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4. 17:39ㆍ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글을 깁다가>
나는 글을 쓰면 수 백 번 깁고 깁는다. 깜냥이 고만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글쓰기를 중단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셀 수조차 없다. 그러다가도 ‘천형이러니’하고 또 은근하고도 슬쩍, 책상에 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써 놓은 글을 깁고 또 깁는다. 엊그제 『아! 18세기, - 나는 조선인이다』(새물결출판사, 근간)를 깁다가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문학과 지성사, 2005)라는 책을 보았다. 그래, 아래와 같은 글을 기워 넣었다.
- 날이미지와 시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05.06.30.
이 글을 마칠 때쯤 오규원 시인의 『날 이미지와 시』(문학과 지성사, 2005)라는 책을 보았다.
오 시인은 문학상을 여러 차례 받은 교수로 한국 현대 시사에서 시적 방법론에 대해 첨예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 중 한 분이다. 그는 특히 ‘시의 언어와 구조’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탐구했다. 결과,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전의 현상 자체가 된 언어’를 ‘날이미지라’하고 이러한 시를 ‘날이미지 시’라고 명명하였다.
이옥 선생의 「시장」이 대뜸 떠올랐다. 200년 전, 이옥 선생의 <시장>과 오 시인이 ‘사실적 날이미지’로만 이루어졌다는 시 한 편을 함께 놓는다. 독자제위께서 읽어보시라. 그러고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거리를 느껴보셨으면 한다. 내가 잰 거리는 손 한 뼘 차이도 안 난다.
<시장(市記)> / 이옥(1760~1815)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은 저잣거리와 가깝다. 매양 2일과 7일이면 저잣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왁자지껄하였다. 저잣거리 북쪽은 곧 내가 거처하는 남쪽 벽 아래이다. 벽은 본래 창이 없는 것을 내가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구멍을 뚫고 종이창을 만들었다. 종이창 밖, 채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곳에 낮은 둑이 있다. 시장거리에 가기 위해 드나드는 곳이다. 종이창에 구멍을 내었다. 겨우 한쪽 눈으로 내다 볼만했다.
12월 27일 장날이다. 나는 무료하기 짝이 없어 종이창 구멍을 통해서 밖을 엿보았다. 때는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고 구름 그늘이 짙어 분변할 수 없었다. 대략 정오를 넘긴듯했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사람,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사람, 닭을 안고 오는 사람, 팔초어(문어)를 들고 오는 사람, 돼지 네 다리를 묶어 짊어지고 오는 사람, 청어를 묶어 들고 오는 사람, 청어를 엮어 주렁주렁 드리운 채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오는 사람, 대구를 가지고 오는 사람, 북어를 안고 대구나 문어를 가지고 오는 사람, 담배 풀을 끼고 오는 사람, 미역을 끌고 오는 사람, 섶과 땔나무를 메고 오는 사람, 누룩을 지거나 이고 오는 사람, 쌀자루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곶감을 안고 오는 사람, 종이 한 권을 끼고 오는 사람, 짚신을 들고 오는 사람, 미투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 큰 노끈을 끌고 오는 사람, 목면포를 묶어서 휘두르며 오는 사람, 사기그릇을 끌어안고 오는 사람, 동이와 시루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 돗자리를 끼고 오는 사람, 나뭇가지에 돼지고기를 꿰어 오는 사람, 강정과 떡을 들고 먹는 어린애를 업고 오는 사람, 병 주둥이를 묶어 차고 오는 사람, 짚으로 물건을 묶어 끌고 오는 사람, 버드나무 광주리를 지고 오는 사람, 소쿠리를 이고 오는 사람, 바가지에 두부를 담아 오는 사람, 사발에 술과 국을 담아 조심스럽게 오는 사람, 머리에 인 채 등짐을 지고 오는 여자, 어깨에 짐을 메고 어린애를 목덜미에 얹고 오는 남자, 어린애를 목덜미에 얹고 다시 왼쪽에 물건을 낀 남자, 치마에 물건을 담아 옷섶을 잡고 오는 여자, 서로 만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사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서로 화를 내며 싸우는 사람, 손을 잡아끌면서 장난치는 남녀, 갔다가 다시 오는 사람, 왔다가 다시 가는 사람, 갔다가 또 다시 바삐 돌아오는 사람, 넓은 소매에 자락이 긴 옷을 입은 사람, 솜 도포를 위에 입고 치마를 입은 사람, 좁은 소매에 자락이 긴 옷을 입은 사람, 소매가 좁고 짧으며 자락이 없는 옷을 입은 사람, 방갓을 쓰고 상복을 입은 사람, 중 옷에 중 갓을 쓴 중, 패랭이를 쓴 사람 등이 보인다.
여자들은 모두 흰 치마를 입었는데, 혹 푸른 치마를 입은 자도 있었다. 어린애를 업고 띠를 두른 자도 있었다. 남자가 머리에 쓴 것 중에는 자주빛 휘향(방한모)을 착용한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며, 목도리를 두른 자도 열에 두셋이었다. 패도(칼집이 있는 작은 칼)는 어린애들도 차고 있었다. 서른 살 이상 된 여자는 모두 조바위를 썼는데, 흰 조바위를 쓴 이는 상중에 있는 사람이다. 늙은이는 지팡이를 짚었고 어린애는 어른들의 손을 잡고 갔다. 행인 중에 술 취한 자가 많았는데 가다가 엎어지기도 하였다. 급한 자는 달려갔다. 아직 다 구경을 하지 못했는데, 나무 한 짐을 짊어진 사람이 종이 창밖에서 담장을 정면으로 향한 채 쉬고 있었다. 나도 역시 책상에 엇비슷이 기대고 누웠다. 세모인 터라 저잣거리가 더욱 붐비고 있다.
<지는 해> / 오규원(1941~2007)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 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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