫冠而得一點)이요, 내실매이횡일대(乃失枚而橫一帶)!’라고 속으로 욕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궁중 수라간을 배경으로 하여 몇 해 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대장금대사 한 토막에도 이러한 재주에 대한 대화가 있다.

 

한상궁: 백성들이 곰탕을 먹는 이유는 좋은 고기와 뼈를 먹을 수 없기에 잡뼈로 우리고 또 우리어 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빼내 맛에서나 몸에나 좋은 것을 먹기 위함이다. 헌데 너는 오로지 이기겠다는 마음에 음식을 하는 기본자세도 다 팽개치고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좋은 머리로 편법이나 생각해낸 것이 아니더냐! 내 일찍이 네가 숯을 생각해내고 광천수를 생각해내 냉국수를 만들고 어선(御膳,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이르던 말)경연에서 숭채(菘菜,배추만두)를 만들어내는 재기를 높이 사 너에게 맛을 그리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 재기(才氣)가 너에게 오히려 독이 돼버렸구나!”

 

한상궁이 재주를 믿는 장금에게 재기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세상의 순리를 따끔히 이르는 말이다. 한상궁의 말로 연암의 기억력 운운을 되짚어 본다면, 연암은 자신의 재주를 경계해서였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하고 좀스런 소기(小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결의다짐이라고 해도 무난하다. 사실 당시에 연암의 한문소설이나 글들에서 비범한 그의 재주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글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진하게 우려낸 뽀얀 사골 국물에 화려한 고명으로 치장하여 보기도 먹기도 좋은 음식일 것 같은 것도 알고 보면 재주를 경계하는 마음에서 지둔의 공을 더하여 얻어낸 결과이리라 생각한다.

연암의 이러한 겸손은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에서 나는 삼류 선비다!(余下士也)”라고 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자기 문장을 과신하며 동료들의 글 솜씨를 과소평가하는 문인상경(文人相輕)’이란 말이 널리 퍼졌던 때이다. 연암이 열하일기를 쓴 것은 44세였고 이미 조선에 그의 문명이 적잖이 알려져 있었지만 열하를 여행하면서 조선 선비 연암은 자신의 왜소함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삼류[下士]’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스스로를 삼류라 여긴다는 것은 (,노력)’을 더해야겠다는 다짐이리라.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이란 분이 있는데 기억력에 관한한 빼놓을 수 없는 분이라 짚어본다. 이 양반의 독서 편력은 정말 대단하였는데, 1만 번 이상 읽지 않은 책은 독서 목록인 독수기에 올리지도 않았다.(다산 정약용 선생은 김백곡독서변이란 글에서 백이전하나만 읽는데도 이미 4년이 지나간다며 김득신의 독수기는 누군가가 그를 위해 기록한 것이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펴기도 하였지만 그의 노력만은 넉넉히 들어줄만하다.) 특히 김득신은 사마천의 사기, 백이전(佰夷傳)을 애독하여 113000(), 현재 수치로는 113000번을 거듭 읽어 서실의 이름조차도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 하니 그 공이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하루는 이 분이 길을 가다 책 읽는 소리를 듣고는 그 글이 익숙하기는 한데 어떤 글인지 생각이 나지 않네.”라고 하자, 말고삐를 끌고 가던 하인이 백이전구절임을 일러주었다 한다. 학문의 힘이 어디 일조일석(一朝一夕)길러지겠는가마는, 평생 10만 번이 넘게 읽어 놓고도 그 구절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를 정녕 몰랐다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이 김득신이란 분은 지둔한 기억력에 굴하지 않고 공부하여 뒤늦게 과거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고야 만다. 곰삭힌 홍어회에 탁주 한 사발 같은 그의 한시비평 또한 저러한 지둔의 공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것을 보면 제아무리 한 번 듣거나 보거나 한 것을 잊지 않고 오래 지니는 총기인 지닐총이 없다하여도 공부는 가능한 것인가 보다.

연암의 낭환집서(蜋丸集序)라는 글에는 또 이런 부분도 있다.

 

쇠똥구리는 스스로 쇠똥을 사랑하여 여룡(驪龍,몸빛이 검은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역시 그 구슬을 가지고 저 쇠똥구리의 쇠똥을 비웃지 않는다.”

 

낭환이란 쇠똥구리이다. 쇠똥구리가 여룡의 구슬을 얻은들 어디에 쓰며 여룡 역시 쇠똥을 나무라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 재주 없음을 탓할 것도 없지마는, 저 이의 재주를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하고 재주가 있다고 재주 없음을 비웃지도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 꾸준한 연마를 요구하는 비평에 관한 글이지만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라는 연암의 저 위의 말과 선을 잇댄다.

세상을 보는 눈을 조금만 넓혀보자.

() 똑똑이들이 많은 세상이지만은 지둔(遲鈍)의 공(), 즉 둔하지만 끈기 있고 느리지만 성실히 노력한 자들로서 세상에 이름 석 자를 우뚝 남긴 분들도 꽤 있다. 저런 이들이 우리에게 뚱겨주는 인생 훈수는 둔재라고 여기는 이들도 공(노력)을 쌓으면 된다.’이다. 저 중국의 내로라하는 문장가 유협의 문심조룡』 「지음편(知音篇)에 보이는 무릇 천 곡의 악보를 연주해 본 뒤라야 소리를 깨달을 수 있고 천 개의 검을 본 뒤라야 보검을 알 수 있다.”라는 말도 저 지둔의 공에 잇댄다.

내 전공은 고전문학, 그것도 고소설이다. 고소설에 관한 책을 쓰고 논문을 쓰는 것이 내가 하는 공부이다. 나는 이 공부를 하며 글(논문)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 짓자면 책상글(논문)’발품글(논문)’이다. ‘책상글(논문)’은 재주 있는 이들이 주로 쓰고 발품글(논문)’은 발로 일궈낸 글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학자들은 책상글(논문)’을 더 친다.

허나, 공교롭게도 내가 쓴 글들은 거의 발품글(논문)이다. 발품글(논문)이지만 열심히 쓰는 이유는 저 지둔의 공을 믿어서다. 그래, 나는 내 수첩에 소중히 넣어가지고 다니는 글귀가 있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은 가던 길을 그만 두겠다는 게 아니냐. 이놈! 지금 네가 그러하구나(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바로 논어 옹야(雍也)편에 보이는 공자와 제자 염구의 대화이다.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위의 저 말로 호되게 야단을 친다.

앞 단락에서 이미 고백했듯이 재주 없는 내가 고전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혹 난장이 교자꾼 참여하 듯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나, 또 종종 재주 있는 이들이 내 책과 논문을 콩팔칠팔 허투로 내두른 소리라는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낼 때면 저 글을 꺼내본다. 물론 공자의 말씀이 나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학문에 비등점(沸騰點)이 없음은 명백한 이치요, 재주 있는 이들만이 공부해야한다는 진리 또한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저 말과 연암 선생의 글을 손 가까이 두고 공부를 하다 절벽 같은 심정일 때면 떠들추곤 한다. 그럴 때면 야박한 공부머리로 학문 언저리나마 맴도는 나지만 적이 위안을 받음은 물론이다. 또 운명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우연이란 다리를 놓아준다하였으니 지긋이 의자에 엉덩이를 오래도록 붙이려한다. 그래 오늘도 고전을 포착하는 내 눈이 성글기 짝이 없지만, 몽당붓솔 하나들고 내 책상에 붓질하는 이유를 저 지둔의 공에서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