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를 꼭 해야만 하는 자문자답 셋>

2017. 4. 18. 08:44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투표를 꼭 해야만 하는 자문자답 셋>
    
하나.
) 왜 백성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하나?
)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들의 간과 뇌수가 들판에 흩어지기 때문이다.
    
“거, 뭐 그렇게 정치에 관심이 많나? 그렇다고 세상이 바뀌나.”
엊그제 지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내가 정치적인 발언(?)을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
이익(李瀷,1681(숙종 7)∼1763(영조 39) 선생의 『곽우록(藿憂錄)』이라는 책이 있다. 곽식자가 육식자에게 쓴 책이다. ‘콩 곽(藿)’은 백성이요, ‘근심 우(憂)’는 걱정이니 책 제목은 ‘백성의 걱정’이라는 뜻이다. 즉 ‘곽식자’는 콩잎을 먹고사는 백성으로 '육식자'인 고기반찬을 먹고 사는 관리에 빗댄 말이다.
이익이 『곽우록(藿憂錄)』을 쓴 취지는 ‘간뇌도지(肝腦塗地)’ 넉 자로 정의되니 이렇다.
  
“육식자(肉食者:고기를 먹는 관리)가 묘당(廟堂:의정부로 지금은 정부)에서 하루아침이라도 계획을 잘못하면 곽식자(藿食者:콩을 먹는 백성)의 간(肝)과 뇌(腦)가 들판에 흩어지는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조조(祖朝)라는 백성이 진 헌공(晉獻公)에게 글을 올려 나라 다스리는 계책을 듣기를 요청하자, 헌공이 “고기 먹는 자가 이미 다 염려하고 있는데, 콩잎 먹는 자가 정사에 참견할 것이 뭐 있느냐.[肉食者謀之 藿食者何有]”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그렇다면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 헌공은 조조를 스승으로 삼는다.(『설원』 ‘선설’항)
이익 선생은 ‘관리가 잘못하면 간(肝)과 뇌수(腦髓)가 들판에 흩어져 죽는 것은 백성’이라며 그러니 ‘목숨이 달린 일에 어떻게 간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선생은 백성들의 간과 뇌수가 들판에 흩어져 죽는다는 ‘간뇌도지(肝腦塗地)’라는 말을 끌어왔다. 참혹한 죽음을 형상화한 말이다.
이 말을 하는 선생의 심정을 구차하게 몇 자 글줄로 설명할 필요 없다. 선생 자신은 곽식자인 천한 백성이기에 국가의 문제를 논할 자격이 없지만, 곽식자들인 당신들이 나라 정책을 잘못하니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간뇌도지하지 않느냐?는 항변이다. 그러니 『곽우록』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선생의 절규요 격정의 토로이다.
이왕 나온 말이니 다산 선생 말씀도 몇 자 덧붙인다.
다산이 36살 되던 해, 황해도 곡산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곡산은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가 접하는 지역이다. 민란의 원인은 이전 군수의 가혹한 세금징수였다. 7천여 주민들 중 1천여 명이 민란을 일으켜 관가를 습격하였다. 주모자는 이계심(李啓心)이었다. 조정에서 즉시 이계심을 잡으려 하였지만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조정에선 다산을 신임군수로 임명하여 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다산이 고을로 부임하는 도중 이계심이 제 발로 걸어 나와 12항목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탄원서를 읽어보니 하나 같이 타당하다고 판단하고서 이계심을 그 자리에서 죄가 없다고 방면하였다고 한다. 그 때 방면한 이유를 다산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통치자가 밝지 못한 까닭은 백성들이 제 한 몸 건사하는 데만 열중할 뿐 그 고통으로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謨身 不以瘼犯官也)”
    
다산은 ‘이계심이 제 한 몸 건사하는 데 열심이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관에 항의하며 관의 어두움을 밝히고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도록 했으니 그것이 어찌 죄라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犯官(범관)’이란 말이다. ‘범관’은 ‘관청을 범한다’는 말인데, 백성이 그 고통으로써 관청에 항의해야만 비로소 관이 밝아지고 현명해진다고 생각이다. 백성들이 정치에 관심 가져야함을 다산은 이렇게 말했다.
다산의 민본주의가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는데, 이 역시 백성이 근본임을 되새기게 한다.
다산은 또 ‘戴民以爭(대민이쟁)’이란 말도 했다. ‘대민이쟁’은 백성을 떠받들고 윗사람과 다투라는 말이다.
    
