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사랑을 욕망하다

2014. 8. 16. 10:03글쓰기/글쓰기는 연애이다

르네지라르니 라캉을 들먹일 필요없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해무〉,  '바다에 낀 안개'라는 다소 음습한 제목을 문패로 단 영화를 꿰뚫는 동선이다.
욕망의 동선에는 여덟 개의 욕망이 담쟁이덩굴처럼 얽혀있다.
'전진호'의 선장인 철주(김윤석 분)는 오로지 배가 욕망이다. 낡은 배 한 척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고 결국 그 배의 닻이 자기를 죽음의 해저로 끌어들인다.  '전진'이란 무시무시한 두 글자도. 그에게는 배가 왕국이고 삶의 전부였다. 가정도 없었다. 아내는 돈을 위하여 매춘을 일삼는다.(그가 배의 항로를 결정짓는 선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는 이미 우리의 항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완호(문성근 분)는 전형적인 선량한 소시민이다. 그는 소시민적인 삶, 그가 꿈꾸는 욕망은 선량한 사람의 세상이다. 그러나 그 세상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 섞이지 못 하고 숨어 살다가 최후를 맞는다.(그가 배의 심장인 기관장이란 것을 생각하면 영화는 이미 우리의 심장이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영(김상호 분)은 가족을 욕망한다. 배에서의 일과 가정에서의 일을 무 자르듯이 나눈다. 배에서의 일은 가정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오로지 가정으로 돌아가고자 한 그의 욕망은 갑판장으로서 옳고 그름을 잃게 하고 죽음을 맞는다.
경구(유승목 분)와 창욱(이희준 분) 은 각각 돈과 여인을 욕망한다. 원초적인 욕망이다. 이들은 결국 가장 추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우리의 삶 중에서 가장 더러운 욕망이 돈과 육체적 욕망임을 분명히한다.
전진호에 탄 조선족들, 그들의 욕망은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다. 그들은 이 영화 속 인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욕망이 아닌 가족의 욕망을 대신하려다 고기창고에서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가족을 위해 살려는 욕망을 가진 이들을 한 번에, 아무런 의미없이 죽였다. 가족을 위한 욕망일지라도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동식(박유천 분) 과 홍매(한예리 분)이다. 동식은 극한 상황에서도 홍매라는 여인에게 사랑을 다한다. 청량고추를 넣은 라면까지 준다. 이 배에서 최고의 음식이다. 사랑이란 욕망임을 보여주는 청량고추 라면빨 은유이다. 홍매 역시 동식의 사랑을 갈구하고 이로 인하여 죽음을 모면한다. 결국 배에 탄 사람들 중, 단 둘만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영화는 사랑을 욕망의 우듬지에 놓으려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가 여기서 끝났을 때 이야기다.
홍매는 동식을 떠난다. 홍매는 동식에게 몸까지 주었지만 그것은 결국 살기위한 거짓이었다.
그리고 6년 후, 중국집에서 동식은 6살쯤 된 아이와 그 보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 라면을 시키고 청량고추를 찾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자기집착, 선량함, 가정, 돈, 육체, 타인의 욕망, 사랑이라는 욕망을 그려낸 영화의 가장 나중의 욕망은 무엇일까?
영화는 모든 이의 꿈조차 산산이 부수어 놓았다. 전진호의 만선에 대한 꿈도 밀항자들의 남조선 도착의 꿈도 모두 해무 속에 사라졌다. 
대신 영화는 그 자리에 사랑이란 욕망을 슬며시 놓았다
동식은 홍매라는 사랑을 지키려다 배의 선원 모두를 잃었다. 동식에게 홍매는 사랑이라는 욕망이었다. 동식은 그 사랑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렸다. 동식은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며 사랑의 힘을 이미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영화는 동식이 부모가 없으면서도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랐음을 보여주었다. 전진호가 부두를 떠날 때 다시 돌아 오라고 손을 흔든 것은 동식의  할머니였다. 동식은 할머니의 바람대로 살아 돌아왔다.  살아돌아 올 수 있는 힘이 사랑임을 영화는 곳곳에 장치해 두었다. 
영화는 왜 모든 욕망이 부재한 자리에 사랑을 두었을까?
그런데도 홍매는 왜 동식을 떠나가버렸을까?
 홍매는 구로동에 사는 오빠를 찾아서 갔다. 홍매의 사랑은 동식이 아니라 구로동의 오빠였다.
홍매가 남조선을 향해 밀항한 이유는 그래 다른 밀항자들과 달랐다. 홍매는 구로동에 먼저 와 있는 사랑하는 오빠(애인)를 찾아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6년 뒤, 6살쯤 된 아이와 뒤태만 보이는 여인이 연변 말로 주문하는 라면과 "청량고추 없습네까?"는 무엇을 말하는가?
6살쯤 된 아이. 동식의 아이일 것이다. 홍매는 구로동의 오빠와 살면서도 동식을 품에 간직하고 있다는 은유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의 사랑이 욕망의 가장 우듬지에 놓인다고, 그러나 사랑은 배신할 수 있다고, 그러나 사랑은 단 하나라고.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항해하는 바다에 안개가 끼는 것은 일상이다. 영화는 그 안개 낀 것과 같이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이 세상의 우리네 삶을 따라 잡았다. 우리의 인생길이 바로 해무낀 바다에 뜬 배 한 척의 항해와 같다고.
그리고 영화는 그 인생길을 항해하는데 단 하나의 욕망, 즉 사랑을 희망의 등대불로 놓았다.
오늘도 내 인생엔 잔뜩 해무(海霧)가 꼈다.
난 오늘 무엇을 욕망하는가?
 
첨언 몇 자: "에이! 이런 영화를 왜 보러 왔어. 너무 잔인해." 내 앞자리에서 영화를 본 앳된 여성이 남친의 옆구리를 치며 하는 말이었다. 모든 문학은 해석의 문제이기에 가타부타할 필요없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 저 '전진호'가 아닐까? 자살률 OECD국가 중 1위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몇 명이 자살을 하였다.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오죽하였으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젊은이여, 결코 희망 뺏기지 말라"라고 하였을까.  
그나저나 앳된 여성과 남친은 무엇을 욕망할까? 사랑? 아님-------

해무 (2014)

7.4
감독
심성보
출연
김윤석, 박유천, 한예리, 문성근, 김상호
정보
드라마 | 한국 | 111 분 | 201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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