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3. 09:36ㆍ삶(각종 수업 자료)/나의 이야기
정전(正典)이 아닌, 정전(停典)이다!
엊그제 2012년 9월 1일 토요일, 00대학교에서 열린 학회에 들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대학교정은 학생들의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100차 00문학회 정기학술대회-주제: 문학연구 교육과 정전 재수립’이란 플랜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음...미묘한 문제입니다만...대강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대 국어교육 11명, 국어국문 10명, 고려대학교 국문과 3명, 국어교육 10명, 그 외 서강대 1명, 한양대 1명, …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질문에 대한 발표자의 답변이다. 필자가 토론을 맡은 논문은 <2009 개정 문학 교과서의 정전 구성의 동향>이었다. 필자의 질문은 이랬다.
“1) 정전중심주의는 편벽된 특수성의 틀거지를 만들고 끝없는 학문의 근친상간으로 인한 학문적 열성유전자를 생산한다. 이는 우리 학계에 만연하여 사이비 학문과 학자로서 정신적 불구를 만드는 저수원인 학연과도 연결된다. 이와 관련하여 교과서 필자진과 출신학교 분포도는 어떻게 되는가?”
이 논문은 현행 고등학교 문학교과서 Ⅰ, Ⅱ에 수록된 고소설을 중심으로 정전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로 미루어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은 각종 시험에 문제로 나오기에 학생들과 교사들은 이 작품의 분석에 온통 매달린다. 이러한 작품은 문학교과서 Ⅰ, Ⅱ를 통틀어도 겨우 두 세 작품 밖에는 안 되기에, 1000여종에 이르는 고소설 중 가장 우듬지인 정전(正典)으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문제는 ‘정전’이란 두 글자가 지니는 규범, 척도, 표준이란 함의이다. 따라서 정전은 문학사와 시대사, 문학성과 시의성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 고등학교 문학 활동이 지향하는 능동적 문학 활동, 창의적 사고, 공동체 문화 발전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선정되어야한다. 마땅히 교과서 집필진은 정전으로 보편타당한 작품을 선정하려는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고, 응당 교과서를 발행하는 출판사는 교과서 집필진 구성에 엄격한 잣대를 보편타당하게 들이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음...미묘한 문제입니다만...” 발표자가 필자의 질문에 상당히 난처한 입장인 듯 운을 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논문 또한 고민처가 여기다. 발표자는 필자의 질문에 대강 조사해온 자료를 난색을 표하며 읽어 내려갔고 그래도 “…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으나 대강 조사해 온 것이기에 타당한 결론인지는 알 수 없다.
타당한 결론은 대강 조사해온 자료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일부 대학이 중심임이 번연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학교과서 Ⅰ, Ⅱ에 수록된 고소설은 이미 정전으로서 문제성을 출발부터 내재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물론 일부 대학 출신만으로 교과서 집필진을 구성해도 정전에 문제없다는 이론에 동의할 이도 없지 않겠으나 궁색한 변명을 꽤나 늘어 놓아야할 것이기에 그 이유를 조목조목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정전(正典)이 문제이기에 학술대회까지 열었다. 더욱이 이 정전 문제는 우리나라 학연의 폐단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학술발전을 저해하는 괴물 같은 암적 존재이다. 그런데 이 학술자리에서조차 이를 ‘미묘한 문제’라 하여 두루뭉수리 구렁이 담 타듯 넘어간다면 내 학자로서 양심은 어디에 가서 찾아야하나? 이쯤이면 문학교과서 Ⅰ, Ⅱ에 수록된 고소설은 바를 정(正) 자 정전(正典)이 아닌, 잠시 머무를 정(停) 자를 붙여 정전(停典)으로 해야 마땅하다. 몇 년 동안만 잠시 문학 교과서에 수록한다는 뜻의 정전(停典) 말이다.
필자는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참석자들 중 누구도 이에 대해 보충 질의가 없었다. 서둘러 자리를 일어서 도망치듯 학회장을 빠져나왔다. 싱그러운 대학교정에 늦더위와 함께한 가을 햇살이 언제부턴가 표독스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2012년 9월 3일
간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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