“지극히 천해 어디 호소할 데도 없는 사람이 소민(백성)이다. 높고 무겁기가 산과 같은 자도 역시 백성이다. 윗사람이 아무리 존귀하고 높더라도 백성을 이고(떠받들고) 다툰다면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나(至賤無告者 小民也 隆重如山者 亦小民也 上司雖尊 戴民以爭 鮮不屈焉)”
    
저 시절은 왕권국가시절이다. 자칫 왕의 권력에 대드는 글줄을 쓴다는 것은 목숨 줄을 여러 개 달고 있지 않다면 할 수 없는 매우 비효율적인 행위였다. 그런데도 일개 백성이 저러한 책을 쓰고 말을 하였다.
나는 곽우록을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작금의 이 사태를 보고서 어찌 곽우록을 아니 쓰겠는가. 수많은 곽우록이 쓰이고 말해져야한다. 곽우록을 쓰고 말하는 것은 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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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선거를 꼭 해야 하는가?
) 선거를 안 하거나 잘못 투표하면 그 나물에 그 밥상이 또 차려진다.
    
이번 선거는 18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촛불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마치 언론은 자기들이 정치 밥상을 차려 놓은 양 설쳐댄다. 자기 방송사에 유리한 후보를 은연 중 내세우고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세대 간을 이간질시키는가하면 북한까지 적절히 끌어들여 자사만을 위한 언론플레이를 한다. 마치 정치를 한낱 어릿광대의 놀음판으로 전락시키고 백성들을 꼭두각시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린다.
안 된다. 이번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반드시 투표에 임해야 한다. 투표를 잘못하면 우리는 또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야한다. 이미 우리는 수차례 그런 경험을 했다. 해방 후 친일 청산을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질기게 이 나라를 괴롭히지 않는가. 대한민국을 상식이 통하고, 정의의 샘이 솟는 맑은 나라로 만들어야한다. 그래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 나라에서 태어난 행복과 자긍심을 주어야한다. 언 발에 오줌 누기는 안 된다.  물론 입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를 안 하거나 잘못 투표하면 그 나물에 그 밥상들이 또 차려지고 얼마간 지나면 또 촛불민심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책임지기에 더욱 투표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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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누구를 뽑아야하는가?
답) ㉮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사람이라야 한다.
    
우리는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두루뭉수리한 상태를 좋아한다. 음식점에 가서도 ‘아무거나 주세요’한다. ‘대충’, ‘적당히’라는 부사는 자주 사용하는 일상어다. 이러한 현상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는데서 출발한다. 지금도 우리 학생들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묻고 대답하기를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산 선생은 이러한 폐단을 ‘오동누습(吾東陋習)’이라하였다. 오동누습은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버릇을 고쳐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맹목적으로 외우는 《천자문》의 폐해를 지적한 말이다. 다산 선생은 그의 《다산시문집》 제17권 <증언(贈言)>‘반산 정수칠에게 주는 말’에서 《천자문》의 폐해를 아래처럼 직설적으로 써놓았다. 체계 없는 《천자문》을 쓸데없이 암기하는 것을 지적하는 발언이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서거정(徐居正)의 《유합(類合)》과 같은 것은 비록《이아(爾雅)》와 《급취편(急就篇)》의 아담하고 바른 것에는 미치지 못하나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보다는 낫다. 현ㆍ황(玄黃)이라는 글자만 읽고, 청ㆍ적ㆍ흑ㆍ백(靑赤黑白) 따위 그 부류에 대해서 다 익히지 않으면 어떻게 아이들의 지식을 길러 줄 수 있겠는가? 초학자가 《천자문》을 읽는 것이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이다”
    
저러한 선각께서 “이것은 우리나라의 제일 나쁜 더러운 버릇이다(最是吾東之陋習)”라고 까지 극언을 하셨거늘, 오늘날 모든 어린아이들의 책상에 《천자문》이 놓여있다.
    
조선 최고의 글쓰기 고수 연암 박지원 선생 역시 <답창애지삼(答厓蒼之三)>에서  《천자문》의 페해를 지적하였다. 어린아이와 선생의 대화를 통해 연암은 자신의 언어인식을 재미있게 드러냈지만 저기에 《천자문》의 허가 있다.
    
