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동시 유감

2015. 5. 11. 10:22글쓰기/이 세상은 사각의 정글이 아니다!

초등교사가 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에 아니 쓸 수 없어 삼가 몇 자.

<문제가 되자 출판사에서 전량 회수했다는 문제의 동시집, '어린이 우수작품집 시리즈7'이라는 글구가 참 어른들스럽다.> 

잔혹동시를 읽어 보았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라는 내용이다.

얼마든 이런 시를 쓸 수 있다. 10세 아이가 쓴 이 시의 내용은 초·중고 생들의 입에서 흔히 듣는(?) 어휘의 모음일 수도 있고(나도 버스에서 여고생들이 x’이라는 인칭을 제 어머니에게 쓰는 것임을 들은 적도 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린 아이의 슬픈 고백을 대변한 시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우리 사회의 민낯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이기에 어른들은 한없이 부끄러워야한다. 더욱이 시란, 제 감정을 써낸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잔혹동시운운은 오히려 동시의 한 장르탄생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아이의 시를 두고 우리사회가 마치 공분(公憤)이라도 느낀양 호들갑을 떠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는 동시집으로 발간되었다는데 있다. 비록 동시집이라하여도 우리 사회에서 10살의 아이가 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기성 시인들조차도 시집은 자비로 출간한다. 더욱이 작금의 출판상황은 더욱 나쁘다) 여기에 출판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아이의 시쓰기부모의 도움(출판사 물색)출판사의 출간 결정원고 교정출판판매라는 복잡한 단계를 걸쳐야만 독자의 손에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10살의 소녀가 할 일은 시 쓰기에서 끝나고 나머지는 모두 어른들의 손에서 이루어져야한다. , 부모와 출판인(여기에 출판된 동시집을 사는 것이기에 독자층도 어른임을 고려해야한다)이다.

기사를 읽어보니 이 아이의 어머니는 시인이고 또 첫째 아이의 시집도 출간해 주었다고 한다. 첫째 아이도 출간해 주었으니 둘째 아이도 출간해 준 것이란다. 시에 관심이 있는 부모임에 틀림없다. 출판사에서는 이를 출간하였다. 출판은 출판비가 들기에 좋은 작가의 발굴도 있지만 반드시 영리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혹여, ‘잔혹동시운운하며 이 아이의 시를 책망하려면, 마땅히 그 책망은 이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책망은 부모가 들어야하지 않을까? 제 아무리 시를 잘쓴다고 부모가 출판사를 섭외하여 동시집을 출간해주는 부모가 몇 명이나될까? 더욱이 10세 아이가 쓴 시를 꼭 출판사를 통해 내줘야할까? 학급문집처럼 작게 시집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면 돈도 들지 않고 아이의 시 쓰기도 장려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 대중을 상대로 10세 아이의 시를 출간한 저의가 무엇인가? 혹여, ‘10세 시인으로 등극시켜 다른 아이들과 차별성을 갖추게 하려는 저의가 아닌가?

둘째 책망은 출판사의 몫이다. 부모는 의문형 책망이지만 출판사에겐 마땅한 책망이라고 생각한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은 사실 시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10세 시인의 천재성은 더욱 아닌, 학원에 가기 싫은 한 어린아이의 볼멘소리일 뿐이다. 이 아이의 다른 시를 읽어보니 여기저기 일부 반짝이는 어휘가 보인다. 오히려 편집자(출판사)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을 넣음으로써 다른 시까지도 흠집냄을 이미 원고 수정 단계를 거치며 몰랐을 리 없다.(만약, 몰랐다면 출판사라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이 시를 수록하여 일반 대중이 사서 읽으라고 서점에 배포하였다. 혹여, 10세 아이의 자극적인 시를 통해 영리를 꾀해보려는 출판사의 꼼수라는 저의가 아닌가?

 

그렇다면 누가 더 잔혹한가?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이라는 시를 쓴 10세 아이인가?

아니면, 부모?

아니면, 출판사?

아니면, ‘잔혹동시라 칭하며 호들갑을 떠는 우리사회?

이렇든저렇든, 20155월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 잔혹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래는 오늘 자, 중앙일보 기사의 일부이다. “시는 시일뿐인데 진짜로 여겨라는 아래 부제는 시를 쓰는 이에 대한 모독이다. 시는 자신이다. 자기의 내면을 진솔하게 담아내기에 진실이다. 맑은 감정 우려낸 순수한 진실이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