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의 패러독스와 삼류대학

2009. 1. 31. 21:32글쓰기/이 세상은 사각의 정글이 아니다!

제논의 패러독스와 삼류대학

 

그리스 신화의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10m 뒤에서 거북이의 10배의 속력으로 달리기를 했다고 가정했을 때, 도저히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제논은 변화를 인정한다면 그 시간은 무한대로 나누어 질테고, 그럼 아킬레우스가 10m를 갈 때 거북은 11m, 아킬레우스가 11m를 갈때 거북은 11.1m, 아킬레우스가 11.1m 거북은 11.11m, 아킬레우스가 11.11m 거북은 11.111m하는 식으로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다.

 

‘제논의 패러독스’이다. 제논(그리스어: Ζήνων ὁ Ἐλεάτης, 기원전 490년 경 - 기원전 430년 경)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다. ‘제논의 패러독스’에 의하면 영원히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3류대 졸업생들은 애면글면 참 힘들게 세상을 산다. 사회에 나와 어섯눈 뜨고 비로소 이런 뿌다구니에 생채기를 입고서야 저런 사실을 알았을 때는 발괄할 곳도 없어 엉절거리며 망연할 따름이다. 물론 모든 3류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3류대 구성원들, 특히 학교, 선생이 그리고 직원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할 문제이다. 자기들에게 편안한 가정을 꾸리도록 월급을 준 저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는 순간 갈 곳이 없다.

혹자는 주판질을 하여 이 모든 것을 3류의 자업자득으로 몰아친다. 애초에 혜안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잘못을 공부 못한 3류대 생과 졸업생이 지기에는 문제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부에 관심이 지나치다. 잘났건 못났건 모두들 공부에 관해서는 내공이 여간 아니다. 그래서 자신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면서도 소란스럽게 옴니암니 3류를 외대거나 아예 ‘재생불량성’으로 진단하고 재재대는 이들도 퍽 많다.

 

하지만 ‘병촉야유(秉燭夜遊,촛불을 잡고 밤중에 노닌다는 뜻으로, 횃불을 밝히고 밤이 깊도록 유락한다는 의미)’처럼 책을 잡아 놀지 못함을 한하고 이제 와서 ‘수행병하(數行竝下,독서하는 안목의 날카로움을 말함)’를 탓한들 이미 그릇된 일이니 속절없다. 그렇지 않아도 형영상조(形影相弔,자기의 몸과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 몹시 외로워함을 이르는 말)요, 달리 변통할 재주가 없는 ‘우물고누 첫수’인 인생들이다.

3류는, 1류가 책 볼 때 딴 짓을 했거나 아니면 부모의 은공을 덜 입어 기본적으로 두뇌가 모자란다는 등속의 그런저런 곡절이 있다. 그러나 3류라는 말 요술이 이토록 매섭게 인생의 여울목을 저토록 거세게 지킬 줄 알았다면, 어리눅게 3류대에 등록금을 그토록 갔다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The Law of Unintended Consequnces,경제학 용어로,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인간 본성이나 시장 원리에 어긋나면 본래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이론)”이라는 용어를 진작에 알았던들 생각을 달리하였을 것이다. 정녕 공부에는 일호반점(一毫半點)도 뜻이 없는데 소일삼아 다녔다고 하기에는 들인 노력이 적지 않다.

좋건 궂건 초라한 날들도 삶의 골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영 부정한다면 그 많은 3류는 다 어쩌란 말인가.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굽어도 ‘지지리도 공부 안 한, 여줄가리 3류’라고 돌림매질을 해 대어 무엇 한단 말인가. 그러니 인생을 한 번쯤 꺾어 돌린 것을 그다지 타박치 말았으면 한다. 가장 못 참을 것은 3류의 허락 없이 보내는 살천스런 1류의 월권적 시선이다. 자존심을 유린당하니, 더 이상 지청구를 퍼붓지 말았으면 한다.

 

1류로 놓고 보자면, 대한민국 스물에 하나만 빼고는 2․3류이니 이들을 모두 ‘우수리 인생’으로 여길 것이 무에 있는가. 짧지 않은 인생에서 20대의 대학입학은, 결과가 아닌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도 출신대학을 근본으로 여기고는, 단판 씨름으로 일생을 내 놓으라는 것은 야속한 일이다. 1,2,3류는 ‘제논의 패러독스’가 아니다.

‘제논의 패러독스’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결과와 다른 결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역설(패러독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제논은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면서 물체가 이동한 거리만을 고려하여 물체가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려하지 않았다. 물체의 이동은 속도에 의해 표현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제논의 패러독스’는 성립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간과함으로써 논리의 허점을 이용한 속임수이다.

 

‘제논의 패러독스’를 깨는 ‘시간’이 바로 2,3류의 ‘노력’이다.

“근본 가지구는 사람을 말하지 못하네. 갖바치에서 생불이 나구 쇠백정에서 영웅이 나는 걸보게.”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오는 말이다.