마을의 꼬마 녀석이 천자문을 배우는데 읽기를 싫어하여 꾸짖었답니다. 그랬더니 녀석이 말하기를, “하늘을 보니 파랗기 만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이 때문에 읽기 싫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주려 죽일만합니다.(里中孺子 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我聰明 餒煞蒼頡)
    
전문이 겨우 서른 넉자에 불과한 글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본 하늘은 그저 파랄 뿐이다. 그런데 ‘하늘 천(天)’자에는 전혀 그런 내색조차 없다. 《천자문》의 첫 자는, "하늘이 검다"이다. 하늘이 왜 검다는 말인가? 이를 5-6살의 코흘리개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아이들은 하늘이 검은 이유를 모르니 묻지만, 요령 있게 이를 설명해줄 선생이 없다. 그러니 선생은 아이들에게 ‘말이 많다’하고는 무작정 외우라고만 시킨다. 배워도 배우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반벙어리 배움’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천자문》의 첫 자부터 이러하니 999자를 어떻게 감당해 내겠는가. 이런  《천자문》을 지금도 외우라하고 마법천자문까지 설쳐댄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교육환경이요, 사회적 분위기이다.  시시비비의 연원 문제는 이만 각설하자.
‘옳고 그름’은 명백히 가려져야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다는 결코 좋은 게 아니다.’ 한 표를  얻으려 좌고우면하는 후보자는 안 된다.

답) ㉯ 예의와 염치를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
이번 일련의 탄핵과정을 보며 작금 한국 정치인들의 수준을 여과 없이 보았다. 저들은 후안무치(厚顔無恥)를 좌장군으로 삼고 무치망팔(無恥忘八)을 우장군으로 삼아 사악한 힘으로 정의와 민주주의를 연파하고 국정을 농단한 한 사람을 위한 친위대였다. 제 주인인 국민을 낮잡아보고 능욕, 유린하였다.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요구하면서도 자신들에게는 무한정의 불법과 국기문란을 허용하고 혐오스런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 도저히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야만적 행위가 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18세기 실학자 우하영(禹夏永, 1741년(영조 17) ~ 1812년(순조 12) 선생은 이런 말을 하였다. “사유(四維)가 제대로 펼쳐지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못 되고 사람도 사람꼴이 되지 못 한다.”라고. 사유란,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예의염치'이다. 예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과 그러한 정치를 그대로 방관하는 국민이라면 그 나라의 존재의의는 어디서 찾아야하는가?
예의와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는 중력이요, 산소 같은 것이다.
    
답) ㉰ 올곧은 사람이라야 한다.
정치란 정(政)을 공자는 ‘바를 정(正)’이라하였다. 정치란 마키아벨리즘이 아니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떠한 권모, 술수 등 교활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서구의 정치사상은 모방할 게 못된다.  사실 정치란  바름만 있으면 된다. 당연히 이번 19대 대통령은 ‘올곧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올 곧은 사람’의 기준은 내 양심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책에서 배우고 삶을 통해 터득한 그 모든 것이 내 양심의 기준점이다. 이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고 이 나라를 정의로운 나라로 만들 정치인을 뽑아야한다. 그래야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나라, 정의로운 나라를 물려줄 수 있다.
이미 우리 대한민국은 4.19,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부패와 부도덕, 정의가 없는 독재시대를 이겨낸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의 고통이 있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온 이 나라의 역사를 과거로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작금의 이 잘못된 18대 대통령 선택이 국가와 민족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 가를 우리는 생생히 보았다.
이 아름다운 강산, 내 나라에서 우리의 후세들이 주권자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나라를 만드는 일, ‘올 곧은 사람’에게 달렸다. 그 투표의 책임이 이 시대 우리들 손에 있다.
사실 19대 대통령은 이미 와있다. 우리의 머릿속에----. 내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2017년 4월 17일, 19대 대선 선거전 시작 날, 휴휴헌에서 간호윤
    
: 무치망팔(無恥忘八):원래 앞 구절은 효제충신예의염치이지요. 그런데 ()’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치(無恥)’, 해석하자면 부끄러움을 모른다입니다.
앞 구절로 미루어 일이삼사오육칠이 아니라, ‘일이삼사오육칠팔이지요. 이 없습니다. 그러니 망팔(忘八)’이지요. 여기서 ()’은 삼강(三綱)에 오륜(五倫)을 더한 것이니, 인간의 기본 윤리인 삼강과 오륜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는 달리, , , , 치에 효, , , 신 사덕(四德)을 추가해 사유팔덕(四維八德)이라하고, 이 팔덕을 망각한 자를 망팔(忘八)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종종 쓰는 망할은 이 망팔이 변한 것이라 합니다. 여하간 이 망할!’이 많아지면, 사람 사는 세상이 힘겹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